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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얄에 첫눈이 내렸다. 티에리아가 투명체로 변해 제 아버지의 성검을 들고 시역에 실패한 사건은 황제, 히엘, 티에리아만이 아는 비밀이 되어 없는 일처럼 되어버렸다. 히엘이 나름 티에리아를 조사하여 그 원인을 찾으려 했지만, 마활의 탑 보다 강한 자가 어딘가에서 숨어 조종하는 일을 캐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새도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점령지에 대한 업무, 마활 십 인조 재편성, 크고 작은 반란의 진압 등등에 신경을 쓰느라 매우 바빴다. 때문에 하리를 안으며 죽여 달라고 했던 그 날의 기억은 없었던 일처럼 외면할 수 있었다.
히엘은 황제가 욕실 속 가공간의 위치에 관련한 어떤 말도 하지 않자, 그가 완전히 하리를 잊었다고 추측했다. 자신 역시 마활 추가 편성 일로 바빴고 그녀를 만날 적당한 핑계도 없어서 그곳에 들르지 않았지만, 핀의 무반응에 내심 안도감 보다는 짜증이 치밀고 있었다. 가공간을 창조시켜서까지 감금시켜둔 여인을 쉽게 잊는다는 것은, 일단 공간을 만든 사람에게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잊을 거면 애당초 납치를 하지 않아도 되었었고, 바느질 따위를 가르치라 시키지 않았어도 되지 않나 하는 억하심정도 있었다.
오다가다 마주치는 핀에게 ‘황궁 속 변방’의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괜히 그 계기로 하리의 일상이 흐트러질까 싶어 관두었다. 어차피 핀이 그녀를 찾아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그 집에 걸어둔 마력 덕분에 자신이 먼저 알고 찾아갈 수는 있으니 걱정할 것은 없었다. 히엘은 앞으로 하리와 같은 사람들이 또 한 번 비슷한 이유로 잡혀오지 않길 바라며,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
별 사건이 없이 꽃피는 계절이 왔다. 여전히 이중성력자는 잡히지 않았고, 황후는 만삭의 티가 날 정도로 배가 불렀다. 핀은 재편성된 십 인조의 마활들 분위기가 안정되자, 살카 령에서 퀘세드락의 공격을 받고 사라진 자신의 심장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황궁 가득히 달콤한 향기를 흩뿌렸던 사르제스 국화 로가드리아가 서서히 져갔다. 히엘은 제국 곳곳에 마활들과 함께 마나의 탑을 세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날도 정화마법 한번 두르지 못하고 꺼칠한 수염을 매만지며 스크롤 재료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몇 달 간 별 일 없던 하리의 집에서 누군가의 마력이 감지되었다.
“……!”
그간 너무나 별 일이 없었기에 자신이 하리의 집에 마력을 걸어두었다는 사실도 잊을 뻔 했었다. 불길한 마음에 히엘은 업무를 중단하고 곧바로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일개 평민 여자 때문에 제국의 중대한 업무를 중단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이 기회를 그녀를 만날 적당한 구실이 되었다며 기뻐하고 있었다.
마력이동으로 순식간에 도착했지만, 그녀의 집에서 한 걸음, 한걸음, 움직일수록 히엘의 기분은 더욱 불안해졌다. 이 층의 다락에서, 계단으로, 그녀가 자고 있는 가장 큰 방까지 발걸음을 죽인 채 걸어가자, 열린 문으로 침실의 광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누구냐.”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하리와, 그녀를 지켜보는 청회색 로브의 마력자가 있었다. 청회색 로브는 히엘의 눈에 익은 것이었다. 자신이 거느리는 마활 소속 마법사들의 제복이었던 것이다. 히엘은 하필이면 스크롤 작업 중에 하리의 집에 침입자, 그것도 고 마력을 지닌 침입자가 왔다는 것에 소리 없는 탄식을 했다. 업무 때문에 마력이 넉넉하지 않은 지금 그 침입자는 썩 유쾌한 방문자라 할 수 없었다. 공격을 하면 그에 맞설 여유가 히엘에겐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짜증스럽게 괴한에게 말했다.
“누구냐고 했다. 우리 마활 로브를 입고 있지만, 느껴지는 마력을 보아하니 그건 어처구니없는 눈속임 같은데 말이지?”
로브를 입은 괴한은 아까부터 말없이 하리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히엘이 한 걸음 조심스레 다가서자, 괴한은 느리게 뒤돌아보았다. 히엘은 달의 역광 때문에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건드렸다가는 어떤 꼴이 될지 모르는 고 마력자기에 그저 견제하며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인 눈치였다. 괴한의 마법어가 히엘에게 들려왔다.
[귀찮게 갈아주지 않아도 되겠어.]
“뭐하는 녀석이야!”
괴한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혹시나 사라진 게 아니라 투명화 마법으로 실내 어딘가에 모습을 감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만도 했지만, 한참을 느껴도 그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히엘은 괴한이 완전히 이 공간에서 사라졌다고 확신했다.
