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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36화 (3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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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살기어린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하리가 주저앉았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이며, 진실은 무엇일까?

“그만 좀 하세요, 제발들…… 흐흑.”

머리 아프고 화가 난 히엘은 하리에게 핑리스를 걸어버리고 핀의 목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핀은 낮은 신음을 흘리다가 이를 악 물었다. 씁쓸히 웃음 지으며 히엘이 말했다.

“하지만 난 아버지의 말을 따를 뿐이다. 하루 안에 이중성력을 심어놓은 진짜 범인들을 잡아줄게. 그 안에 못 잡으면 애꿎은 마활들 죽이지 말고 날 죽여. 네가 가장 의심하는 나를. 그럼 되겠냐?”

그는 그대로 핀의 속박마법을 풀어주지 않고 가공간을 떠났다. 핀은 속박마법이 풀리지 않아 엎드린 그대로 하리를 보며 인상을 썼다. 자신이 행한 모든 것에 대한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

히엘이 생각하기에, 수상한 점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하필이면 자신이 마활 업무를 하느라 마력이 바닥나있던 시기에 하리의 집에 괴한이 들이닥쳤다. 마법이동을 하는 동안 괴한은 하리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고, 빤히 드러내듯 마활 로브 차림을 한 채 마치 들으란 듯이 마법어로 ‘갈아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자신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히엘은 자신이 적의 어떤 알 수 없는 목적에 보기 좋게 걸려든 물고기가 되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물고기로 잡혀 도마에 올려 질지, 아니면 어항에 갇힐지는 잡혀보면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어항에 갇혀 사건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으면 했다. 뭐가 뭔지 알아야 해결도 가능하지 않을 것인가.

다행히 황제는 분풀이로 마활들을 단 한 명만 죽였었다. 히엘은 목숨을 건진 남은 마활들과 함께, 드래곤이 사는 검은 산으로 이동했다. 하리의 팔찌에 둘러져있던 다중 보호막은 마활들이 힘을 합쳐 겨우 발견해낼 수 있었던 것이기에, 마활들이 합친 힘보다 더 큰 마력 감지 능력을 가진 드래곤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올지도 몰랐다.

검은 산은 여느 때와 계절을 타지 않고 기이한 풍경이었다. 드래곤에게 정기가 빨려 겨우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칠흑의 식물들이 뒤엉켜있었고, 짐승은커녕 벌레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아 너무나 스산하고 고요했다. 드래곤은 자신을 찾아온 아홉 명의 마력자-마활들의 기운을 느끼고, 그들이 산 입구로 접어들자 마법어로 인사를 건넸다.

[인간들이여. 먹이 하나 없이 어찌 나를 찾는 겐가.]

드래곤의 도움으로 이익을 취하거나 그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일이 있거나, 혹은 그와의 접선을 시도할 때, 먹이(공물)는 필수였다. 마활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마법어만 보내는 드래곤이 대체 어디 숨어있는지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히엘은 또 드래곤이 어디선가 여장을 한 채로 숨어있겠거니 하며 능글거리는 대답을 했다.

[황제의 목숨 값 하나면 일 년 간 공물은 안 드셔도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마활 십 인조 추가편성을 도와준 뒤 황제를 제 발 아래 맹약시킨 드래곤에 대한 조소였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언사에 기존의 노인 마활 두 명을 제외한 신입 마활들이 경악의 눈초리로 히엘을 보았다. 그러나 드래곤은 진노하기는커녕, 마법어로 인간들의 너털웃음을 따라해 흘릴 뿐이었다.

[허허. 그대는 유쾌해서 좋아.]

[저도 드래곤께서 꿍하지 않으셔서 좋습니다. 그건 그렇고, 일 년 전부터 감지된 이상 마력은 없는지요? 저희 마활들의 마력을 제외한 마력 말입니다. 드래곤께서 허용한 마력이 아닌 것이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만.]

[글쎄. 난 인간들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서 말이네.]

[하하.]

히엘은 웃었지만 그 표정은 썩은 고기를 문 듯 엉망이었다. 드래곤은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한 어떤 정보도 그냥 주는 법이 없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인간들 보다 열배는 긴 수명을 가지고 모든 것에 관조자인 양 구경만 할뿐이었다.

[꿍하지 않으시다는 말, 취소하겠습니다. 뻔뻔하신 거 너무 티 나거든요.]

히엘의 빈정거림은 황제를 넘어 대륙 최강의 생물인 드래곤에게도 가차 없었다. 어차피 드래곤은 실질적인 피해가 오지 않으면 인간들이 건방지게 굴거나 말거나 내버려두는 방관주의자인 것을 알기에 그런 행동도 가능한 것이었다. 드래곤은 히엘 이상으로 능글거리며 대꾸했다.

[이거 왜 이러시나. 정말 뻔뻔한 것은 내가 맹약까지 시켜준 마활들을 그냥 죽여 버리는 그대 아우, 검은 머리 종이 아니던가. 정말이지 너희 인간들은 내 수고를 헛것으로 만들어버리는군. 한낱 인간 주제에 내 가슴을 이렇게 아프게 하다니, 흑흑.]

