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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라지엘이 제위에 오른 후 어느덧 가을이 왔다. 그간 황궁에서 연달아 일어난 일들로 인해 황도 아이얄의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했는데, 하리는 그런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낙엽이 지저분하네. 쓸어볼까.”
그녀가 창 앞에 서서 밖을 보고 있던 때, 마침 대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는 히엘의 부탁으로 최근 하리와 함께 살게 된 전 황태자 티에리아였다. 열다섯 살 또래의 학생들과 평범한 학교에서 평범한 수업을 받게 된 그 소년은 세드릭이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제 백부의 우려와는 달리 충실히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궁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만 자라왔기에 평민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학생으로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임에도 불구하고 적응력이 뛰어났다. 단지, 하교를 한 후 집에 와서는 그 분위기가 조금 다를 뿐이었다. 세드릭은 집에만 오면 실어증에 걸리기라도 한 듯 말이 없었고, 마치 가면을 바꿔 쓴 듯 어두운 표정이 예사였다. 하리는 세드릭에게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왔니? 오늘 학교는 어땠어? 날씨 춥지?”
대답은 없었다. 하리는 한숨을 쉬며 주방으로 갔다. 미리 만들어둔 빵과 스프가 데워져 테이블에 차려졌다. 한참 후 씻고 나온 세드릭은 하리에게 이끌려 강제로 테이블에 앉았다. 세드릭은 그 음식들을 종이 씹듯 무미건조하게 먹었다.
“오늘도 내가 직접 만들었어. 네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어. 그곳(황궁)에서 늘 좋은 재료를 주시지만, 그런 귀한 것들을 어디 손질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아무튼 이런 단순한 거라도 많이 먹고, 쑥쑥 크고, 시험공부도 열심히 해줘.”
사실 세드릭은 마력성장을 받았기에 어린 시절이라 할 만한 시간이 남들보다 적었고, 궁의 시종들처럼 굴지 않는 하리의 행동 모든 것이 낯설었다. 친근하게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가끔씩 학교에 와서 친누나처럼 구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하리가 대화를 걸어와도 늘 침묵만 할 수밖에 없었다.
“과일 챙겨올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
“보자, 따끈한 차랑 같이 내와야…… 일단 기다려.”
형제들이 줄줄이 살해당하고 어머니가 자살한 사연이 있는 소년이었다. 제 아버지마저 죽어버렸다고 알고 있는, 그리고 소년 자신마저도 영원히 자신의 진짜 이름을 숨기고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 소년이 가여워서, 하리는 언제나 소년에게 살갑게 대해주었다.
“많이 먹어. 다 먹어야 한다. 그럼 난 좀 올라가서 쉴게. 설거지는 내버려 둬.”
씁쓸히 웃으며 2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황궁으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요즘 그녀에겐 세드릭을 돌보는 것 외에 임무가 하나 더 있었다. 이레에 한 차례 황궁에 들르는 것이었다. 황궁에 간 그녀가 하는 일은 제 아들과 마찬가지로 한 마디도 하지 않는 핀, 폐인이 되어버린 전 황제에게 바느질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말이 수업이지, 진짜 목적은 그곳의 시녀에게 세드릭의 안부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 안부는 히엘에게 전해졌다.
그녀가 히엘의 명령에 흔쾌히 임할 수 있었던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일단 일개 소시민의 생계문제로 볼 때, 황제의 조카를 돌보는 것은 직물길드보다 보수가 좋았다. 게다가 어머니를 잃고 혼자가 된 그녀는 세드릭과 사는 것이 적적하지 않아 괜찮다고 생각했으며, 황궁에서 보낸 사람들이 집 주변을 몰래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도 장점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런 것들 보다 좀 더 은밀한 장점은 따로 있었다. 사실 그녀는 이레에 한 번 황궁에 가서 핀을 보며 통쾌해지고 싶었다. 자신이 갇혔던 그 가공간에서 핀이 폐인이 되어가며 갇혀버린 모습을 보는 것은 한때 그의 피해자로 괴로워해야했던 그녀만의 소소한 복수 심리를 충족시켜주었던 것이다.
하리는 가공간의 니이새 둥지로 이동을 막 마쳤다. 조금 더 걸어가니 주황색 지붕 집이 나왔다.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시녀의 인사를 받았다.
“어서 오세요. 그 분께서는 지금…….”
“알아요. 또 안에서 자고 있겠죠. 차 좀 부탁해도 될까요?”
핀이 무얼 하건 하리에겐 그리 중요치 않았다. 그녀는 맡은 바 일에 충실할 뿐이었다. 그녀는 시녀에게서 받은 차를 홀짝이며 흔들의자에 앉아 수업준비를 했다. 제왕의 자리를 제 형에게 빼앗겨버리고 마음을 닫아버린 핀에게 직물의 특징이라던가, 색조에 관한 이야기가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수면약에 취해 잠들어 있는 것이 예사였다. 지금도 그러한 듯했다. 하리는 이렇게 된 참에 그냥 책이나 보고 놀까 궁리하며 하품을 했다. 그때였다.
