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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41화 (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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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는 새끼손톱의 1/5만한 아주 작은 연한 점이었고, 하리는 분노와 함께 문을 열고 말았다. 히엘은 픽 웃으며 그녀를 보다가, 문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원피스 가슴 섶 단추들이 어긋난 채로 잠겨있었다. 괴한이 들이닥칠 때 겁을 먹은 채로 부랴부랴 옷을 챙겨입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바느질 하는 여자가 맞는지, 어떻게 이렇게 칠칠맞을 수가 있는지, 하는 눈빛도 속일 수가 없었다. 히엘이 그렇게 가슴만 빤히 바라보자 하리는 씩씩거리며 외쳤다.

“변태!”

하지만 성실하게 탕아로 살아온 히엘에게는 눈곱만큼도 먹히지 않을 욕이었다.

“변태라, 태어나서 23423번째는 듣는 말 같군. 가자.”

그는 하리의 손목을 잡고서 밖으로 나갔다. 하리가 뭐라고 구시렁거렸지만, 히엘은 지금 그런 말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약간 겁을 먹었다고나 할까. 방금 까지 좀비나 다름없는 세뇌된 괴한에게 단검으로 위협을 당했었다. 검술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실전이라면 무조건 성가셨다. 쉴 새 없이 괴한과 수다를 떨며 대했지만, 사실은 두려웠던 것이다. 겨우 상황이 안정되자 뒤늦게야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괴한이 연속으로 들이닥친다면, 도망 다니며 중급 속박 마법을 시전하기는커녕 폭주해서 파괴마법으로 폐공간을 일그러뜨릴지도 모를 것이다.

“어디를 가는 거예요!”

“내 별장.”

히엘은 마계에 있는 자신의 마법 수련장으로 가기 위해 공간 이동진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최후의 안전한 곳이라 여긴 곳이었고 사르제스 본토가 아닌 마계에 있는 곳이라, 순간이동은 불가능했다. 적어도 십분 이상 공들여야할 이동 작업이었다. 히엘은 집안 곳곳에 마법진 구성매개체가 될 만한 가루, 소금을 모두 퍼와 하리가 서있는 주변으로 모두 뿌리기 시작했다.

“여기 서서 가만히 있어.”

“저, 아까 그 사람은 누구죠?”

“응. 악성 빈혈 환자인가 봐. 피 타령을 그렇게 해대더라.”

“아까, 히엘 님께서 과일 사러 가셨을 때, 본 게 있는데요.”

히엘은 마력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왜 이제 말해? 뭘 봤는데?”

하리는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또박또박, 느리게 말했다.

“아까는 목욕 중이라 옷을 다 챙겨 입고 말씀드리려 했죠. 저기, 그러니까, 여기 유령 도시 같아요. 씻고 있는데 창밖으로 마녀가, 빗자루를 들고, 지나가다, 그 모습이 흐려지다가, 너무너무 무서워서, 근데 그렇게 그 마녀가 갑자기 어디론가 빨리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히엘은 하리가 여전히 미쳐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마녀가 대놓고 ‘나 마녀요’ 하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진 않을 것이다. 거기다 빗자루를 들고 있다고? 히엘은 다시 이동진 구성하기에 집중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하리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쟤, 다시 광녀 됐어’ 라고 중얼거렸다. 은근 기분이 나빠진 하리가 자신이 본 것을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려 했다.

“그러니까, 왜 마녀라고 말씀드렸느냐 하면요. 사람은 보통 그렇게 반투명하게 보이지 않고, 빗자루도 들고 있지도 않고, 어, 그러니까…….”

“됐어. 조용히 해. 나 집중해야 해.”

“진짜 마녀 맞는데…….”

“광녀.”

“네…….”

하리는 자신의 말을 무시해버리는 히엘에게서 서운함을 느꼈다. 이러한 기분이 조금 낯설기도 했다. 그가 언제나 당황하지 않고 느긋하게 그녀를 보살피고 지켜주는 모습만 보여 왔기에, 지금 이렇게 원래의 까칠함을 드러내는 것에 그녀는 적응이 어려웠던 것이다. 흩뿌려진 소금 위에서 붉은 빛이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겹쳐지기 시작했다. 이동진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 한숨을 내쉰 뒤 하리의 옆에 섰다.

“음, 내 별장이 마계에 있거든. 마계라는 곳, 가본 적 없지?”

“네.”

“생긴 것 보다 별로 무서운 곳 아니니까 겁먹지 말고, 그리고…….”

뭔가를 더 설명하려던 히엘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그는 겨우 완성시킨 이동진의 발동을 멈추고서 유리창 밖을 보았다.

‘저건!’

결국 그의 눈에도 하리가 말한 그 ‘마녀’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갈색 머리, 검은 원피스, 하얀 앞치마 차림의 그 ‘마녀’는 빗자루를 들고 분주히 바닥을 쓸고 있었다. 히엘의 시선을 쫓은 하리가 손가락으로 ‘마녀’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 사람! 저 사람이라고요! 저 사람이 내가 본……!”

“마녀 아냐. 빗자루 들었다고 마녀라고 할 수는 없다고. 이 맹한 아가씨야.”

“그럼 저 사람은 대체 뭘까요?”

