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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44화 (4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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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엘이 질문했고, 드래곤은 긴 설명을 이었다.

핀라이트는 글을 깨우친 뒤 고작 1, 2 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검술과 전쟁에 관심이 있었으며 나이 차가 꽤 나는 제 형에게도 이기려 드는 호기어린 성격이었다. 하지만 히에라지엘은 그 반대의 성격이었다. 검을 드는 것도 싫어하고 정원에 돌아다니는 애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만큼 유약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력만은 충만하여, 마법전으로 우뚝 섰던 제국 황제에 어울리는 구석도 있었다.

제국은 대륙 통일의 목표가 있었고, 빠른 달성을 위해서는 포식자의 기질을 갖춘 핀을 먼저 황위에 올려야 했다. 지네스테코는 어린 핀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마력 성장을 시킨 뒤, 그곳으로 보냈다. 그곳은 머슈타트 탄광 속 가공간으로, 오직 핀을 위한 훈련소였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투입되어 학교 교사, 광부, 청소부, 암살자, 상인의 연기를 했다. 그들은 낮에는 머슈타트 인들이 되어 실제 머슈타트 사람들처럼 굴었고, 밤이 되면 순번에 따라 황태자를 암살하러 기숙사에 쳐들어갔다.

핀은 그 어떤 동료도 믿지 못하는 외로운 맹수가 되어야 했다. 낮에는 광부 토슈의 아들 레인이 되어 평범하게 수업을 받았고, 밤이 되면 자신을 노리는 수많은 수상한 자들을 상대해가며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할 위기 속의 나날들이었다. 공격을 해온 이들 중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운동을 하던 친구가 있었고, 아름다운 옛 민요를 가르쳐주던 교사도 있었다. 모두가 핀의 손에 죽어갔다. 어느새 핀은 배신과 피에 익숙해졌고, 대륙을 정복하는 자 특유의 무자비함과 야비함을 모두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잔인한 훈련법은 전 대륙에 사르제스의 깃발이 꽂힌 영광의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그러나 통일 후, 핀이 짊어진 죄과는 너무나 무거웠다. 제국민들은 무거운 전쟁세금을 부과하던 황제를 풍자하지 못해 안달이 났고, 하층민이 된 전쟁포로들은 황제를 주인공으로 흉흉한 노래를 만들어 부르며 그를 저주했다. 그런 와중에 이제, 황제를 도와야 할 성검 또한 황제가 슬슬 옥좌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성검과 지네스테코의 약속대로, 히엘이 옥좌에 오름으로써 제국 7대 황제의 죄과를 지워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성검은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자신이 부리는 재야 마법사들을 이용해 티에리아에게 제 아버지를 죽이라고 세뇌를 걸게 했다. 그 후에는 황후, 황후가 뱃속에 품고 있는 아이, 그리고 황태자 티에리아마저도 죽기로 되어 있었다.

도구는 또 다시 하리가 선택되었다. 굳이 다른 사람을 고를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팔찌를 이용하는 것이 성검에게도, 성검이 부리는 마법사들에게도 편한 일이었다. 성검은 하리의 팔찌에 살카령 동사균을 심을 것을 지시했다. 살카 전에 참전했던 황제가 전염병에 감염되어 황후, 황태자까지 감염시킨 뒤 함께 죽었다고 세간에 알려지면 히엘은 자연스레 황제에 오를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마활들이 전원 없어져야 했다. 황제를 위해 충성의 맹약을 맺은 그들은 성검에게 매우 불편한 존재로 변해버린 것이다. 성검은 자신이 부리던 마법사에게 지시하길, 하리의 팔찌에 동사균을 심으러 갈 적에 마활 로브를 입고 있으라고 했다. 그래야 히엘이 그 마활 로브를 보고 황제에게 고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황제의 성격상 마활들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아슬아슬한 상태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성검의 계획은 엉뚱한 곳에서 틀어지고 말았다. 히엘의 돌출 행동 탓이었다. 성검의 계획대로라면 히엘은 마활 로브를 입은 괴한을 보자마자 하리를 궁에 데려와야 했다. 거기까진 순서대로 되었다. 각본대로 황제가 가장 낮은 위계의 마활들을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팔찌 속 전염병의 기운이 채 퍼지기도 전에, 히엘이 하리를 데리고 검은 산으로 오고야 말았다. 그는 당시 황제의 볼일을 보는 모습을 마법영상구로 몰래 찍다가, 팔찌에서 검은 기운을 발견하고서 그길로 하리와 함께 검은 산으로 도망을 한 것이었다. 황궁을 벗어난 팔찌는 원래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성검의 계획은 철저히 틀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성검의 뜻을 모르는 히엘은 마활들을 전부 이끌고 검은 산에서 팔찌를 파헤치려 하고 있었다.

당시 드래곤은 히엘에게 있는 사실 그대로를 가르쳐 주었었다. 성검의 목적, 하리의 팔찌에 깃든 의미, 가만히 있어도 아무런 탈 없이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걸 우회적으로 표현했던 말 등. 그

리고 황후가 자살을 하게 된 지금, 성검은 모든 계획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가이덴에 적을 두고 있던 황후의 장례식도 냉정하게 말한 황제가 가이덴의 싹을 도려낼 수도 있는 일이었고, 그렇게 된다면 성력으로써 존재하던 성검에겐 또 한 번의 위기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직접적으로 두 형제를 만나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이로써, 시대는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성검의 뜻이네. 피에 젖은 전쟁광은 이제 제국에서 필요치 않다는 말이지.]

