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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29화 (2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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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

히엘이 고개를 살짝 비틀어 입술을 닿을 듯 다가갔다. 하리는 눈을 크게 떴다. 입맞춤이 시작되려는 분위기였다. 그 짧은 순간, 하리는 히엘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매끈한 이마, 감기기 직전인 꼬리가 긴 눈, 반듯하게 뻗은 콧매, 허스키한 목소리를 뱉는 살짝 벌어진 입술이 새삼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아야 할 것 같았다. 히엘도 그녀가 눈을 감지 않는 것을 느끼고는 씩 웃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눈 감아.”

그런데, 그 말을 들은 하리가 눈을 감으려다 오히려 더 크게 뜨고 말았다.

히엘의 얼굴이 갑자기 핀으로 보이는 것은, 그 한 마디 때문이었다.

“감아.”

눈을 감으라는 말은 하리에게 누군가의 얼굴,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허, 억……!”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한동안 온열 마법에 걸려있던 호수의 노란빛과 폭죽과 백조들, 니이새 둥지 따위의 동화 같은 풍경으로만 가득 차 있던 머릿속이, 핀과 닮은 히엘의 눈감으라는 말에 새빨간 핏물로 얼룩지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나 남았어?

‘왜? 일찍 고통 없이 죽여주려고 온 거야?’

‘아니. 대답이나 해.’

‘내 낯빛 보면 알 텐데.’

‘그렇군. 내가 너에게 미안한지 아닌지는 널 죽여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상황이다.’

‘무슨 말이야!’

‘눈감아.’

‘핀!’

‘감아.’

그렇게 가차 없이 흩뿌려졌었던 엔의 피. 그날의 기억.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형제는 닮은 얼굴이었다. 하리는 여태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눈을 감으라는 그 한 마디에 그들이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인마!”

“…… 뭐?”

히엘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얼굴이 핀과 닮았고, 특히나 핀이 했던 말을 똑같이 했을 때는 하리에게 핀 그 자체로 보였다는 것을 몰랐다. 하리는 그를 괴물로 대하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그리고는 서둘러 그곳을 뛰쳐나갔다.

“대체 뭐가 문제야!”

히엘은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무얼 하려했던 걸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그녀가 적당히 놀라는 척 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본능적인 느낌이라고나 할까. 입맞춤 한 번에 그녀의 정신과 자신의 감정이 모두 좋게 확실시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틀리고 말았다. 허무함이 그를 덮쳤다.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처럼 도망가는 그녀의 정신은 역시나 제자리일 뿐이었다.

“젠장!”

혼자 남은 히엘은 마력으로 드레스며 장신구들을 하나씩 천천히 정리를 했다. 동시에 자신의 기분도 정리를 했다. 헛웃음이 절로 나오고 있었다.

***

아흐레 쯤 시간이 흘렀다.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은 히엘은 그녀를 반쯤 포기해버렸다. 더는 바느질을 가르쳐달라는 둥, 자질구레한 설명들을 하며 그녀의 정신을 환기시키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는 게 힘들었다.

하지만 가공간 안에서 그녀는 살아야했다. 살아야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잘 때를 이용해서 음식이라던가, 필요한 물건들을 가공간에 가져다주고 갔다. 가끔씩 하리가 저쪽 어딘가 나무에 숨어서 지켜보는 것을 느낄 때면 그는 종이에다 ‘또 그림 그려줘’라는 글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작은 그림을 하나 그려서 문 앞에다가 붙이고 그곳을 나갔다. 무엇 때문에 그녀가 겁을 먹은 건지 그는 잘 몰랐지만, 그런 작은 행동으로나마 그녀의 경계심이 사라져주길 바랐다.

며칠 후에 황제와 블랙유니콘 병사들이 귀환했다. 곧바로 개선식, 축하 연회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러한 각종 연회에 황제는 불참했다. 변방전을 치른 황제는 시체처럼 안색이 새파랬고, 주변의 공기를 얼릴 듯 차가운 숨을 내뿜었으며, 수척해진 온 몸에서는 예전보다 더욱 깊은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구태여 그런 모습을 제국민들에게 보여 논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히엘은 본 스크롤, 테스트 스크롤을 전부 소진시켜버리고 블랙유니콘 병사들마저 거의 잃고 온 황제가 몸마저 그리 되자 역정을 내었다. 노발대발 하는 것 보다는 차갑게 웃으며 빈정거리는 것이 그의 역정이었다.

“심장 좀 흘리고 다니지 마십시오, 폐하.”

