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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처음 듣는 낯선 성검어에 몸을 흠칫 떨었다. 물론 드래곤과 맞먹는 마력을 가진 성검에게 예를 갖춰야 할 것이나, 히엘에겐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미심쩍어 결례가 연속으로 나오고 말았다.
[기다리긴 뭘 기다려? 넌 뭐야?]
[자네의 치세를 보고 싶은 존재이지.]
[……!]
호위병사들은 히엘이 혼잣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핀은 직감을 했다. 지금 성검어가 히엘에게 들린다는 것을. 그렇다면 지금은 성검에게 따져야 할 때다. 성검어로 말할 수 없다면, 인간어로나마 외쳐야했다.
“제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러나 성검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히엘에게 제 의사를 전달할 뿐이었다.
[드래곤이 그러더군. 자네에게 다 말했다고. 그러니 여기까지 와서 저 검은 머리 종(핀)을 신경 쓸 필요는 없네. 난 더 이상 그와는 할 말이 없어. 그렇게 되었네.]
성검이라는 강자의 무례함에 불쾌감이 차올랐지만 히엘은 일단 정중한 태도를 보이기로 했다.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감히 여쭙건대, 제게 거부권은 없는 겁니까?]
[거부권이라, 한때 자네와 같은 말을 했다가 나의 일부가 된 자가 있었지.]
사르제스 3대 황제가 성검의 뜻에 거역했다가 성검에게 피가 흡수되어 육체가 소멸된 사건은 지금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히엘도 성검의 위력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자신이 황제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내비칠 필요는 있었다.
[저는 개미 하나 죽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입니다.]
[무언가를 죽이고 파괴해야 할 명분 따위는 이제 사라지지 않았던가. 통일된 대 제국에는 그에 맞는 지배자가 있어야하지.]
이 단호한 절대자의 뜻에 거역을 한다는 것은 무리일까. 답답해진 히엘은 어떤 충동을 느꼈다.
[드래곤이시여, 좀 태워도 되겠습니까?]
[성검을? 안 탈 텐데.]
[아니 그게 아니라…….]
눈치가 어두운 드래곤은 히엘이 애연가라는 것을 뒤늦게야 깨닫고 허락했다.
[마음대로 하게.]
히엘은 로브에서 엽궐련을 하나 꺼내어 불을 붙이고는 재빨리 한 모금 깊게 빨아마셨다. 이내 하늘에 구름 같은 연기가 아스라하게 흩어졌다. 히엘은 성검의 뜻을 핀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했다. 엽궐련이 다 탄 후, 그는 핀에게 물어보았다.
“폐하, 마지막으로 성검어를 들으신 게 언제입니까?”
“그건 왜 묻지.”
“대답이나 해.”
“꽤 됐어. 원래 전쟁 관련이 아니면 대화도 없었고. 혹시, 들리는 거야?”
“…… 예.”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핀은 그만 헛웃음이 터져버렸다.
“들립니다. 들리고 있습니다. 성검께서 하시는 말씀이 글쎄…….”
이렇게 된 이상,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은 모두 무의미하리라.
“…… 내 치세를 보고 싶다는데.”
일순간 히엘이 허망하게 짓는 미소가 핀에게 반역의 주동자가 짓는 야비한 미소로 다가왔다. 핀은 호위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손을 들었다. 저 반역자, 황형과 마활의 탑이라는 신분으로 살아오던 히에라지엘을 벌하라는 지시였다. 웅성거리던 병사들은 하나같이 급속 화염구를 생성하기 위해 주문들을 외웠다. 그들이 날린 화염구가 히엘을 노리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히엘은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그것도 괜찮겠지. 하지만.’
그의 예상대로, 화염구는 날아오다가 그대로 허공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화염구를 소멸시킨 자는 성검이 아닌, 드래곤이었다.
[자리제공만 한다고 했다.]
병사들은 공격을 중단하고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분노의 극에 달한 핀은 드래곤에게 억하심정으로 외쳤다.
[단지 자리제공의 의도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만!]
오로지 관조자에만 머물러있고 싶었던 드래곤은 커다란 한숨을 토해내었다. 이 가련한 형제들에게 진실을 말해줘야 할 의무감을 느낀 것이다. 어쩌면 성검이 그것을 바라고 이 장소를 선택했는지도 몰랐다.
[그대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7대에 이른 짧은 기간 동안 통일을 달성시킬 수 있었던 것에 그 누구보다도 성검의 공이 가장 컸다는 것을.]
가이덴 성력으로 존재하던 성검이 사르제스 역대 황제들을 도와 전쟁에 공을 세웠을 때에는 거의 건국 초기뿐이었다. 그 외에는 마활들의 도움으로 성검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었었다. 자신이 누구보다도 대륙통일에 가장 많은 힘을 썼다고 자부하며 살던 핀은 불쾌한 낯빛을 숨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본론만 원합니다만.]
[지네스테코(선황, 핀과 히엘의 부친)와 성검은 내게 그랬지. 통일 후 제국은 가이덴과 함께 영원한 치세를 할 것이라고.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네.]
가이덴을 섬기지 않는 핀은 드래곤의 말에 조소를 흘렸다.
