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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는 그가 황형이라는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변태, 상변태!”
“…… 광녀, 죽을래?”
그제야 하리는 구석에 가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히엘이 하리에게 다가갔다.
“으으, 오지 마세요!”
오지 말란 말에 히엘은 멈춰 섰다.
“그래, 까짓 거 여기서 하지. 뭐.”
“하긴 뭘 한다는 거예요!”
히엘은 괜스레 장난기가 도져서 피곤한 중에도 엉큼한 표정을 연기해보았다.
“널 여기서 재워버릴 거란 말이지.”
그 말은 이곳에서 핑리스를 걸어 황궁으로 데려간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재워버릴 거라는 말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하리의 표정은 새파래졌고, 그녀는 입을 크게 열었다.
“안 돼애……!”
[핑리스.]
그렇게 하리는 의식을 잃고 히엘의 뻔뻔한 사과를 받은 뒤, 황궁으로 갔다.
***
황후의 자살, 추가 마력 성장으로 후유증을 겪던 황태자의 돌연사, 황제의 심장마비, 모두 같은 날에 일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리라. 그러나 황궁은 그것을 사실이라 공표하였고, 제국민들은 그것을 반신반의하며 새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히엘이 성검에게 부탁한 대로, 핀과 티에리아는 살아있었다. 히엘은 티에리아를 자신이 가장 안심할 수 있는 사람에게 보살펴 달라고 부탁해두었다. 그리고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든 핀을 한때 하리가 이용하던 가공간에 가두어버렸다. 현재로써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조카와 동생을 살렸지만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이 세간에 알려져서는 곤란했다.
제국은 대륙 곳곳에 강력한 마나의 탑을 성공적으로 세움과 동시에 히에라지엘 델 사르제스라는 전 황형을 제국 8대 황제로 맞이하게 되었다. 황손들의 장례식 후에 일어난 대관식이었기에 궁은 다른 대관식 때보다 더욱 얼어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제국민들은 새 황제를 열렬히 환호했다. 정복 전쟁을 한다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던 핀라이트가 죽고, 대신 능력 있는 마법사 출신에 온화한 성정이라 알려진 히에라지엘이 제위에 오른다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고 있었다.
물론 그의 즉위를 제국민 모두가 기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때 히엘과 즐겼던 여인들은 기뻐하는 것보다 만 가지 상념에 빠지고야 말았다. 그 바람둥이가 황제가 되다니, 이럴 줄 알았다면 제대로 유혹할 것을, 피임을 안 했더라면 어땠을까, 황제가 되었으니 적어도 그날 밤 영상에 대한 보안은 철저하겠군, 등등 그들은 아이얄대로에 걸린 새 황제의 초상화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곤 했다.
대관식이 치러진 뒤 발 빠른 드래곤은 핀의 마활들을 제 수하에 두었다. 그리고 대관식 공물로, 정제된 10톤의 흑괴석을 요구했다. 마활들에게 걸려있는 충성의 맹약을 핀이 아닌 히엘을 중심으로 변경시켜주겠다는 조건 역시 공물요구에 추가된 사항이었다.
이제껏 머슈타트의 탄광에서 나온 흑괴석이 총 10톤이 되지 않았는데, 정제된 흑괴석을 10톤이나 만들라는 말은 즉 마활들을 미리 풀어줄 테니 드래곤이 시키는 일은 다 하라는 뜻과 다름없었다.
히엘은 고민에 빠졌다.
고귀한 마법 노동력인 마활을 살리게 되면, 정제된 10톤의 흑괴석을 만드느라 머슈타트 광산의 노예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그렇다고 수많은 노예들을 살리자니, 어렵게 모은 고귀한 마법 노동력들이 사라질 것이다.
‘어쩐지 그때 드래곤 그 자식이 염산 브레스로 마활들을 죽이지 않고 암흑 브레스로 어딘가 숨기는 게 이상하다 생각했어. 젠장, 이딴 거 재는데 흥미 없는데 짜증나 죽겠네.’
답답한 그는 엽궐련을 연달아 다섯 개나 태워버렸다. 선택 장애란 이런 것인가. 만약 핀이라면 고민도 하지 않고 마활들을 지켰을 것이다. 정제된 흑괴석 10톤을 어찌 줄 수 있느냐고 따지면서 심지어는 드래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또 무고한 생명들만 죽어나가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노예들을 혹사시키자니 머슈타트 광산의 사정을 생생하게 눈에 담은 적이 있던 터라 내키지 않고. 애당초 이런 복잡한 생각, 그리고 결단을 내리는 것이 부담스러워 어느 순간부터 황제를 욕심내지 않고 동생을 열심히 돕기만 해왔던 히엘이었다. 즉위 초기 때부터 이런데 앞으로의 문제들은 또 어떻게 해결할지 막막해진 그가 한숨을 쉴 때였다.
