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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30화 (3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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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하던 태양이 힘을 잃었다. 포울룬디의 달이 점점 푸른빛을 띠며 다가올 황금빛 가을을 예고했다. 얼마 만에 찾아온 휴식인가. 황제는 멍하니 황궁 정원을 보며 차가운 숨을 내뱉었다. 하아, 하아, 하아아……. 고함을 치듯 더 큰 숨을 내질러보지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원 곳곳에 장식된 승리의 흔적들에 시선이 머물렀다. 한쪽에는 살카령 빙반에 비열화 마법을 걸고서 조각한 얼음 신상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레닌령의 청괴석 조각으로 만든 사자상이 있었다. 공기 중에 뿌리를 내리고 떠다니는 하를의 신비로운 나무는 영구생장마법을 받은 채로 황제의 정원 곳곳을 어지럽게 부유하며 꽃잎을 휘날리고 있었다. 그 외에도 정원에는 역대 황제들의 전리품들이 한가득해서, 더 이상 정원이 아니라 마치 박물관으로 변하는 듯했다. 대륙 모든 지역을 압축한 이 장소에서, 황제는 극도의 허무감을 느끼고 말았다. 어째서 성취감이 아닌, 허무감이어야 할까. 어째서 이 아름다운 전리품들을 보며, 답답한 느낌을 받아야 할까.

황제는 인상을 찌푸리다 문득 자신의 은밀한 가공간을 떠올렸다. 히엘이 요즘도 가공간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황제도 알고 있었다. 폐하, 황궁 속 변방의 보급 문제는 제가 잘 처리하고 있습니다, 폐하, 그런데 언제까지 제가 그 처리를 해야 합니까, 폐하, 차라리 변방 포로를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면 안 되겠습니까, 등등, 다른 이들이 들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하며 하리의 존재를 끊임없이 인지시켜왔던 히엘이었다. 그때마다 황제는 내색은 않았지만 당황했고, 언제든 그곳에 가서 그녀를 보아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였다. 그는 성검에 축소 마법을 걸고서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하리에게로 갔다.

멀리 주황색 지붕이 보였다. 언덕길을 걸어가는 핀의 걸음걸이가 느렸다. 최대한 느리게 걷는데도 어느새 왁자지껄한 연극 소리가 새어나오는 현관 앞이었다. 하리가 마법영상구를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체처럼 새파란 손이 낯설었다. 심장이 몸에 없는 비정상적인 상태인 지금, 새삼 자신의 상태가 그녀에게 이상하게 비춰질까 신경이 쓰였다. 망설이다 노크를 했다. 톡톡, 하필이면 마법영상구에서 더 큰 웃음소리가 나와 노크 소리가 묻혀버렸다. 그는 다시 두드려보았다. 톡. 톡. 톡.

“히에라지엘 님?”

오랜만에 들은 그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반가운 목소리가 친숙하게 히엘을 부르자, 핀은 거리감을 느꼈다. 그는 문을 열지 않고서 나지막하게 말해보았다.

“나야.”

안에 있던 하리는 그의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으려 마법영상구를 껐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히엘 님?”

핀은 인상을 찌푸리며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자 하는 그때, 하리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하리가 먼저 문을 열었다. 초록 눈동자에 핀의 모습이 박혔다. 놀라고, 소리 지르고, 두려워하는 반응이 나올 거라 짐작했던 핀은 생각보다 차분한 하리의 모습에 약간 안도를 했다. 그녀가 눈동자를 내리깐 채 말했다. 말을 편히 하라던 황제의 강요를 잊지 않은 듯.

“왔…… 구나.”

“어쩌다보니 늦었어. 미안.”

핀 또한 처음 그녀에게서 바느질을 배우던 때처럼 태연하고자 했다. 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핀이 조심스레 물었다.

“들어가도 돼?”

“…… 수업 준비 안 해놨는데.”

“그럼 기다리지 뭐. 언제 되는데?”

“곧, 네가 하라면, 하, 한 시간 줘.”

“들어가서 기다려도 돼?”

“…… 어.”

그들은 서로가 낯설었다. 하리는 전과 달리 정중하게 묻는 핀의 태도, 새파란 안색을 한 핀의 모습이 낯설었고, 핀은 전과 달리 멀쩡히 구는 하리가 낯설었다. 실내에 있는 다양한 바느질 작품들이 핀을 맞이했다. 하리가 그려둔 그림들도 벽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핀은 피식 웃었다. 하리가 마치 그에게서 달아나는 듯, 다른 방으로 수업 준비를 갔다. 그녀의 등에 대고 그는 무심코 말을 건넸다.

“퀼트 많이 했었네?”

멈춰선 하리가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른 누구와도 퀼트하지 말라했던 그 말을. 그녀는 긴장하지 않고, 겁먹지도 않고, 차분해지려고 했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나, 나 혼자 한 거야, 약속 지켰어. 죽이지 마…… 흐흑.”

“잘했네.”

“흑…… 어?”

하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핀은 웃고 있었다.

“여태 이렇게나 많이 만들다니, 나도 해보고 싶어. 그러니까.”

“…….”

“울지 마. 수업준비 해줘.”

웃고 있는 핀에게서 서늘한 광기를 느끼며 하리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경계심에 쓸데없이 문도 꽁꽁 잠가버렸다. 미친 황제에게 바느질을 가르쳐야 했다. 그것이 가능할까. 하리는 천 더미를 만지작거렸다. 빠른 시간에 저 자를 보낼 수 있는 간단한 물건을 만드는 수업이 좋았다. 생각해보니 수업 준비에 한 시간 걸린다고 한 것이 후회되는 것이다. 무엇이 좋을까. 어떤 것이 간단할까. 그렇게 생각해낸 것이 도장 지갑이었다. 그녀는 눈에 보이는 천을 아무거나 골라 반짇고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테이블로 걸어가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거북이처럼 느렸다. 핀이 다소 의외라는 듯 말했다.