[그대들은 평화라는 말의 무거움을 알고 있는가? 지난 세월 동안 숱한 전쟁터를 떠돌며 무고한 이들의 피를 흡수해왔던 성검에게 평화와 안식은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었어. 그래서 어떻게든 지켜내야 했지. 그 자신의 휴식을 위해서라도.]
결국은 가이덴 성력 증가를 위한 밑밥 아닌가?……, 그러한 생각을 하며 히엘은 피식거렸다. 아주 길고 지루한 설명이 이어질 거라 예상하며, 이왕이면 자리에 앉아서 느긋하고 편하게 듣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성검은 검은 머리 종(핀)에게 고마워했었네. 대륙 곳곳에서 통일을 방해하며 난동을 부렸던 셀바히트 인간들을 정리해주었으니 그들과 대립하는 성검으로서는 매우 편한 일이었을 걸세. 성검은 셀바히트의 마법사들이 단체로 걸던 결박마법 때문에 오랜 시간 성력증가를 제한당하고 있지 않았던가. 즉, 핀라이트는 참으로 기특한 지배자였단 말일세.]
성검을 압박하던 셀바히트 성력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인 형제들은 표정에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어. 적이 사라진 성검은 성물로써 더욱 확고한 의지를 가지게 되었고, 그럴수록 강한 힘을 필요로 했지. 더욱 확실한 셀바히트 ‘청소’가 필요했던 걸세. 그 제물로 선택된 것이 검은 머리 종의 둘째 아들이었지.]
겔사 균에 감염되어 죽은 전 황태자 이야기가 나오자, 형제들의 눈이 커졌다.
[하여, 이 몸은 성검에게 말했었지. 검은 머리 종에게 ‘청소’를 지시하라고. 하지만 성검은 코웃음을 치더군. 그 오만한 황제는 자신의 도움만을 당연시하며 받을지언정 지시는 깔끔히 무시할 거라면서 말이지. 일리가 있긴 했어. 제위 초기에 내게 보낼 공물 목록도 감히 제멋대로 바꾸어버린 황제가 바로 검은 머리 종, 그대 아니었던가? 여태 그대와 같은 황제는 없었지.]
온갖 전쟁에서 성검을 휘두르며 그 무기가 가진 성력을 자신의 힘처럼 여겨왔던 핀이었다. 핀에게 성검은 그저 조력자에 그칠 뿐이었다. 쉽게 생각하면 종자의 개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성검의 지시를 받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성검에게 선택되어 황제가 되는 것 역시 관례상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성검은 겔사 균을 이용하여 자네를 움직이려 했던 것일세. 그 성물은 알다시피 인간이 아닌 존재, 하여 인간의 마음을 공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용해먹을 수는 있었지. 자식이 죽는 것만큼 인간을 분노케 하는 게 또 어디 있을까? 그 분노는 분명 셀바히트 청소에 유용하게…….]
“그만!”
듣다 못한 핀은 그렇게 외쳐버렸다. 모든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성검은 단지 셀바히트 청소를 완벽하게 끝내기 위해 핀의 둘째 아들을 도구로 이용했던 것이다. 하리의 팔찌 속에 어째서 이중성력이 숨어있었는지 모든 이유가 명확히 밝혀져 버렸다.
핀은 탄식했다. 그래. 이왕이면 황족이 아닌 사람,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겔사균의 숙주가 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사건 후의 깔끔한 처리를 위해서는 그런 조건을 가진 자가 필요했고, 그 자가 바로 황제와 성검만 알고 있었던 가공간의 사람, 하리가 되었던 것이다.
드래곤은 핀의 반응에 상관없이 말을 이어갔다.
[허나 성검의 계획은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갔지…….]
전 황태자가 겔사에 걸려 죽고, 그 분노로 황제는 셀바히트 대청소를 감행하는 것과 함께 마활들까지 죽여 버린 것이다. 건국 이래 그런 황제는 없었다.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최고의 마법사들을 죽이는 것은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오만하고도 위험한 짓이었다. 그런 식으로 마활들을 죽여 언젠가 황제를 지킬 이 하나 없을 때는 황제와 한 배를 탄 성검은 어찌 지킬 것인가. 성검은 자신의 안전을 도모해야 했다. 그 도구가 바로 퀘세드락이었다.
[…… 그대들은 퀘세드락이 변방 소부족의 요청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인 줄 알겠지만, 틀렸네. 그 마계생물은 사실 검은 머리 종의 심장을 가져가기 위해 그곳에 간 존재였지. 성검으로서는 황제의 생명을 쥐고 있는 것만큼이나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장치가 없지 않은가.]
성검은 다음 대의 황제에서도 제 몸을 무사하게 지켜내야 했기에 그러한 극단의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핀은 계속 성검의 뜻을 거스르는 일만 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가이덴 대주교의 사형이었다. 가이덴의 성력으로 존재하며, 가이덴의 치세를 바랐기에 지난 세월동안 끊임없이 싸워왔던 성검의 인내심은 황제의 가이덴 탄압으로 그만 바닥을 치닫고 말았다.
[…… 가이덴의 수장마저 황제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어버렸네. 성검은 결국 지네스테코와 맺은 약속 중 최후의 부분을 실천하기로 한 것이지.]
[최후의 약속이라니, 그게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