그는 잠들어 있는 하리를 살펴보았다. 겉으로 보기에 별 이상은 없어보였다. 달빛에 빛나는 붉은 머리는 단발로 짧게 쳐있었고, 예전보다 혈색도 좋았으며, 방금 제법 큰 소리가 났음에도 쌕쌕 숨소리를 내뱉으며 잘 자고 있었다. 열린 문으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도 그녀는 조금도 떨지 않았다.
“광녀, 둔녀 됐네.”
중얼거리며 히엘은 이불을 그녀의 목 위까지 덮어주었다. 동시에 괴한이 한 말을 다시 되새겼다.
[귀찮게 갈아주지 않아도 되겠어.]
…… 무엇을?
무엇을 갈아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그녀의 몸에 뭔가를 ‘갈러’온다는 말인가? 그렇게 해석해야 하나? 괴한이 마활의 로브를 입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한 때 황제가 감금시켜놓았던 여자를, 아무도 몰라야 할 이 여자에게 황제직속 고위마법사 집단의 옷차림을 하고 찾아온 것은 대체……?
혼란스러운 히엘은 이불을 도로 내팽개치고 하리의 머리에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여전히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그녀가 어처구니없어서, 그는 픽 웃으며 씁쓸하게 말했다.
“따라가자, 너한테 무슨 마법을 걸어놨을지도 모르니.”
***
하리는 차갑고 홀가분한 몸 상태를 느끼며 눈을 떴다. 비단 커튼, 화려한 태피스트리, 고귀해 보이는 금속 장식들이 여기저기 있는 이곳이 낯설다. 멍하니 눈을 굴리던 그녀는 자신이 나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채 상체를 일으켰다.
몇 개월 만에 또 다시 황궁으로 강제 이동된 눈치였다. 전날 직물 길드에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씻고 바로 잠에 들었는데, 눈 뜨면 다른 날과 같은 일상을 맞이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예상한 일상이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황궁에서의 악몽이 다시 살아나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저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갈색 머리를 곱게 비녀로 틀어 올린 절색의 남자였다. 하리는 그 얼굴을 보고서도 한참동안 그가 누군지 생각을 해야 했다. 몇 달 간 소식 한 번 없어서 영영 만나지 못할 사람인 줄 알았던 그 사람, 그 아름다운 마법사, 히엘이 다가오고 있는 현실이 믿을 수 없었다.
히엘은 침대에 앉으며 늘 그랬듯이 가벼운 말투로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지? 홀딱 벗겨둬서 미안해, 광녀. 조사 좀 하느라고 어쩔 수 없었어.”
오랜만에 불린 광녀라는 말이 이렇게 기쁘게 들릴 줄은……, 하지만 그녀는 얼떨떨했다. 그녀는 침대 저 구석으로 가서 이불로 온 몸을 감쌌다. 무슨 일로 자신을 이렇게 또 말도 없이 황궁에 데려왔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히엘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손, 하늘색 팔찌가 있던 그 손을 슬며시 빼냈다.
“…… 이거, 왜 계속 하고 있었던 거야?”
하리는 히엘이 만지작거리는 하늘색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는 가이덴 신자였고, 절대 이 팔찌를 풀지 말라고 늘 말했어요. 어, 어머니가 하라고 해서…… 그래서 한 것뿐이에요. ”
하늘색 면 끈으로 만든 팔찌, 그것은 히엘이 하리의 온 몸을 수색하고 나서 가장 마지막으로 수색한 물건이었다.
히엘이 알기로 하늘색 팔찌는 하리의 몸에서 단 한 번도 풀려본 적이 없었다. 가죽도 아닌 면 끈이라 그간 많이 헤지고 절로 뜯어질 법 하나, 몇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리의 손목에 둘려있었다. 그래서 손으로 풀어보려 했지만 풀리지 않았고, 마력을 사용해도 풀리지가 않았다. 무려 마활의 탑인 히엘이 가진 고 마력이었음에도 팔찌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팔찌는 무엇을 뜻하는가.
히엘은 확신했다. 괴한이 말한 ‘갈아주지 않아도 되겠다’던 물건은 이 하늘색 팔찌가 확실하다고. 분명히 히엘보다 고 마력자가 만든 팔찌였다. 단지 마활 탑의 마력으로도 풀리지 않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무서운 이유가 있었다. 마활 십 인조 모두가 모여서 그 팔찌를 조사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결론, 바로 팔찌 속에 이중성력이 숨어있다는 사실이었다. 핀의 둘째 아들이자 전 황태자를 죽게 만든 겔사 균, 겔사 균을 가이덴 성전에 뿌려두었던 이중성력, 그 힘이 모두 이 팔찌에서 나왔다는 것을 히엘은 몇 시간 전에 알아버린 것이었다.
“단지 그 뿐이야? 어머니가 하라고 해서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풀지 않았다고?”
히엘의 집요한 질문이 부담스러운 하리는 히엘의 손에서 슬며시 빠져나왔다. 히엘은 굳이 그녀의 손목을 계속 쥐고 있으려 하지 않고 허탈한 듯 놓아주었다. 그녀는 이불을 감싼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온 몸이 침대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속박 마법이 걸려있는 탓이었다. 한참 전에 그녀에게 속박 마법을 걸어두었던 히엘은 곤란한 표정이었다.
“앉아. 지금은 어디도 못 가니까.”
“무슨 말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