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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39화 (3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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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보석 홀에 검무단을 불렀습니다. 최근 아이얄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재주꾼들이라 하더군요. 어서 보러 가요.”

리이라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 했다. 제 아들의 의젓함이 어딘가 어색해보였다. 흡사 예전, 혼인식 이후 보여준 황제의 어색함과 닮아있었다. 그때도 황제는 거짓웃음을 보이며 좋은 것을 보러가자고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했었다. 신부를 움츠러들게 한 그 어설픈 가식이 지금 황태자가 보이는 미소와 같았다. 언제나 확신이 없어서 상대를 대할 때 무리하여 거짓을 보이는 것, 마력성장을 겪은 이들의 공통점이란 이러한 것이리라. 그녀는 쓰게 웃었다.

“티에리아.”

태자라는 호칭보다 이름을 불리는 것이 좋은 티에리아는 빙그레 웃어보였다. 리이라는 두 눈에 아들의 웃음을 생생히 담으며 손을 올려 티에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훌쩍 커버린 아들, 감정과 성격 또한 그렇게 급하게 커버렸을 것이다. 그녀가 알기로 마력성장으로 형성되는 감정 중 가장 도드라지게 강한 것이 두려움, 공포, 질투, 원망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아들이 그 감정에 얽매여 제 아버지처럼 팍팍한 삶을 살지 않기를, 그녀는 진심으로 바랐다. 비록 황태자로서 황궁이라는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할 운명을 지고 태어났지만, 적어도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큼은 지금과 같은 미소를 건넬 수 있도록, 그렇게.

“검무단이라니. 이 뱃속에 있는 네 아우가 놀라겠구나. 어미는 좀 쉴 테니 가보아라.”

“예.”

“티에리아.”

“예, 어머니.”

“…… 미안하구나.”

티에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머니. 다음부터는 제가 더 신경 써서 아우와 함께 볼 수 있는 걸 준비하겠습니다.”

티에리아는 인사를 한 뒤 머뭇거리다가 리이라의 배를 잠시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화원을 나섰다. 리이라는 아들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

황제와 마활의 통신수단인 필기르의 깃털이 불통이 되었다. 핀이 소집할 수 있는 마활이라고는 현재 히엘 뿐이었고, 히엘에게서 온 연락에 그는 매우 화가 나 있었다.

[괜스레 마활들에게 화풀이하지 마. 그들은 내 명령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넌 믿지 않을 거고, 듣지도 않을 테니 단 하나만 부탁하지……, 일단은 기다려라. 그 성격 좀 죽여 두고 기다리라고. 내가 다시 궁으로 돌아갈 때 까지, 네가 그 누구도 해하지 않길 바라마.]

핀은 성검을 돌바닥에 깨부술 듯 던져버렸다.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고 듣지 않을 거라고? 단지 하루 안에 범인을 잡을 자신이 없어서 둘러대는 핑계가 아닌가? 돌아오지 않은 마활들을 잡아내는 방법이야 황제인 자신에겐 얼마든지 많이 있었다. 마활 전원을 황제의 반역자로 몰아 맹약 주관자인 드래곤에게 그들을 죽여 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마활들의 가족들을 인질삼아 마활들을 겁박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성향이었고, 그렇게 살아왔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히엘의 말을 믿고 싶었다. 믿어야만 했다. 가타부타하여도 기실 자신 다음으로 제국을 걱정하며 황제를 보좌했던 자는 세상에 단 하나, 자신의 형뿐이었기 때문이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젠장. 하지만 직접 이야기해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핀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가져온 불안에 기분이 요동치고 있었다. 정녕 히엘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그러다 뒤통수를 맞게 된다면? 온 몸으로 맞서며 일궈놓은 대제국을 궁에서 ‘마법놀이’만 해온 히엘에게 고스란히 넘겨줘버리게 된다면? 원래 히엘이 가진 성향으로 볼 때 이렇게 얼굴을 보이지 않고 숨어서 필기르의 깃털 따위로 연락을 하는 얍삽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그 자신의 조직인 마활들을 두둔하는 것은 마치 마활이 황제의 소유가 아닌 자신의 소유라 여기는 듯했다. 반역의 소지를 가진 하리와 한 통속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의심은 끝없이 핀의 마음을 잠식해갔다.

핀은 황궁직속 수사관들과 블랙유니콘 마병사들에게 마활궁의 수색을 샅샅이 하라 일렀다. 많은 대신들이 마활 탑의 위신을 생각해야 한다고 간곡히 말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 뒤, 하리 에센의 집을 직접 수색하러 아이얄 서쪽 지구로 향했다. 모두가 알아서는 안 되는 그녀, 자기만 알고 있어야 하는 그녀의 집을 수색하는 것에 타인의 도움은 필요가 없었다.