분주하게 움직이던 여인은 갑자기 뭔가를 발견한 듯 저 먼 곳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하리는 여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여인은 누군가와 닮은, 누군가와 굉장히 닮은 체구에 익숙한 뒷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바라보는 저 먼 곳에서, 한 남자의 모습도 같이 보였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묶은 남자, 남자라고 하기엔 조금 풋풋한 소년, 그 소년은…….

히엘과 하리는 동시에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엔!”

“핀?”

그들의 모습은 서서히 사라졌다. 그 모습은 과거의 잔상이 마법의 오류로 나오는 것이었다. 학교의 청소부였던 엔, 그리고 그녀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 핀의 모습이었다.

***

그 시각 핀은 꿈속에서 어린 날의 어느 일상과 마주하고 있었다. 사르제스의 피를 죽여야한다고 세뇌되어 들러붙는 괴한들을 해치우다보니 졸음이 오던 오후였다. 그래서 수업을 빼먹고 개암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잤다. 그러다가 평소와 다른, 뒤통수를 받치는 묵직한 느낌에 눈을 떴다. 누군가가 베개랍시고 책을 받쳐준 것이었다. 책은 평민학교의 도서관에 있기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기초마력이론서 두 권이었다. 핀은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엔 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는 책을 들고 일어났다. 이 시간이면 엔은 학교가 아닌 학교 앞을 쓸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는 곧바로 그 장소로 갔다. 그녀가 비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 왔다. 핀은 그녀에게 다가가 책을 건넸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왜? 더 베고 자지.”

핀은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이 커졌다. 엔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며, 그녀가 ‘베다’라는 말을 다른 의미로 하고 있었다.

“더 베라니까. 더 베. 더 베라고.”

핀은 소스라치게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헉……!”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하리의 집을 수색하러 갔다가 이층 다락방에서 깜빡 잠이 들었고, 엔이 나오는 ‘악몽’을 꿔버렸다. 일국의 황제라는 자가 마법보호막 하나 없이 사가의 천 더미에 묻혀 자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는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형편없어. 반역자의 집에서 이딴 낮잠이나 자니 그런 꿈이나 꾸는 거라고!’

그는 이를 악 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황궁으로 다시 돌아갈 때였다. 그때 갑자기 성검이 검기를 새까맣게 뿜어내며 우웅-하고 울다가 멈춰버렸다. 마치 할 말이 있는 것 같다며 사람을 잡아놓고서는 도로 아니라고 하는 놓아주는 사람과 같은 싱거운 느낌이었다.

“…….”

핀은 그대로 황궁으로 이동했다.

마활궁을 조사해보아도 황제를 만족시키는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거라고는 제국 곳곳에 세우기로 했던 방어의 탑 재료 스크롤들뿐이었다. 아무래도 마활들은 사라지기 직전까지도 자신들의 업무에 성실히 임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히엘과 그들이 사라진지 어느덧 이레, 핀은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차라리 히엘의 연락을 포기하고 드래곤에게 가서 조사를 해달라고 공물을 바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시종 하나가 새파래진 얼굴로 들어왔다. 핀은 짜증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시종이 저어하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 황후폐하께서…….”

핀의 눈이 커졌다. 며칠 전 그녀에게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싸늘하게 대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불현 듯 떠올랐다.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쳤다.

“리이라에게 무슨 일인가.”

끝내 말하기를 주저하는 시종의 모습에, 핀은 직접 황후궁으로 걸음 했다. 시종을 따라 그곳의 로가드리아 화원으로 가자, 그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만삭의 황후는 옆으로 누운 채로 숨져있었다. 자신이 가진 미미한 마력을 이용해 목을 졸라 질식사한 것이었다.

유서에는 대주교에게 사형을 내린 황제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자살의 이유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이미 대주교가 사형당한 것은 수개월이나 흘렀고, 그 슬픔보다 그녀를 더 서글프게 한 것은 불안증이었다.

그녀의 임신 전후에, 황궁은 늘 피바람이 가득했다. 애정 없는 황제는 단 한 번도 그녀의 불안을 달래준 적이 없었다. 그러한 배려는커녕 황손을 만들기 위한 의무적인 잠자리에서도 이중성력사건의 책임을 물으며 그녀에게 모진 말만 던질 뿐이었다. 가이덴 대주교의 딸로서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자란 황후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들이었다. 황후는 생각했다. 비 한 명 들이지 않던 황제의 성격상, 자신이 죽어버리면 더 이상의 황손은 없을 것이었다, 남겨진 황태자 티에리아만이 사르제스의 앞날을 짊어질 것이다, 그런 예상 중, 만약 요즘 황궁을 휩쓸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적이 그 황태자마저 죽여 버린다면? 그 뒤 황제까지 죽여 버린다면? 황후는 자신 역시 안전히 살아남지 못할 거라 예상했다. 뱃속의 아이를 낳고 태어나기보다는 차라리 그 모든 파란이 일어나기 전에 죽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짧은 유서였지만 어느 정도 그녀의 속내가 보인 핀은 종이를 구겨버렸다. 그가 지금 느끼는 슬픔은 반려와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동시에 잃어버린 슬픔은 아니었다. 황족의 일원인 황후마저도 황제의 권력에 대한 위기를 느낀다는 그 자체, 자신의 자리에 대한 불안감에서 오는 슬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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