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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가능할 리 없는 셰일루티스를 뒤로 하고 걸음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불현듯 히엘의 머리에 번쩍이는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이중성력과 관련 없어 보이는 사건, 보잘 것 없는 변방을 쓸다 일어난 사건, 셰일루티스와 같은 마계생물 퀘세드락의 등장. 그 사건 때문에 황제의 심장은 성검의 보호 아래 다른 차원에 ‘무사히’ 있을 수 있었다.
성검은 건국 초기부터 내려온 성물(聖物)이었다. 가이덴의 성검으로 탄생한 그것은 제국 통일을 원하는 사르제스 1대 황제와 뜻을 모아 역대 황제들을 돕고 그들을 지켜온 존재였다. 그러나 ‘지킨다’는 관념을 다른 관점으로 보면 어떠한가. 지금 성검은 황제의 심장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유리한 위치였다. 만약 황제가 성검에 거역을 한다면 심장을 영원히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간 황제와 한 몸과도 같은 존재라 자연스럽게 외면되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문제였다. 명백히, 지금 황제의 목숨을 쥐고 있는 자는 다른 이가 아닌 성검, 바로 사람이 아닌 의지를 가진 존재였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성검과 대화가 가능한 사람은 오직 황제뿐이었으므로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를 거라 판단, 히엘은 곧바로 황제에게 달려갔다.
핀은 여전히 히엘의 속박마법에 걸려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하리 또한 여전히 핑리스에 빠져있었다. 저벅 저벅 걸어오는 히엘을 보고서 핀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풀어!”
몇 시간 넘게 벌 아닌 벌을 받고 있느라, 엄청 화가 난 모습이었다. 하지만 히엘은 하리를 죽이려 하는 핀을 바로 풀어줄 수는 없었다. 그는 핀의 앞에 다가가 털썩 앉았다.
“후, 못 풀어. 나 너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풀라고 했어.”
“너, 성검이랑…….”
그러나 히엘이 나머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핀이 조금 낮은 목소리로, 올해 들어 최고의 짜증을 실어 외쳤다.
외쳐야만 했다.
“볼일 봐야 한다고!”
***
한참 전부터 소변을 참고 있던 핀이었다. 히엘이 그 말에 그간의 긴장이 갑자기 풀려 히죽 웃고 말았다.
“풉,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기다리긴 뭘 기다려, 그냥 지금 풀라니까!”
히엘은 핀의 말을 무시하고 재빠르게 어디론가 갔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른 몸놀림이었다. 핀은 아슬아슬한 상태를 겨우 참아내며 식은땀을 흘렸다. 제 형이 어디를 가는 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속박을 풀어주고 가도 되는 것 아닌가? 하리를 죽이는 것이 그렇게나 싫은가? 한때 둘이 가공간에서 잘 놀다가 정이라도 든 건가? 위험할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그러니 황제가 못 된 거야! 사리분별 없이 구니깐!’
핀은 이를 갈며 기다렸고, 히엘은 금세 다시 돌아왔다. 그는 꿍꿍이가 가득한 얼굴로 배를 바닥에 깔고 두 손을 턱에 괸 채 핀과 마주보며 엎드렸다.
형제의 얼굴이 매우 가까이 마주하고 있었다.
“마법, 풀라고 했어. 히엘.”
“흐음, 기다려보라니까.”
“대체 무슨 꿍꿍이야!”
이런 것에 익숙지 않은 핀은 변의가 아닌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일단은 어색하고, 민망하며, 어릴 때도 하지 않던 행동이라 낯설었다. 눈앞의 형은 능글거리는 웃음을 짓는다. 속박이나 풀어줄 것이지, 이건 뭐하자는 것인지? 바닥에 닿을락 말락 히엘의 목걸이에 있는 자수정이 얄밉게 진자운동을 했다.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핀이었다. 곧 방광의 긴장이 다 녹아들어간 한없이 작은 목소리가 나왔다.
“풀라고.”
“정말 ‘쉬야’가 마려우십니까?”
“…….”
핀은 자신이 속박마법에 묶여있는 상태만 아니면, 형이고 뭐고 패버릴 작정이었다.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히엘은 더욱 제 동생의 화를 자극했다.
“도대체 폐하께서 에센 양을 죽이시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바느질을, 퀼트를 배우길 원하셔서 데려온 여인을, 팔찌 하나로 반역자 취급하시는 게 타당하다 생각하십니까? 모든 사건은 철저히 조사를 거쳐 확실한 물증을 확보해야만…….”
“좀 닥치고 풀라고.”
“그러니까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그러면 볼일을 보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이 제국의 오줌싸개가 되어서야 곤란하시잖습니까?”
“진짜 죽고 싶은 가보지!”
“어차피 하루 안에 범인을 못 잡으면 저는 죽습니다. 폐하께서 그렇게 얼굴을 붉히시니 마치 제 방광이 다 터질 것 같은 기분입니다. 어서 약속해주십시오. 폐하의 바. 느. 질. 선. 생. 을 죽이지 않겠다, 저에게 맹세를 간청하는 바입니다.”