기나긴 드래곤의 말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말을 들을수록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핀은 이미 한참 전부터 히엘에 의해 핑리스에 걸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히엘은 핀과 똑같은 참담한 기분이었지만 일단 호위병사들에게 지시해 황제를 황궁으로 돌려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성검에게 직접 물었다. 아니, 그것은 따지는 것이었다.

[대단하십니다. 차라리 그 빌어먹을 존체로 직접 녀석을 찔러버리시지 그러셨습니까? 온갖 도구며 장치며 꿍꿍이 만드시느라 피곤하지 않으셨습니까?]

성검은 너스레를 떨었다.

[성검이 ‘황제’로 앉아 있는 자를 찌르는 일이 어디 있는가. 하하.]

성검은 드래곤의 이야기를 듣던 핀의 표정, 그 분노를 떠올리며 미쳐버린 황제는 죽일 필요도 없다 생각했다. 그리고는 히엘의 분노를 철저히 희롱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보게, 히에라지엘. 한낱 우애와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 수백 년간 만들어온 제국의 영광을 버리려 하지 말게. 대륙은 평화의 시기를 맞이할 필요가 있네. 이 대륙의 모든 존재들은 그 눈부신 휴식을 누릴 권리가 있단 말일세.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데엔 자네만한 자가 없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는가?]

[예,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알고 있었다. 이론으로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한 세계가 안정적으로 지속되려면 권력의 단일화는 피해갈 수 없는 수순이었고, 제국이 그 짐을 짊어졌으며, 가이덴이 그것을 도왔다. 그것이 통일제국의 최상위 이해관계였다. 그러나 성검과 달리 인간인 이상, 히엘은 ‘한낱 우애’라고 표현하는 성검에게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미천한 인간은 그저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성검을 노려보는 히엘의 얼굴에 더욱 그림자가 짙어졌다. 당장이라도 성검을 펄펄 끓는 쇳물에 녹여 마력으로 소멸시켜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자신은 너무나 약했다. 성검과 드래곤, 두 존재보다 더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어야만 복수가 가능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장은 그 가여운 동생의 형으로서, 간곡히 부탁할 뿐이었다.

[녀석과 녀석의 아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그러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 되어드리겠습니다.]

성검은 이미 확정이 난 현실에 자신이 뭐라도 되는 양 조건을 내거는 인간, 히엘을 가소롭게 여기며 대답했다.

[그러도록 하지. 단, 세상 그 누구도 그들을 살아있는 존재들이라고 알아선 안 되네.]

그것은 핀과 티에리아의 기나긴 은거생활을 예고하는 말이었다.

***

지쳐버린 히엘이 향한 곳은 일단 마계의 마법 수련장이었다. 그는 수련장에 도착하자마자 하리를 보았고, 하리는 퉁퉁 부은 얼굴을 한 채 뭔가를 급히 등 뒤로 숨겼다.

“하리, 놀랐지? 잠시 무슨 일이 있어서…….”

말을 하던 히엘은 그녀가 숨기는 것이 무엇인지 슬쩍 살피다가 웃고 말았다.

‘이런 때에 웃음이 나오게 하다니. 너도 참 재밌다.’

히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리가 숨기고 있는 것은 마법영상구였다. 그 안에는 ‘제국의 탕아’인 자신이 한때 술에 취해 누군가와 질펀하게 즐기는 모습을 찍어두었던 영상들이 가득했다. 퉁퉁 부은 하리의 얼굴은 이런 곳에 갇히게 되어 겁을 먹고 울었던 것이리라. 그러다가 저 영상들을 보게 되었던 거겠지, 생각하니 히엘은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자신은 성검 때문에 너무나 지쳐있었다.

“가자, 황궁으로.”

그가 다가가가 하리는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진짜 뭐예요! 또 갇히는 줄 알았잖아요! 으흐흑!”

오랜만에 겪는 폐쇄공포로 하리는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륵 쏟아내기 시작했다. 히엘에겐 미안하다고, 이러이러해서 늦게 왔다고, 길게 설명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방식대로 사과를 했다.

“미안해.”

“히엘? 이, 이건……!”

마치 하리의 몸을 편한 소파처럼 취급하는 포옹이었다. 하루 동안 너무 힘들었다. 세뇌된 괴한의 칼부림을 피했고, 드래곤의 날개로 강제 이동되어 병사들의 화염구를 한 몸에 다 맞을 뻔 했으며, 장황한 드래곤의 설명에 지루해하다가 분노했고, 거기다 폭주한 동생을 기절시켜야 했다. 앞으로 황궁으로 돌아가서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세상에, 내가 황제라니? 지금은 그저 잠들고만 싶었다.

히엘은 하리를 안고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짧은 애교를 부렸다.

“봐주라, 예쁜아.”

그리고는 잠시 몸을 떼어 하리를 보며 웃었다. 어지간한 미녀도 울릴 만큼 절색의 얼굴이 웃으니 그 어떤 천사도 그만큼 아름답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가 보통 이렇게 굴면 여자들 중 십중팔구가 눈 녹듯 화를 삭이곤 했다.

그러나 하리는 달랐다. 그녀는 수련장에 갇힌 몇 시간 동안 히엘과 히엘의 여자들이 가지고 놀던 민망한 물건들, 그리고 히엘이 과거에 찍었던 낯 뜨거운 영상들까지 모두 보았기에, 히엘을 변태중 상변태로 낙인찍어버렸고, 그러한 상변태가 다 큰 아가씨의 몸을 안아버리자 화가 나는 것은 둘째 치고 반사적으로 숨겨진 폭력성만 나오고 있었다. 바로 히엘의 주요 부위를 무릎으로 쳐버린 것이다.

“윽! 너 지금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곳을, 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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