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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엘은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가 팔찌를 하라고 해서 둘렀다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어야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 여자는 일 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감금당하고, 시체와 함께 보름간 뒹굴었고, 그것을 견디지 못해 미쳤고, 그 전까지는 그냥 바느질만 잘 하던 평범한 아가씨였다. 그런 아가씨가 팔찌에 이중성력을 숨길 사연이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의심을 하자면 끝도 없이 수상한 점도 많았다. 일단 그녀는 가이덴 팔찌를 두르고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가이덴 식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적어도 히엘 자신이 보기엔 그러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건이 그녀가 가공간에 온 시점부터 발생되었다. 황제의 첫째 아들이 암살, 둘째 아들이 겔사 균에 감염되어 죽지 않았던가. 결정적인 사건은 겁이 많던 그녀가 황제를 가위로 찔러버린 일이었다. 단순히 미쳐서,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한 행동이라 하기엔, 이제와 생각하자니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미쳤어도 그만큼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 여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젯밤 에센 양의 집에 수상한 자가 온 건 알고 있어? 늘 오곤 했었나?”
“우, 우리 집이요? 아뇨…….”
말을 하며 하리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또 한 번 가공간에 갇혀야 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그녀를 덮쳤다. 히엘은 그녀의 눈가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주며 계속 질문했다.
“그동안 집에서 뭐했어? 폐하께 감금된 사실, 누구한테 말한 적 있어?”
“흑…… 일 다니고 어머니가 만든 작품, 발품 팔며 돌아다녔어요. 아무에게도, 어느 사람에게도 궁에 있었단 이야기 한 적 없어요. 믿어주세요, 제발…… 집에 가고 싶어요. 흑…….”
히엘은 취조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겁먹지 않도록 최대한 웃었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등 행동에 신경을 썼지만 그녀의 눈물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난감했다. 이렇게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우는 여인이 이중성력자, 반역자라고 밀어붙이는 건 영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중성력, 황실을 들쑤셔놓았던 반역 관련 사건이라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마활들은 드래곤이 주관하는 맹약에 목숨을 건 자들이었다. 그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의 제물로 드래곤에게 심장을 맡긴 자들이라 황제에 반하는 일이나 사건 등 관련 사실을 숨기게 되면 그대로 심장이 파열했다. 때문에 히엘은 마활로서 하리의 팔찌에 숨어있는 이중성력을 황제에게 말한 상태였고, 곧 이곳은 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었다.
전 황태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이중성력이었고, 그 힘을 팔찌에 숨긴 하리가 황제의 손에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아무도 할 수 없었다. 히엘은 어떻게든 하리에겐 죄가 없다고 믿고 싶었다. 그녀가 황제의 손에 죽임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폐하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 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야.”
하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히엘은 지금 자신이 대체 무슨 말을, 어떤 의심을 하나 싶어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엽궐련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후우.”
깊이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뿜는 그에게 하리가 불안해하며 물었다.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한 건가요? 히에라지엘 님?”
“모르겠어. 나도 솔직히 혼란스럽다.”
울음을 삼키는 소리와 엽궐련의 독한 연기가 실내에 감돌았다. 겨우 찾은 평온이 또 흐트러질 조짐에 하리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몇 달 만에 다시 그 남자, 황제를 만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와락, 하고 갑자기 안겨드는 하리를 히엘은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하리?”
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요! 다시 궁에 갇히는 것만은 정말 싫어요, 저는 아무런 잘못도 한 게 없어요! 제발 황제를 만나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
하지만 히엘이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핀이 들이닥쳤다. 처음부터 싸늘했던 그의 표정은 붙어있는 하리와 히엘을 본 뒤 더욱 험악해졌다. 이중성력이 스며있는 팔찌를 두르고 있던 하리는 일단 그 진실이 무엇이든 황제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당장 죽여도 괜찮을 사람이었다. 히엘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기 위해 유들거리기 시작했다.
“둘이 오랜만이지? 인사…….”
“누가 멋대로 돌려보내래!”
히엘은 갑자기 제 앞으로 들이밀어진 성검을 보고는 어이쿠, 하고 겁을 먹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곧 제 동생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했다. 몇 달간 하리를 찾지도 않아놓고 지금처럼 돌려보냈느냐고 따지며 인상을 쓰는 핀에게 짜증이 난 것이었다.
“어차피 그동안 찾지도 않으셨잖습니까, 폐하?”
빈정거리는 말에 핀은 어금니를 꽉 깨물다가 하리를 보았다.
“히엘에 대한 책임은 곧 물을 거야. 그리고…….”
핀은 점점 하리에게로 다가갔다. 둘째 아들을 죽인 범인일지도 모르는 여인. 왜 진즉 죽이지 못했을까. 오랜 친구도 가차 없이 죽이던 자신이 왜 이 여자만 죽이지 못했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날 자신은 성검으로 여인들을 죽였다. 성검은 애당초 신성 가이덴의 성력을 두르고 있는 검이었다. 하리가 두르고 있는 팔찌는 이중성력이라 하더라도 외부에는 하늘색으로 가이덴 표식이 붙어있었다. 아마도 성검은 같은 성력을 가진 팔찌를 찌르기를 거부했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성력을 가진 성검을 속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무서운 팔찌였다. 그것을 팔에 감고 있는 하리는 그간 맹한 표정을 연기하며 죄악을 덮어왔을 것이다……, 추측한 핀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후회의 말을 내뱉고 말았다.
