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회 -->
하리는 심장을 움켜잡았다. 아까부터 겨우 지켜온 평정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힘들게 꿰매놓은 정신이 다시 찢어지려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새파란 안색의 저 사람 같지 않은 남자, 저 사신은 언젠가는 자신을 죽이고 말 것이다, 죽이지 않는다고 말했어도, 결국 자신은 이 폐쇄 공간, 가짜 공간에 갇혀서 죽고 말 것이다, 저 자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것이다…….
그때 핀이 손을 올려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했다.
“너, 괜찮아?”
“아니.”
딱 그 순간이었다.
테이블 위, 바느질에 쓰이던 뾰족한 가위가 핀의 가슴을 찌른 것은.
“…… 에센.”
핀은 고개를 숙여 가위를 보았다. 하늘색 팔찌를 두른 그녀의 새하얀 손이 가위를 더욱 깊이 찔러 넣고 있었다. 핀은 살카 전을 치른 후 몸에 심장이 없었기에, 어떤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하리가 골 백번 심장을 찔러도 황제의 성검은 그 어딘가에 있는 황제의 심장과 몸을 공명시켜 살게 해줄 것이었다. 이 상황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허탈하게 웃는 핀에게 하리가 겁에 질려 외쳤다.
“미, 미안해. 나, 살고 싶어. 널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아. 미안해. 미안해. 핀… 아니, 황제폐하, 흐흑…….”
하리는 더욱 세게 가위를 쑤셔 박았다. 그래야만 확실히 죽일 수 있을 것 같기에. 살과 뼈를 찌르는 느낌이 생생하여 스스로도 잔인하고 무섭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무리 깊이 찔러도 꼼짝도 않는 황제였다. 하리는 눈이 커졌다.
“왜, 왜 넌!”
황제는 쓰러지지 않았다. 몇 초가 더 지나도, 쓰러지지 않았다. 검붉은 피를 흘리면서도 태연히 하리의 손을 잡고, 가위를 천천히 뺄 뿐이었다. 하리의 눈에 이미 핀은 사신, 그저 전쟁광 황제에게 붙이는 별명이 아닌, 진짜 사신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차, 차라리 날 죽여…… 죽이라고, 그냥!”
하리가 겁에 질려 외치자, 핀은 가위를 테이블 위에 천천히 내리며 말했다.
“모르겠어. 내가 왜 널 살렸는지, 왜 지금도 널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지. 하지만.”
“넌 왜…… 넌 대체 뭐야, 어떻게 돼먹은 인간이야, 어째서!”
“널 죽여야 하는 여유도, 내겐 없는 것 같다. 수업은 다음에 할게. 쉬어.”
피가 흐르는 가슴을 공단 천으로 대충 감싼 핀은 그곳을 떠났다.
***
파괴마법이나 방어마법 스크롤 제조에 월등한 히엘이 익숙지 않은 치유마법을 쓴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다. 가위에 가슴이 찔린 핀의 지혈을 해준 것이었다. 궁내 치유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으면 될 일을 굳이 자신에게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무런 말없이 치료만 받고 떠나는 핀을 보며 히엘은 가공간 관련 일이라 직감했다.
히엘은 다음 날, 업무가 없는 한가한 틈을 이용해 하리의 언덕 집에 들렀다. 거실 테이블에는 핀이 흘린 검붉은 피가 말라가고 있었다. 히엘은 집안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하리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여느 때처럼 니이새 둥지를 찾아갔다. 없었다. 호수를 찾아갔다.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수집품인 마계생물, ‘셰일루티스’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는 가벼운 농담을 하듯 지시했다.
“내 동생 팬 계집애, 어디 있나 알려 줘.”
셰일루티스는 곧장 그녀를 찾아 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셰일루티스는 그녀가 저 먼 설산 언저리의 작은 마을, 마을이라고도 할 수 없는 허술한 가공간의 끝, 제일 작은 집에 있다고 히엘에게 알려왔다. 히엘은 곧장 그 지점으로 이동을 했다.
그늘진 구석에서 하리가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꼼짝도 않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온갖 칙칙함과 우울함은 다 짊어진 분위기였다.
히엘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앞에 서서 그녀와 똑같이 무릎을 굽히고는, 그녀의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한 차례 튕겼다.
“이봐.”
그러자 하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풉, 하고 히엘이 웃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흑…….”
히엘은 늘 그랬던 것처럼, 보모와 같은 말투로 말했다.
“어이구, 울어?”
