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회 -->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황제는 애원했다. 달랑 수건 한 장에 감싸인 그녀의 온 몸에서 나오는 온기를 느낄 때 마다, 그는 그대로 흡수되고 싶었다. 따뜻하고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점점 크게 떨 때 마다 생생하게 현실이 와 닿았다. 이렇게 떨고 있는 하리가 겔사균을 옮겨왔을 범인일리 없다, 이렇게 저를 보고 두려워하는 여인에게 심장이 없는 몸으로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하지만 자신은 어째서 지금 이 여자를 찾아왔는가, 왜 찾아야 했던가…….
실오라기 하나 없이 헐벗겨진 마음이 눈을 떴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널 죽여 버릴 테니까.”
“피, 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핀의 얼굴에 하리는 직감했다. 자신을 죽이라 말하던 황제가, 상대를 죽일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핀, 제발…….”
얼음보다 차가운 손가락이 하리의 뺨에 닿았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은 두려움에 젖은 눈을 보기 싫다는 듯 감겨버리고는, 그대로 뺨으로, 턱으로, 목으로 내려왔다. 떨리는 가슴 위로 내려앉은 손이 그녀를 감싸고 있는 단 하나의 천을 벗겨버렸다. 새하얀 종이 같은 살결 위로 저를 원망하던 이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수많은 포로들, 시체들, 먼저 간 두 아들, 황후 리이라, 그리고 자신과 가장 닮은 티에리아……. 그는 슬펐다. 눈을 살짝 들어 하리의 얼굴을 보면 그녀 역시 그들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편안한 마음 한 번 가지지 못한 이 삶이 공허하고, 저주스럽다. 달처럼 풍만한 살결위로 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그때였다. 하리가 손을 올려 핀의 두 볼을 감쌌다. 핀은 그녀와 눈을 맞췄다. 지친 눈의 그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뭐가 그리 힘들어?”
“…….”
“넌 뭐가 그렇게…… 두려운데? 왜 늘, 이렇게 부수어야만 하니…….”
핀은 이대로 부서져버릴 것 같았다. 벗겨진 사람은 하리인데, 치부가 드러난 자는 하리를 벗기고 있는 자신인 듯했다. 그녀의 가슴 위로 눈물이 몇 방울 더 떨어졌고, 핀은 자신의 마음을 지우듯 그 눈물을 손으로 거칠게 닦아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돌아 그곳을 나갔다.
혼자 남은 하리는 테이블의 마른 피를 닦아냈던 걸레를 보았다. 황제에 대해 뚜렷이 아는 것 하나 없지만, 자신은 어쩌면 황제에게 저 더러운 피를 닦아내는 걸레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서 깨끗한 수건을 꺼냈다. 그리고는 황제의 눈물로 범벅이 된 가슴을 닦았다. 잠 들 시간이었다. 잠에 들지 않으면 못 견딜 시간이었다.
***
열흘이 흘렀다. 황제가 하리를 찾는 일은 없었다. 히엘만 가공간에 와서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필요한 물품을 챙겨 주고 갈 뿐이었다.
히엘은 그녀에게 전에는 묻지 않았던 사적인 것을 질문했다. 어디에 살았는지,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이곳에 오기 전엔 무얼 했는지, 꿈은 뭔지, 소원이 뭔지와 같은 빤하고 유치한 질문들이었다.
하리는 자신은 아이얄 서쪽지구 어느 거리의 정원이 예쁜 붉은 색 지붕 집에 살았고, 집의 간판에는 엔데리아의 수공예점이라고 새겨져 있었으며, 가족은 돌아가신 어머니 한 분 뿐에다가, 장례식 후에 아이얄 직물 길드의 상회들 중 일할 만한 곳을 찾을 예정이었고, 가능하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꿈이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날도 하리는 평소처럼 가공간에서 잠이 들었다. 하지만 눈을 뜨자, 가공간의 주황색 지붕 집 천장이 아닌 다른 천장이 마주하고 있었다. 낡은 천장, 자신이 한때 살았던 붉은 지붕 집의 천장이었다.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머니의 방이었다. 몇 달간 그냥 방치되어 먼지가 앉았거나, 거미줄 친 일 없이 깔끔한, 어머니의 방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놀라운 광경이 그녀를 마주했다. 히엘이 주방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아, 진짜 이거 왜 이렇게 달라붙을까.”
마활의 청회색 로브를 입은 채 얇게 훈제시킨 고기를 팬에 굽고 있는 그의 모습이 하리는 너무 낯설고 당황스러워 말을 더듬었다.
“어, 어떻게 이이이이 공간이!”
갓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깜짝 놀란 얼굴이 너무나 귀여워 보인 히엘은 씩 웃으며 식탁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식사하며 이야기 하자. 배고프지? 나도 고파. 여기저기 연결한다고 밤새 힘들었다고. 뭐해? 얼른 앉지 않고.”