“폐하, 얼른 공물 조약서를…….”
“사흘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하시오.”
“벌써 세 번째 연기입니다만. 그리고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태후께서 저번에 말씀하신 그…….”
히엘은 숨이 막혔다. 핀의 장례식 후 앓아누웠던 태후는 기력을 겨우 차리자마자, 황후를 들이라고 성화를 내며 히엘을 기겁하게 했다. 그렇게나 권력 유지가 중요한가? 중요할 것이다. 알고 있다. 왜 모르겠는가.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도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키길 원치 않는다면 얼른 황후를 들이고 후계를 봐야 제국민들에게도, 성검에게도, 칭송을 받을 것이었다. 하지만 결혼? 같이 놀던 아가씨들도 아닌 고고한 귀족 영애들과의? 으악. 황제 업무도 버겁다고. 스물여섯 총각의 마음은 답답해진다. 지금도 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도망치고 싶은 히엘이었다.
“젤레테스 대공의 영애가….”
“거기까지. 흠. 잠시.”
결국 히엘은 업무 중 농땡이를 부리러 도망가고 말았다.
***
꿈은 아무렇지 않게 아픈 기억을 찌르는 불친절함이 있다. 검은 안개 속에서, 어린 핀은 단도를 쥔 채로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 초조해진 그에게 누군가가 말을 건네 왔다. 아버지였다.
“가거라. 그리고 즐기고 오너라.”
단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의 말에 단 한 번도 거역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딘가로 가야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즐겨야 했다. 발이 움직였다. 한참 후에 낯익은 광산촌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달빛으로만 구분할 수 있었지만 분명 자신이 다녔던 평민 학교, 그리고 낡은 주택들의 모습이었다. 무언가를 숨기기 좋고, 누군가를 시험에 들게 만들기에도 적당한 분위기. 마치 연극 무대 같은 그곳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당신은?”
“흐흐, 사르제스의 피…….”
그는 주술에 걸려 황태자 핀라이트를 공격하게 된 노예였다. 핀은 직감했다. 이제부터 아버지가 즐기라고 한 것에 혼자서 마주해야한다는 것을. 이 잔인한 시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노예가 쥔 검이 날래게 핀의 머리로 향했다. 핀은 놀라서 그만 울고 말았다.
“흑, 이러지 마세요! 저는, 나는, 나는 너 같은 놈에게 이렇게, 절대……!”
거짓 신분 광부 토슈의 아들 레인에서 황태자 핀라이트의 내면이 서서히 드러났다. 핀은 울고 있었지만, 그 손은 노예의 머리에 수없이 난도질을 하고 있었다. 노예를 죽여야 했고,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공포, 그것은 그를 끔찍하고도 잔인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하, 하하…….”
밤하늘보다 짙은 피 냄새가 주위를 물들였다. 턱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시체가 된 노예의 몸에 톡톡 떨어졌다. 서글픈 눈동자는 피에 젖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울고 두려워하면서도 습격을 해온 노예를 단숨에 죽여 버렸다. 어디서 그런 속도와 괴력이 나오는지는, 자신도 잘 몰랐다. 어쩌면 죽음의 위기를 실감한, 공포 그 자체의 힘이리라. 핀은 차분해지려 애를 쓰며 노예의 머리에 박힌 칼을 빼냈다. 자신이 가진 미미한 마력으로나마 주변의 피를 정화시키고, 노예를 학교 뒷산 구덩이에 파묻어두었다.
그러한 밤이 몇 번이나 지나갔다. 자신의 진짜 신분이 누군가에 의해 노출 되어 늘 불안했다. 황궁에서 귀환하라는 명이 내려오지 않는 이상, 이 지옥 같은 생활을 무조건 견뎌내며 살아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황태자의 재목으로 뽑혔다한들, 자신에게 미래란 없었다. 그저 누군가가 구해주길 바랐다. 평민의 체험 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 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버지가 왜 이런 일을 즐기라 했는지 그 당시엔 절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밝혀졌다. 탄광촌도, 학교도, 사람들도, 모두 다 가짜였다. 평민 생활을 체험해보라던 아버지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자신은 그저 거대한 무대에서 살인기계로 훈련된 꼭두각시일 뿐이었고, 그런 성장과정을 지나 대륙을 통일한다는 미명아래 수많은 이들을 학살한 죄인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 죄책감이 꿈에 그녀까지 불러온 것일까. 그녀, 엔은 수없이 꿈에 나타났다. 엔 역시 그 거대하고 잔인한 무대에서 청소부라는 주변인으로 연기를 했으리라. 엔은 꿈에서 늘 ‘더 베고 자라’며 핀의 죄의식을 깊게 찌르고 도려냈다. 그녀로부터, 그곳으로부터, 과거로부터, 핀은 도망을 치다가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