***

드래곤과의 만남 뒤, 히엘은 이동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생각에 골몰했다.

성검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선황의 장남이자 어마어마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자신을 황제에 적합하지 않다고 내쳤던 존재였다. 때문에 자신은 십 년 동안 지겹고도 팍팍한 마력 수행을 한다고 전 대륙을 돌며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야 했다. 그래서 한때는 성검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성검이 황제로 선택한 인물을 이제와 폐위시키려 하고, 그 자식들마저 하나씩 죽이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황제에게 무슨 악감정을 가진 걸까. 퀘세드락의 공격 역시 황제를 내치기 위한 물밑 작업이라 생각해야 하는가? 애당초 성검이 황제를 내치려했다면 차라리 그 살카 전에서 황제의 심장을 부수어버리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황제의 아들들부터 없애는 것은, 역시 ‘숨은 태양’을 유일한 권력자로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나?

‘이제 그딴 귀찮은 거, 하라고 해도 안 한다고!’

심란함에 엽궐련이 몇 개씩이나 태워졌다. 황제가 되어야 한다, 라. 궁으로 돌아가서 동생에게 이제 자신이 황제가 될 테니, 그래서 그동안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옥좌에서 내려오라 말하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자신은 분명 범인을 찾아온다고 큰 소리를 쳐놓고 궁을 떠났었다. 그런데 그 범인, 그 사건을 일으킨 계기의 한 중간에 자신이 있었다.

히엘은 하리의 팔찌를 짜증스럽게 바라보며, 그녀에게 온기마법을 둘러주었다. 그리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도망 다녀야 할 것 같다.”

그의 얼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성가심이 잔뜩 배어있었다.

***

그들의 은신처는 사르제스 탄광촌 머슈타트로 정해졌다.

건물 곳곳에서 흑괴석을 정제하느라 검은 연기가 매캐하게 솟아나오고 있었다. 그 탓에 머슈타트의 곳곳 시설들은 새까만 검댕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전원 정복지의 노예들로 다양한 피부색에 다양한 언어를 구사했다. 지저분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이 노예들은, 제국 최고의 강철석인 흑괴석을 파내거나, 정제하거나, 연성해서 제국에 바치며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갔다. 노예라는 신분 때문에 노동에 대한 보상은 당연히 없었다. 몇 번이나 반란이 일어나곤 했지만, 그때마다 죽음의 탄광에 들어가 전원 소멸형에 처해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전쟁으로 노예들은 끊임없이 유입되었고, 역사가들은 이곳 사람들의 생명이 짐승 발에 밟히는 들풀보다 가치가 없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곳을 벗어날 방법은 단 하나, 뛰어난 마력을 가지고 제국을 위해 일할 인물로 뽑히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잘 살아가는 유일한 길이자, 성공의 길이었다.

대여섯 살 쯤 된 한 남자 아이가 흑괴석보다 조금 질이 낮은 회괴석을 가지고 마력정제를 하기 위해 집중을 하고 있었다. 정제구성식도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였지만 꼬마는 진지했다. 이윽고 울퉁불퉁한 회괴석이 순식간에 매끄럽고 빛나는 돌로 변했다. 바로 장신구에 쓸 수 있을 만큼 상급의 정제실력이었다. 꼬마의 피부색은 새카만 편이었다. 서남쪽 출신이리라. 한참 전부터 꼬마를 지켜보고 있던 히엘은 다가가서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서남어로 말했다.

[마력, 얼마나 쓸 수 있니? 흑괴석도 정제해봤어?]

꼬마는 히엘의 하얀 피부색, 갈색 머리카락, 유복해 보이는 옷차림을 보고 경계를 하며 정제된 회괴석을 히엘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히엘의 왼쪽 뺨에 생채기가 났다.

“윽! 요거, 요거, 까칠하고 마력도 센 게 매력적인데?”

히엘은 꼬마가 알아들을 수 없는 사르제스어로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꼬마의 몸에 위치감지마법을 걸었다. 언젠가 모든 사건이 정리 될 때 황궁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잘 키우면 훌륭한 마활이 될 것이었다. 머슈타트의 탄광에서 썩는 것 보다는 나은 미래를 터주고 싶었다. 위치감지마법에 걸린 꼬마는 뭔가가 자신의 몸에 들어온 것 같은 불쾌한 느낌에 히엘을 노려보았다. 히엘은 꼬마에게 은화 몇 개를 쥐어주며 돌아섰다.

[나중에 이거보다 돈 더 많이 벌고 싶으면, 형이 하자는 대로 하기다. 알겠냐? 그럼 수고해.]

꼬마는 은화를 쥐고 히엘의 뒷모습을 보았다.

히엘이 향하는 곳은, 죽음의 탄광이라 불리며 모두가 꺼리는 한 폐공간이었다.

[거기 가면 죽을 지도 모르는데, 히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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