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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정말 드래곤을 만나야 할 때일지도 몰랐다. 드래곤에게 그 어떤 귀한 공물을 바쳐서라도, 모든 것의 진실을 알고 어서 빨리 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제 아내의 시체를 보고도 묵묵히 돌아서버리는 황제에게, 시종이 물었다.
“폐하, 국장의 일정은 어찌……!”
그때 막 비보를 듣고 온 티에리아와 황제가 눈이 마주쳤다. 황제는 티에리아의 곁을 지나가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런 나약한 여자에게 국장은 사치지.”
티에리아는 멀어져가는 황제의 모습을 보다가 눈물을 흘리며 어미에게로 돌아섰다. 로가드리아 화원에서 비통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머니……, 어머니!”
***
엔과 소년 핀이 사라진 후, 하리는 어떤 기억을 떠올려냈다. 언젠가 엔이 하리에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나는 핀이 다니던 그 학교의 청소부였지, 재미있는 거 하나 알려줄까? 녀석은 나를 짝사랑했지 뭐야……. 안색이 어두워진 하리가 넋 나간 사람처럼 히엘에게 중얼거렸다.
“광부 토슈의 아들 레인, 그리고 레인이 짝사랑했던 청소부, 그 모습이 방금 나타났던 거로군요. 그러니까 그들의 모습은 황제 폐하와 엔……, 그렇다면 혹시 이곳은 폐하께서 다니셨던 평민학교 근방인가요? 우리는 그런 곳에 도망을 온 건가요?”
히엘은 그녀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봐, 광녀. 광부 토슈는 누구고 그 아들 레인은 누구야? 폐하께서 평민학교를 다니셨다니? 여긴 폐공간이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히엘은 핀이 지난 시절 마력성장을 받은 후 북동쪽 어느 대공국으로 유학을 간 적은 있어도 평민학교에 다닌 적은 없다고 알고 있었다. 아니, 평민학교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그러나 하리는 여태까지 히엘 자신이 믿어왔던 황제의 과거를 완전히 부인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폐하께서는 분명 탄광촌에 있는 학교에서 광부 토슈의 아들 레인이라는 위장신분으로 지내신 적이 있다고 했어요. 엔이 그랬단 말이에요.”
“자꾸 엔이라고 하는데, 그 여자는 가공간에 있었다는 여자 말이지?”
“네. 폐하께서는 엔을 짝사랑하셨고, 툭하면 수업시간을 빼먹으시고 개암나무 밑에서 낮잠을 주무셨던 그런 불성실한 학생이셨다고 했어요. 모두 엔이 한 말이에요.”
“그거, 엔의 망상 아니야?”
헛소리 취급하는 히엘에게 하리는 발끈하여 외쳤다.
“너무하셔요! 망상이라니요! 제가 증거를 말씀드려 봐요? 어느 날은 제가 엔과 짝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폐하께서 얼굴을 붉히신 적도 있었다고요! 만약 폐하께서 엔과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어요? 그리고 폐하께서는 늘 편한 말을 쓰라며 우리 평민들의 말투를 자연스럽게 따라하셨다고요!”
“그건 나와도 그런데? 폐하께서는 원래…….”
히엘은 갑자기 스치는 기억에 입을 다물었다. 히엘이 알기로 핀은 어린 시절 가까운 대공국에 몇 년간 다른 귀족의 이름을 빌어 유학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지금에야 생각해보자면 그것은 황태자가 되기 전 잠시 누렸을 자유 시간일 터였다. 사담을 나눌 때 평민들이나 사용하는 가벼운 말투를 사용하는 것 또한 유학 시기에 익힌 거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히엘 자신도 대륙 곳곳을 돌며 마법 수련을 하느라 지금처럼 말투가 거칠어졌기에 핀에게서 조금도 어색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핀이 유학을 다녀온 뒤로 더욱 싸늘한 성격이 되었고, 그렇게나 따르던 선황에게도 경계어린 태도를 보이는 등의 변화도 단지 마력성장의 후유증으로만 탓했기에 그저 그렇게 넘어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방금 하리의 설명을 듣고 생각해보니, 어쩌면 평민학교 체험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스치는 것이다.
히엘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난날을 회상하자, 하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정말 모르세요? 폐하의 형님 되시잖아요.”
동생의 일에 어찌 그렇게 둔할 수가 있느냐고 꾸짖는 듯했다. 히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광녀야말로 녀석의 누나도 아니면서 어떻게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지 궁금한데.”
“그러니까 엔이라는 사람이 저한테 전부 가르쳐줬었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이거 참…….”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마계로 가는 이동진은 서서히 발동 되고 있었다. 무슨 연유로 황제의 어린 시절 모습과 청소부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히엘과 하리는 그곳에 계속 머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마계에 위치한 히엘의 마법 수련장은 쥐들이 난동을 부릴 만큼 지저분했다. 각종 실험이 이루어졌었고, 그때 발생한 폐기물들이 여기저기 널려져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히엘 자신이 신분을 숨기고서 수많은 여자들과 질펀하게 놀고 싶을 때 급한 대로 이용하던 은밀한 장소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거의 방치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싸늘하고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히엘은 도착하자마자 발에 걸리는 물건들을 툭툭 치우며 정화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쾌쾌하던 공기가 상쾌한 공기로 바뀌었고, 온도도 적당히 따뜻해졌다. 히엘은 하리로부터 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다시 듣고자 했다.