드래곤의 엄살 같은 흥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미 드래곤은 마활 십 인조를 편성해주고 제국의 황제를 제 발 아래 맹약시킨 자였다. 뿐만 아니라 렌키스의 달이며, 마력 화산에서 흘러나오는 마력 소유권이며, 기타 공물 등, 인간들에게 받아온 먹이, 받을 먹이는 예나 지금이라 여러 가지종류에다 엄청난 양이었다. 그럼에도 흥정을 한다? 그것은 아마 제국의 권력 그 뼛속 깊은 은밀한 것까지 원한다는 것이리라. 천년을 넘게 공물을 흡수하며 살아갈 드래곤에게, 세습권력을 종속시키는 것 보다 안전한 먹잇감은 없었다. 아직 황제가 되지 않은 황태자까지 맹약시키길 바란다는 것일까? 아니면 태어나지도 않은 황제의 넷째 아이마저?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이 될지도 몰랐다.

‘드래곤으로 태어나서 불여우 짓을 해먹고 사는군.’

히엘은 한숨이 나왔다. 드래곤이 무엇을 원하건 간에 하리의 팔찌에 이중성력을 심은 자를 찾아내기 위한 보상으로 뭔가를 제시하긴 해야 했다. 다른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하루 안에 범인을 잡겠다고 큰 소리치고 황제를 감금시키고 나온 참이었다. 그 안에 황제에게 건 속박마법이 풀려 하리가 성검에게 난도질당할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냉정하지 못하고 잔정으로 움직이는 형편없는 마법사라고 누군가가 욕을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하리를 살리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황실을 노리는 적을 찾아 사건을 해결하고 그녀의 목숨을 구하고 싶었다.

[드래곤이시여, 어떻게 하면 덜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히엘이 조건이나 들어보자는 듯 말하자, 마활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그 웅성거림에 상관없이 제 할 말을 거침없이 말했다.

[아직 어린 자들을 무릎 꿇게 하고 싶진 않군.]

그 말은 황제의 후계자들을 원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마활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부터 드래곤은 마활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오직 히엘에게만 들리는 마법어로 말했다.

[지네스테코(사르제스 6대 황제, 핀과 히엘의 부친)가 말하던 숨은 태양이 탐나네.]

큰 태양은 황제 핀라이트를 가리켰고, 작은 태양은 황태자 티에리아를 가리키던 말이었다. 그리고 숨은 태양은 지네스테코가 히엘에게 제국의 훈풍이 되라며 붙여준 별명이었다. 히엘은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을 했다. 제국 최고의 권력을 제 것으로 가진 드래곤이 어째서 마활 탑을 노리려는 걸까. 고작 마력이 강한 일개 인간에 불과한 자신을 노리는 의도가 무엇일까. 물론 떨떠름할 것은 없었다. 시역을 모의하는 자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흑막에 관한 정보를 얻는 대가로 자신을 드래곤에게 바쳐야 한다, 라. 히엘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맹약의 형태로 말입니까?]

[그렇다네. 난 안전을 추구하지.]

[받아들이겠습니다.]

***

마활 탑을 드래곤에게 맹약시켜 얻은 단서치고는 지나치게 무성의한 정보였다. 드래곤이 흘린 정보에 의하면, 히엘보다 강한 마력을 가지고 황궁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자들은 대륙에 총 두 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도구로써 이용될 뿐, 실세는 황궁 내에 있다고 했다. 그 실세는 사람은 아니나 의지를 가진 존재, 드래곤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뿐이었다.

황궁으로 귀환한 히엘은 마활들에게 임무를 지시했다. 과거 여러 차례 황궁 내 사람들과 성물의 수색을 담당한 적 있던 노인 마활 두 명에게는, 황궁 밖에 머무르고 있는 전직 마활들의 수색을 맡겼다. 그리고 신입 마활들에게는 궁내의 성물들과 사람을 수색하라 일렀다. 가장 최하위 마활에게는 하리가 납치당하던 날 그녀의 이동을 담당했던 가이덴 마도사와 기타 접촉한 인물들을 수색하는 것을 맡겼다.

그 후에는 자신이 직접 여러 장소를 살피고 다니며 사건의 시작을 떠올려보았다. 모든 일은 셀바히트 교국에서 보낸 맹신도들에 의한 크고 작은 공격들에 황제가 화가 난 나머지, 그들 모두를 싹 쓸어버리고자 할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때 첫 번째 황태자 암살 사건이 일어났고, 정확히 하리가 궁으로 납치된 시기였다. 일단 적은 궁의 모든 대신들이 추측하듯, 셀바히트 소속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그 누구라도 추측하기 쉬운 단서라는 게 문제였다.

드래곤의 말마따나 사람이 아닌 어느 존재가, 대륙에서 사라져버린 나라의 복수전을 한다고 얻을 것이 대관절 무엇일까. 한 번에 모든 황족을 죽이지 않고 협박을 하듯 하나씩 죽이는 것이 히엘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상대가 셀바히트의 복수를 하고자 한다면 애당초 황제를 죽이는 것이 가장 빠르고 깔끔하지 않은가? 게다가 황제가 첫 번째 자식을 잃고 한 일이 셀바히트라는 단어와 관련된 모든 것을 대륙에서 없애버린 대 학살극이었다. 상대가 황제의 보복까지는 예측하고 덤볐을 거라 생각하면, 도저히 셀바히트 소속 사람이라 여길 수 없었다.

생각에 깊이 빠져있던 히엘은 어느새 자신의 처소에 있는 셰일루티스 앞에 서있었다. 석화마법을 걸어둔 셰일루티스는 날개를 고이 접고 부리를 바닥으로 향한 채 얌전히 히엘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차갑다. 사람이 아닌 것, 그러니까 자신의 마계 생물 역시 용의선상에 둘 수 있었다. 갑자기 히엘이 피식 웃으며 셰일루티스의 볼을 꼬집었다. 농담이 절로 나왔다.

“큭, 너냐? 네가 시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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