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갑자기 히엘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그래…… 그런데 광녀. 나, 조금 화났다고.”
“네?”
이렇게나 싸늘히 굳은 히엘의 표정을 본 적이 있었던가. 히엘은 그녀에게 눈을 맞추며 차갑게 말했다.
“요즘 광녀 같지 않아서 진지하게 추궁하는데 말이지. 에센양이 한 짓……, 황제 시해 미수란 거 알고 있나?”
늘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대하던 마법사가 이리도 다른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낯설음은 두려움을 일으켰다. 하리는 어쩌면 히엘의 손에 죽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 지금 엄청 화났다고. 아무리 미운 녀석이라도 동생은…….”
…… 동생이란 말이야,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그녀는 예전에 짐작했던 황제와 마법사의 관계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왜 그랬던 거야?”
히엘은 묻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질문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황제를 향한 그녀의 증오가 깊었으니 일어난 일 아니었던가.
“젠장, 대답할 필요 없어.”
많고 많은 시간 중, 어제였다. 그녀는 황제의 심장이 제 자리에 없는 때에 가위라는 어처구니없는 물건으로 그 가슴을 찔렀다. 결국 황제는 죽지 않았고, 히엘은 안도할 수 있었다. 단지 동생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만 안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큰 안도감이 그도 자각하지 못한 채로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다.
황제 시살이 사실이 되면, 황제에게 충성의 맹약을 한 마활은 시살자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모르는 채로 내버려두는 것은 몰라도, 아는 채로 죽이지 않는 것은 맹약의 파기를 뜻했고, 마활의 생명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황제의 심장이 제 자리에 있었고, 가위가 그 심장을 건드리기라도 했다면, 히엘은 하리를 죽여야 할지도 몰랐다. 벌레 하나도 편히 죽이지 못하는 그가 그녀를 편히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그는 자신이 그토록 돌봐주었던 하리가 결과적으로 죽지 않아도 되는 이 현실에 남모를 은밀한 안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황제의 심장이 제 자리에 없는 비극은, 지금 히엘에게 다행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내가 그동안 너 돌봐준 일이 헛수고가 되어 버릴 뻔 했잖아.”
짜증스러운 말투였지만, 하리에게 깊이 정들어버린 감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하리는 눈물을 흘리며 자포자기로 말했다.
“주, 죽이지 않으면…… 제가 죽을 것만 같았어요. 살고 싶어서, 살고 싶어서 그랬어요. 용서…… 그런 거 바라지 않아요. 죽여주세요, 그냥. 더는 이렇게 살기 싫어요, 흑흑…….”
지친 표정엔 삶에 대한 무기력이 진하게 녹아있었다. 히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만 울어.”
울게 만든 자신이 미워진 그는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그냥 한번 따져본 거야. 괜찮아. 됐어, 울지 마. 뭐든지 결과가 중요한 거야. 아무 탈 없어. 녀석은 죽지 않으니까, 괜찮으니까.”
“흑, 주, 죽지 않는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황제가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괴물이라도 되었느냐고 묻는 그녀의 표정에 히엘은 서글픈 실소를 터트렸다.
“화난다. 너무 화가 나.”
“네? 무엇이요?”
갑자기 히엘은 하리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순간 하리는 숨을 참으며 온 몸을 가늘게 떨었다. 낮고 거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긴장시켰다.
“널 가둔 그 녀석, 그 녀석 때문에 미치고 만 너. 둘 다, ‘너희’ 둘 다, 가장 짜증나.”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저를 그냥 죽여주…….”
“그딴 말을 하는 네가 가장 짜증난다고.”
“네?”
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하리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보기만 하자, 그는 아예 하리의 손목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하리가 이곳에 온 날부터 계속 차고 있었던 하늘색 팔찌가 너무나 낡아 그 까슬까슬한 느낌이 히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황제의 가이덴 탄압 때문에 이제 아이얄 그 어느 곳에서도 하늘색 팔찌를 대놓고 드러내는 사람은 없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가공간에 갇혀있는 그녀가 그런 것에 대해 알게 무얼까. 이 제국에서 하늘색 가이덴 팔찌의 의미가 무엇이 되었는지, 지금 수도가 어떤 분위기인지, 자기 몸 하나도 자유로울 수 없는 그녀가 어떻게 알겠는가. 히엘은 그녀가 애처로웠다. 너무나 가여웠다. 차라리 그냥 죽여 달라고?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결심의 말을 했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생각 들지 않게 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