“나가.”
시체처럼 꼼짝도 않던 핀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 말하자 하리는 웬일인가 싶었다. 그 누구와도 대화를 않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연 순간이었다. 분명히 ‘나가’라는 말을 들었지만, 하리는 나가지 않았다. 놀랍다는 듯 대꾸할 뿐이었다.
“아, 이제 말하는구나? 저기, 이분이 드실 차도 한 잔 부탁드릴게요.”
시녀에게 그렇게 말하는 넉살을 보일만큼 그녀는 핀의 앞에서 여유로웠다. 핀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직접 열고 하리를 향해 다시 말했다.
“가라고 했어.”
바느질 따위는커녕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으리라. 그런 그의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하리는 그래도 히엘을 생각하며 꾹 참아보았다. 손 빠른 시녀가 금세 차를 가져오자 그것을 받아든 그녀가 새 잔에 차를 따르며 담담히 말했다.
“가지 않을 거야. 폐하의 명령만 들을 거니까.”
핀의 눈썹이 사납게 씰룩였다.
“끌어내줄까?”
“대체 왜 그래?”
되묻는 그녀가 핀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었다. 하리는 그의 시선을 모른 척 꿋꿋이 말했다.
“착각하지 마. 너 때문에 오는 거 아니야. 폐하께서 네게 바느질을 가르쳐주라 하명하셨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안부를 전해드리러 오는 게 내 진짜 일이니까.”
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심술을 왜 모르랴. 하지만 자신에겐 그것을 견뎌줄 여유가 없었다.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마음에도 없는 수업들을 아주 재미있게 하더군. 이런 짓이 재미있어?”
“…….”
“아주 속이 후련한 표정…….”
“후련해.”
하리는 솔직하게 말하며 핀의 빈정거림을 막아버렸다.
“무엇하나 무서울 게 없던 네가, 그래서 사람들도 쉽게 마구 죽이던 네가,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 처박혀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게 나는 너무 후련해. 내내 후련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꼴좋다, 통쾌하다, 그 미친 기세는 다 어디 갔느냐 조롱하면서 네 속을 수백 번 후벼 파고 싶었어. 그래봤자 내가 당했던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작을 테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해도 핀에게는 충분한 고통이었다. 그런 그가 하리의 고통까지 헤아리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볼 여유가 있다는 건 지금으로서는 어불성설이었다. 언제나 소심하고 주눅들어있고 나약하며 미쳐있는 그녀의 모습만 기억에 담아두고 있던 핀은, 그녀의 가시 돋친 말에 처참히 속이 후벼 파져 그대로 멈춰버렸다. 온 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리가 핀을 스쳐지나가며 이어서 말했다.
“이렇게 망가져버린 너 따위에게 당했다는 게, 가장 화가 나.”
독처럼 치명적인 아픔이 핀을 찔렀다. 대륙 통일의 도구로써만 철저하게 이용되었다는 비참함에 이어 그녀에 대한 죄책감까지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오자, 지쳐버린 그는 눈을 감고 현실을 외면했다. 뜨거운 뭔가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걸음을 멈춘 하리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그간 늘 궁금했지만 물을 수 없었던 것을 질문했다.
“왜 하필 많고 많은 일 중에 바느질이었어? 왜 넌 그걸 선택해서, 날…….”
이 남자의 취미가 바느질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면, 적어도 자신이 그렇게 납치될 일은 없을 것이고, 나쁜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뒤늦은 질문이지만 그녀는 알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이 가련한 폭군이 바느질이라는 어울리지도 않는 것을 취미로 삼았는지.
눈물을 들키기 싫은 핀은 침대로 걸어갔다. 허무함에 사무친 목소리가 나왔다.
“아무런 이유 없어. 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바느질이든 무엇이든 하려고 했을 뿐이야. 대답이 됐어?”
하리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원치 않던 마력성장을 겪고 원치 않던 잔혹한 훈련의 시간을 거친 그가, 그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 그것을 휴식 삼아 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핀쿠션 하나에 기를 쓰고 잘해보이고자 했던 지난날의 핀을 떠올리며 남모를 사연이 있을 거란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핀이 팔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
“다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 피차 마찬가지야.”
“…….”
“하지만 이 말은 하고 가야겠어.”
괜한 참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리는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나는 갇혀있었을 때 말이야. 바늘을 잡는 게 딱히 좋아서 했던 건 아니었어. 할 줄 아는 게 그거밖에 없어서 했었어. 그러니 너도, 이렇게 된 김에 나처럼 해. 네가 할 줄 아는 걸 하란 말이야. 이름만 숨긴다면 네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란 건, 꽤 많을 거야. 누군가를 가두고 죽이고 이런 것들 말고도, 좋은 일은 얼마든지 많으니까. 그럼 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