저 미친 형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제국에 위해를 가했을지도 모르는 여자를 죽이지 말라?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황제를 위해 충성의 맹약을 맺은 마활이 저런 말을 하고도 어찌 무사히 살아있을 수 있는지? 지금 히엘의 행동은 일종의 반역 행위와도 맞먹는다고 간주할 수 있었다. 핀은 눈살을 찌푸리며 웃었다. 자존심보다 변의가 중요한가? 천만에.
“속박을 풀기 싫으면 관 둬. 에센을 죽이고, 형도 죽일 거야. 그게 내 대답이야.”
“오호라. 그럼 이 자리에서 그냥 ‘쉬야’를 보시고 젖은 바지를 입고 계시겠다는 겁니까? 이거, 이거, 자그마치 무려 십 년 전에 보았던 귀여운 광경을 또 보게 생겼으니.”
히엘의 목 아래에서 진자운동을 하던 자수정이 멈췄다. 자수정은 갑자기 눈부신 진홍빛을 강하게 뿜어냈다. 동시에 히엘도 자리에서 일어나 어느 구석에 있는 마법영상구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목걸이를 빼서 그 자수정을 마법영상구의 뒷구멍에다 박았다.
핀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히엘이 잠시 나갔다 다시 들어온 후에 한 괴상한 행동들과 존대어의 꿍꿍이를 모두 알아차리고 말았다. 왜 눈을 맞추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엎드렸는지, 왜 꼬박 존대를 사용했는지.
마법영상구에서는, 방금 전의 대화와 함께 핀의 얼굴 정면이 나왔다. 흔들리던 자수정의 움직임에 맞춰.
핀을 자극시키는 단어들이 흘러나온다. 마렵다, 바느질을 배우고 싶어 데려온 여인, 변을 보게 해주겠다, 제국의 오줌싸개, 방광이 터질 것 같은 기분, 바느질 선생을 죽이지 않겠다, 약속, 맹세, 젖은 바지. 그리고 핀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십 년 전에 본 광경을 또 보게 생겼다는 히엘의 말이었다. 십 년 전 히엘은 열다섯 소년이었고, 핀은 일곱 살 꼬마였다. 마력 성장을 한 것에 콤플렉스가 있는 핀은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작작해!”
“글쎄? 네 이런 반응, 나한텐 최고의 먹이라고. 얼마나 그리웠는지 알아?”
히엘은 이 상황을 어릿광대 뺨치는 익살로 즐기고 있었다. 그의 양 손바닥 사이에서 마법 영상구가 광대 손에 놀아나는 공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핀을 항복시킬 결정적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아무튼, 나 죽기 전에 이거 제국민들에게 모조리 풀고 죽으려고.”
히엘은 곧바로 마법영상구를 그 자리에서 어디론가 순간 이동시켰다. 핀은 이제 자존심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했다. 변의보다 중요한 자존심. 그러나 이 순간, 변의를 무시해버리면 세간에 알려질 자존심마저 깎이게 될 것이다. 적어도 핀에게는 그랬다. 사르제스 제국 7대 황제가 바느질 선생을 데려왔으며, 거기다 오줌싸개에, 마력 성장을 받은 어린 자란 것이 밝혀지면 전 대륙을 정복했던 패기는 폭소에 죄다 가려질 것이었다. 사람들이란 원래 구구절절한 정복역사보다 정복한 자의 은밀한 사생활에 더 관심이 많은 법이었다.
“그러니 얼른 약속해라. 죽이지 않겠다고.”
“에센이 범인이란 게 확실시되면, 히엘도 죽을 거야.”
“그건 상관없어. 지금 당장 그녈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내가 확실한 범인을 잡기 전까진.”
“…… 좋아.”
“그래. 착하지.”
그제야 핀을 옭아매던 속박이 풀렸다. 핀은 죽일 듯 히엘을 노려보며 가까운 ‘목적지’로 혼신의 힘을 다해 걸어갔다. 겨우 소변을 참아내던 사람치고는 그 움직임이 생각보다 차분하고 품위 있어 히엘은 심술이 다 났다. 그러나 핀은 속으로 엄청난 욕을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히엘…….’
바지를 내리는 순간마저 아프도록 힘이 든다. 볼일을 본다. 강한 물줄기 소리에 묻혀, ‘황제의 쉬야가 뭔지 보여주십시오.’ 라고 중얼거리는 히엘의 목소리가 작게 들린다. 한참 전부터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변의가 해소됨과 동시에 찾아오는 분노. 순간, 어떤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든다. 천장으로부터 45도 각도로 내려져 자신을 보고 있는 마법영상구. 그 뒷면에서 나오는 눈부신 붉은 빛. 히엘이 마법영상구를 이동시킨 곳은 화장실이었다. 이 순간에도 핀은 몰카(?)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
성검을 어디다 뒀더라? 확실히 바닥에 꽂혔었더랬지. 오줌 줄기가 멈추자마자 핀은 대충 손을 씻고 나서 수건을 찢을 듯 거칠게 물기를 닦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찬찬히 쉼 호흡하며 차분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히엘과 하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바닥에 꽂힌 성검만이 위태롭게 핀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