하리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자, 히엘은 다 탄 고기를 접시에 하나하나 담다가 마음에 안 드는지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고, 빵이랑 물만 하리의 앞에 내밀었다.
“먹어. 요리는 해본 적이 없어서 보다시피 이렇게 됐다.”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평민의 주방에서 뭔가를 만들어 그 음식을 평민에게 먹이려 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리에겐 낯선 일이라 침묵만이 이어졌다. 히엘은 물을 마시며 하리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간판 덕분에 쉽게 찾을 수 있었지. 여긴 진짜 네 집이야. 이 지점과 네가 지냈던 그 공간들을 바로 연결시켜버렸어.”
밤새도록 걸린 작업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핀의 욕실 속 벽면 가공간과 하리가 원래 살던 집, 그 두 공간을 연결시켰다. 뿐만 아니라 지저분해진 하리의 집을 정화시키는 등, 그녀가 다시 원래의 생활을 하는데 무리가 없도록 되돌려놓았다. 그녀의 상태가 이제 정상 생활이 가능할 만큼 호전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은 황제의 동의 없이 일어난 일이었지만, 히엘은 개의치 않았다.
“좀 기뻐하라고. 왜 표정이 뚱해?”
“저, 고, 고맙다고 해야 할지, 폐하가 아시면, 저는, 음.”
“고마워 할 필요는 없어. 네가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된 일일 뿐이야. 솔직히 폐하께서 널 찾지 않은지 꽤 됐잖아? 신경 쓰지 마.”
“사실 이렇게 하셔도 무사할지 모르겠어요. 히에라지엘 님이나 저나…….”
“신경 쓰지 말래도. 그건 내가 알아서 해.”
히엘은 맛없는 빵을 맛나게 먹었다. 하리는 불안하게 지켜보기만 했고, 시선이 부담스러운 히엘은 빵을 하나 뜯어 하리의 입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가 빵을 느리게, 그러다가 빠르게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히엘에게 걱정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히엘은 웃어버렸다.
“에센 양. 식사 때 그렇게 빤히 보는 거, 예의 아니야.”
“…….”
“아무튼 집이 참 소담하니 예쁘네. 바느질 물건들도 아기자기하고…… 이제부터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
“솔직히 난, ‘녀석’이 저말 바느질에 흥미가 있어 널 데려왔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그렇다고 네 몸이 목적인 것도 아닌 것 같고. 그치?”
하리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좀 더 두고 봐야겠어.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할게.”
“뭔데요?”
“가공간에서 있었던 일, 비밀로 지켜주겠어? 거기까지는 내가 어떻게 뒤처리가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지.”
하리는 한 쪽 손목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녀와 한 몸과 같은 하늘색 팔찌가 손톱 끝에서 짓이겨질 듯 뭉개졌다. 히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리는 그제야 히엘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히엘이 마지막 인사를 했다.
“갈게.”
“저, 어디 가시는?”
하리는 그가 갈 곳이 궁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못내 아쉬워 그렇게 묻고 말았다. 히엘은 피식 웃었다.
“이것저것 하느라 피곤해서 ‘집’에 가서 쉬려고.”
“아…….”
“에센 양.”
“네?”
“광녀라고 해서 미안했어.”
“아니에요.”
갑자기 히엘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정말 멀쩡한 거 맞아? 멍해 보이는데…… 큭, 늘 그랬지만.”
“괜찮아요.”
“그래. 그럼 안심할게. 에센 양한테는 끔찍한 시간이었겠지만, 내겐 재…….”
히엘은 뒷말을 이으려다 삼켰다.
“아무튼 잘 있어.”
히엘은 이 층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에센 부인이 모아둔 천, 작품들이나 기타 공구들이 쌓여있는 곳이지만, 궁으로 돌아갈 워프 장소이기도 했다. 히엘은 만에 하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빨리 찾아갈 수 있기 위해 그렇게 연결해두었었다.
“안녕히 가세요.”
히엘은 웃으며 궁으로 돌아갔다.
***
하리는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자유 시간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에센 부인 없이 혼자 사는 것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궁에 납치되었고, 죽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왔다. 갑자기 제 자리를 찾게 된 그녀가 가장 먼저 겪은 일은 주변 사람들의 질문 세례였다. 이웃들과 한때 에센 부인의 제자였던 부인들은 그녀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고, 친구들 역시 어떻게 된 일이냐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집안 정리를 하며, 화단을 정리하며, 때로는 길드를 둘러 다니며 일자리를 알아보는 등, 원래의 생활로 되돌아가는 데에만 집중했다.
열흘이 지나고, 또 열흘이 지나도 황제가 들이닥치는 일이 없어서 그녀는 궁에서의 기억을 약간이나마 수월하게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은인과 같은 히엘이 잊혀 지지 않는 것은, 그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쉬움과 그리움에 얼룩진 날들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