“벌써 수업준비 끝이야?”

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가져온 도구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핀은, 이내 자리에 앉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오늘 뭐 가르칠 건데?”

“도, 도장 지갑.”

하리는 기계처럼 도안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른 수업 때도 도안 그리기는 늘 하던 것이었다. 몇 달 만에 느긋하게 뭔가를 만들어보겠구나, 싶은 핀은 그 그림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연필을 쥔 새하얀 손이 고왔다. 이곳에 올 때부터 하고 있었던 하늘색 면 끈으로 만들어진 팔찌도 여전했다. 모든 것이 처음 수업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핀은, 그녀가 그린 작디작은 도장 지갑 도안에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에센.”

“으, 응?”

“나 이런 작은 도장 지갑 필요 없어. 내 도장은 이만하거든.”

핀은 하리에게 한 손을 주먹으로 만들어 내보이며, 국새의 크기를 알려주었다. 황제의 커다란 주먹에 놀란 하리가 숨을 급히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면서 자기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어차피 핀은, 그 큰 도장을, 지갑에, 담지, 않을 거잖아. 안 가지고 갈 거잖아. 그리고 그렇게 큰 크기는 초보는 무리야.”

핀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만들어서 내가 가지고 갈 건데.”

“거짓말 마. 이 작은 도장 도안으로 할 거야.”

아무렇지 않은 듯 수업을 받고 싶은 남자와 어떻게든 빨리 수업을 끝내고 싶은 여자가 서로 고집을 부렸고, 정적이 흘렀다. 핀은 문득 하리가 가져온 천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하리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하리는 황제의 서늘한 검은 눈동자에 딸꾹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핀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버렸다.

“공단 자카드 원단, 분명 올 풀림이 심해서 퀼트하기 적합하지 않다고 들은 것 같은데. 넌 이걸로 그 작은 도장 지갑을 만들려 한 거야?”

그제야 하리는 자신이 가져온 천을 보고는 당황했다. 분명 핀의 말 그대로였다. 예전, 원단에 대한 설명을 할 때 하리는 공단 자카드는 특수 기법에 쓰이지 않는 이상 초보는 쓰지 않았으면 한다고 가르쳤었다. 그런데도 그것을 초보의 수업에 가지고 온 것은 실수였다. 어떻게든 황제를 빨리 보내고 싶어 저지른 실수였다. 어떤 변명도 생각해내지 못하는 하리에게 핀이 태연히 물었다.

“너, 괜찮아?”

“어, 어? 뭐가?”

“마음.”

핀은 사실 정신이 괜찮으냐고 묻고 싶었다. 집안을 사람 사는 것처럼 꾸며놓고, 입고 있는 치마까지 만들어낸 하리가 비정상처럼 보이진 않았다. 놀라지도 않고 차분히 말하려 하는 태도에는 어느 정도 안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엉뚱한 원단을 가지고 수업을 하려는 그녀의 모습은, 그의 안심을 조금 무너트리고 있었다.

하리는 제 마음을 다치게 한 자가 마음이 괜찮으냐고 묻는 것에 기이함을 느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마음, 내 마음, 괜찮지 않아. 너무 아파.”

“알아.”

황제의 짧은 말에 하리는 무언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말 알아? 네가 알아? 네가, 너라는 사람이, 정말 죽음의 방에서 보름이 넘는 시간동안 갇혀있었던 기분을, 안다고?”

말을 할수록 하리의 눈가에 젖어들었다. 서러움, 분노, 공포, 끔찍함, 그 모든 것이 담긴 눈물이 흘렀다. 핀은 일렁이는 초록 눈동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리는 그런 황제를 증오했다. 아니, 그런 인간을 증오했다.

“넌 몰라. 절대로 알 수 없어! 그냥 하는 말이잖아, 그냥 아는 척, 멀쩡히 이해하는 척 해놓고 또 꿍꿍이가 있잖아! 왜 엔과 세라비를 죽인 거야, 왜 이유도 가르쳐주지 않고 사람을 죽이고, 왜 말도 없이 나를 가뒀어! 편하게 대하라면서, 왜 가뒀냐고!”

“그러지 않으면 내가 미칠 것 같았으니까.”

담담한 말에 하리는 기가 찼다.

“뭐?”

“너희를 죽여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어.”

아들을 죽인 범인일지도 모르는 이들을 살려둘 수는 없었었다. 그게 이유였고, 그 이유는 지금도 유효했다. 다만 멈춘 상태일 뿐이었다. 하리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궁 안의 사정을 모르는 그녀에게 핀은 그저 사람을 가둬놓고 죽이기 좋아하는 미치광이일 뿐이었다.

“미쳐있어…… 핀 넌 미쳤어.”

핀이 서글피 웃었다. 자신은 미친 걸까. 미치지 않으려고 살아온 삶이었는데. 미치지 않기 위해 그토록 정리에 정리를 해두었는데.

“미쳤다면 너흴 죽이지 않았겠지. 미치지 않았으니 죽인 거야.”

스스로 잘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핀은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했다. 눈앞의 여자를 죽여야만 이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질까. 평온을 얻기 위해 시작한 취미인데 어째서 편안해지지 않는지, 그 이유를 핀은 알 수 없었다.

“수업이나 하자. 네 우는 얼굴, 불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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