“이봐, 하리. 내가 다시 묻고 싶은 건 말이야.”
그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뒤로 돌리는 순간, 갑자기 바닥에 마법 이동진이 생성되었다. 하리를 제외하고 오직 히엘의 주변에만 생기는 이동진이었다. 히엘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 이건 대체 뭐야?”
마활의 탑씩이나 되는 자를 누군가가 강제이동 시킨다, 그것은 드래곤만큼 강한 마력을 가진 이들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젠장, 왜 하필 지금이냐고!”
히엘은 그 이동진을 없애려했지만 소용없었다. 하리는 사라지는 히엘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안전한 곳에 가자면서 온갖 마법 실험 도구들이 널브러진 장소에 처박아놓고는 말도 없이 사라지는 그에게 황당함이 일었다.
‘뭐지! 어딜 가는 거야! 왜 나를 이런 쓰레기장에 두고서……!’
이동진 안에서 히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어디가시는 거예요! 장난치시면 안 돼요!…….”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커다란 책상 위에는 빈 스크롤 더미들이 쌓여있었고, 비커, 샬레, 곰팡이가 낀 유리관, 말라 썩어버린 각종 마법 재료들이 가득했으며, 기괴한 색깔의 동물 털들이 그녀의 당황스러운 한숨에 어지러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곳에 또 갇혀야 하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저쪽에 있는 어떤 기묘한 물건들이 그녀에게 다른 종류의 무서움을 안겨주기까지 했다.
‘뭐, 뭐지! 이 수상한 물건들은? 어머나, 망측해!’
막 이곳에 도착할 때부터 시야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천장에 떠다니는 자그마한 마법 광구들이 온통 붉은 색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새빨간 조명 아래 새빨간 양초, 채찍, 밧줄, 기타 흉측하게 생긴 ‘성(sex)’기구들이 벽에 걸려있거나 열린 서랍 사이로 위풍당당하게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리는 눈을 가렸다가 다시 슬그머니 그 물건들을 살폈다. 그녀에게 지금만큼 혼란스러운 순간은 없었다. 이곳은 분명 그 마법사의 수련장이라 하지 않았던가? 마법 수련 말고 대체 무슨 ‘수련’을 더 한 거야? 하리는 자신이 아무래도 변태 마법사의 매음굴에 팔려온 것 같다며 이마를 짚었다.
“뭐, 뭐야…… 변태 맞잖아, 진짜!”
비틀거리던 그녀가 갑자기 저 구석에 있는 마법영상구를 보았다. 그녀는 그것을 주우러 다가갔다.
‘히엘 님께서는 날 여기 내버려두실 분이 절대 아니야. 저거나 보고 있자…….’
그리고 마법영상구를 켠 순간, 그녀는 얼어버리고 말았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영상, 그것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민망한 장면들이 연속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
히엘은 검은 산으로 강제이동 되었다. 바람은 마치 드래곤의 성난 날갯짓처럼 거셌고, 그 탓에 바닥에 떨어져있던 온갖 새카만 잎사귀들이 하늘에서 내리는 진눈깨비라도 된 듯 허공을 어지럽혀 기괴한 풍광을 만들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눈을 감고 있던 히엘이 실눈을 뜨며 주변을 보았다. 자신은 지금 드래곤의 오른쪽 날개 위에 서있었고, 저편 드래곤의 왼쪽 날개에는 핀이 서있었다. 지상에 황제의 호위 병사들이 몇 있는 것으로 보아, 핀은 아무래도 그들과 함께 강제이동 된 듯했다. 형제는 서로를 한참 말없이 보다가, 드래곤의 머리를 향해 똑같이 불쾌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드래곤은 무심한 마법어로 중얼거렸다.
[아, 난 그저 자리제공자일뿐이다.]
그 거대한 생물은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어째서 황제와 황형을 불러내지 않으면 안 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히엘은 마구 휘날리는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이 귀찮다는 듯, 필기르의 깃털을 비녀삼아 대충 정리했다. 애당초 황제와 직속 통신을 위해 만들어진 물건을 비녀로 이용해버리는 그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결례였다. 호위병사들은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물었다. 하지만 핀은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참고 있었던 인내심이 바닥나버린 것이었다. 그는 축소된 성검을 꺼내어 히엘을 향해 던졌다.
“폐하, 지금 무슨……!”
히엘은 말을 하다 멈추었다. 날아오던 성검이 갑자기 움직임을 정지했다. 그간 침묵을 고수해왔던 성검은 마치 의지를 가진 존재임을 이제와 새삼스레 증명이라도 하듯, 형제들의 가운데에 떠있었다. 그리고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그 자신의 성력으로 움직여 주변에 완전한 고요를 드리웠다. 검신이 빙글빙글 돌다가 그 날카로운 끝이 핀을 향했다. 차오르는 불길함에 입술을 짓씹는 핀이었다. 언제부턴가 성검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불가능해졌는데, 지금 이렇게 성검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히엘의 음모라면……? 핀은 히엘을 노려보며 쓰게 웃었다.
“이러기 위해서 몸을 숨긴 거야?”
하지만 히엘은 대답할 수 없었다. 황제만 들을 수 있다는 성검어가 자신에게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