“죽였어야 했어…….”
취미 따위, 마음의 안식 따위, 그런 안일한 생각들을 하는 게 아니었다며, 그는 분노했다. 그럴수록 성검은 붉은 검기를 뿜어내며 하리의 목에 다가갔다.
“사, 살려주세……!”
성검을 쥔 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파앗-!
순간, 성검이 허공에서 단단한 무언가에 튕기듯 솟아올라 멈춰 섰다. 핀은 히엘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 순간, 성검의 공격을 멈춘 사람은 마법사인 히엘 뿐이리라.
“심장이 두 개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히엘!”
“죽여 봐. 죽일 수 있으면.”
대꾸하는 히엘의 표정에도 살기가 어려 있었다. 분위기는 더없이 차가워졌다.
“허헉, 그만, 제발 그만……!”
하리는 성검이 겨누어지던 그 순간부터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겨우 몇 달 생활이 안정적으로 돌아가나 싶더니 결국은 또 황궁, 또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는 황제의 앞이었다. 대체 자신이 잘못한 게 무엇인가. 어째서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차라리 점령지의 포로들처럼 한 순간에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만큼, 그녀는 이 불안을 지겨워하고 있었다. 히엘은 그녀를 두둔했다.
“처음부터 데리고 온 사람은 너야. 네가 그 퀼트인지 뭔지를 하려고 에센을 납치하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이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야? 단지 네가 지금 분풀이를 하고 싶어서, 그럴 대상으로 하리에게 검을 겨누는 건 아니냐고 묻는 거다.”
핀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분풀이라면 실컷 했어. 많은 숫자만 믿고 나태하게 굴던 인간들에게 책임은 물어야 하잖아?”
“뭐?”
히엘은 그 말뜻을 서서히 알아들었다. 분명 그는 어제 마활 소속의 사람들을 통해 황제에게 보고를 올렸었고, 그 보고 중 하리에게 접근한 괴한이 마활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는 정보도 있었다. 즉 핀이 말한 분풀이란 열 명으로 재편성된 마활들 중 또 누군가가 성검에 의해 죽어나갔단 말이었다. 겔사 사건에 대한 분풀이로 마활들에게 책임을 물으며 그들을 죽인 적이 있었던 황제였다. 이번으로써 그 패정은 두 번째였고, 히엘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친 거지, 넌! 또 맹약을 맺은 자들을!”
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뭐 어때? 공물 바쳐서 얻은 자들도 아니고, 내가 드래곤에게 굽실거려 얻은 자들이야.”
그러니 제 멋대로 하는 것뿐이다? 히엘은 욕지기가 올라왔다. 왜 제 형은 죽이지 않는지 아주 황송해해야 할 따름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가 겨우 막아놓은 성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핀이 자신이 가진 얼마 안 되는 마력으로 성검을 움직인 까닭이었다. 어떻게든 하리를 죽이려하는 그 행동에, 히엘은 그에게 속박마법을 걸어버렸다.
[타이!]
몸을 꼼짝달싹 할 수 없어진 핀은 냉소했다. 그가 하는 말이 히엘의 가슴에 가시가 되어 박히기 시작했다.
“참 재미있어. 곱게 마법 놀이나 하다가 내가 가진 거 다 멋대로 해버리면 그만이고. 맹약만 아니었으면 범인을 히엘이라 생각했을 거야.”
“계속 까불어라?”
“이 다음엔 뭘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겠지? 그 다음엔 나일 테고, 그러면 히엘은 자연스레 제국을 가지게 되겠……! 윽!”
핀은 그대로 바닥에 엎드린 채 신음했다. 성검이 챙-하고 신랄한 소리를 내며 핀이 쓰러진 곳 그 옆 바닥에 꽂혔다. 히엘이 마법으로 그를 제압한 것이었다. 히엘은 바닥에 무릎을 굽혀 앉고서 한숨을 쉬었다.
“후, 젠장."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동생이 일으킨 피바람을 훈풍으로 다스리라던 선황의 말에 얌전히 일만 하였고, 자식을 낳으면 후계의 자리가 치열해질 것 같아 결혼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라는 동생은 황궁을 위협하는 존재를 의심한 나머지, 맹약을 맺은 제 형마저 반역자의 용의 선상에 두고 있었다.
“바보 같은 자식, 네 말 대로였다면 난 진즉 죽었을 거 아니냐.”
“죽지 않을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겠지.”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진즉 내가 널 죽이고 황제가 되었겠지. 이젠 왜 그렇게 하지 못했나, 솔직히 나 자신에게 화도 나려 해. 네 녀석의 그 막나가는 짓거리를 보고 있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