사실 히엘은 황제가 내놓은 변방전의 결과에 실망도 하고 있었다. 변방 정복은 단지 제국의 깃발을 꽂고 위세를 떨치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숱한 전쟁들이 그렇듯, 무언가 노릴 이익이 있어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점령지를 회복 불가능한 폐허, 당분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버리는 무모한 승리자가 대관절 어디 있단 말인가.

히엘의 눈에 황제는 어린아이였다. 겁박을 위한 도구로만 쓰라고 만든 본 스크롤도 모조리 낭비해버리고, 신나는 살육 놀이를 하다가, 심장이나 잃고 온 그런 어린 아이였다.

어지간하면 히엘의 농담이나 빈정거림에 반응을 하지 않던 핀이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지껄일 시간이 있으면, 궁에 기어 다니는 날파리나 잡지 그래.”

그는 선황이 그토록 말했던 대륙통일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찝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살카령 전을 떠올려도 그러했다. 모두가 전면의 살카족 거주지를 향해 보고 있을 때, 혼자 고개를 돌리고 발견하기도 힘든 먼 곳의 투명체, ‘퀘세드락’의 방향을 일러주며 외쳤던 병사 하나가 있었다. 첩자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개 전투부대도 아닌 정예 마병사부대- 블랙유니콘에 있던 자였다. 대륙 최강의 마병사 부대에 첩자로 추측되는 자가 있다는 것은, 황제의 정신에 잔뜩 가시를 박아주고도 충분한 일이었다.

어딘가에 살아있는 셀바히트 쪽의 인간일까? 그렇게 없애고 없애왔는데도 가장 깊은 곳까지 은밀하게 숨어있는 것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는 걸까?

그러한 이유로 한 바탕 숙청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또다시 황제의 병적인 결벽이 시작된 것이었다. 황후의 부친이자 가이덴 대주교는 가이덴 신성 부대를 해체하라했던 황제의 명을 거역하고 그 부대를 제 휘하에 두어 황권을 모독하였다는 죄명을 받고 파면, 사형을 당했다. 어찌 이리 야속한 벌을 내리실 수 있느냐 오열하는 황후에게 황제는 ‘이중성력자를 잡지 못했으면서 부대를 제 소유로 둔 대주교는 그 삼족을 멸해도 무방하나 황후의 면을 보아 사형으로 그칠 뿐’이란 대답을 했다.

황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지금은 가이덴 교회가 되어 있는 전 셀바히트 대교당의 가이덴 제 1사제를 포함, 그를 주축으로 삼고 종교 활동을 하던 모든 사제들에게 성력제거형을 내렸다. 대륙 전부를 흡수한 황제에게 더 이상 종교의 힘, 즉 황권을 견제하는 성력자들은 무용한 존재들이었다.

사르제스 제국이 대륙을 제패하던 과정에서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가이덴 교가 순식간에 종이호랑이가 되고 있었다. 독실한 가이덴 교파들은 황제의 뜻에 반발했고, 제국군은 그들을 탄압했다. 대주교라는 구심점을 잃은 가이덴 교는 속수무책으로 와해되었다. 동생의 패정이 위태로워 보인 황형이 가이덴을 탄압하는 일은 선황의 뜻이 아닐 거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황제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가이덴 교파의 숙청을 도운 이들에게 점령지의 개발권을 골고루 나누어주며 치사했다. 그러자 가이덴 교파에 적을 두던 이들도 그것을 노려 동지를 밀고하고 탄압하는 배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믿음으로 뭉쳐있던 이들이 황제가 내건 미끼에 눈이 멀어 서로를 죽이고 모함하였다. 어느 누군가가 가이덴 지하 조직을 밀고하고 변방의 레닌 령을 통째로 받았더란 소식, 또 누구는 최고성력자의 은신처를 제보하여 살카의 빙반 소유권 일부를 가졌더란 소식 등이 전해지면서 그 진흙탕 싸움은 더욱 가열되었다. 그럴수록 가이덴 교는 힘을 잃어갔다. 황제로부터 점령지를 통째로 얻은 이들은 그 소유권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경쟁을 하듯 공물을 황실에 바쳤고, 공물을 보낼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제 혈육을 궁에 보내어 제국을 위해 일하게 해달라고 인질노릇 시키기를 자처했다. 황제는 그런 인간들을 보며 종종 제 형에게 말하곤 했다.

“느껴져? 인간이란 이렇게 단순해. 이렇게 단순한 인간들로만 가득한 세상을 아버지께서는 왜 진즉 통일하지 못하셨던 걸까. 가끔은 말이야. 어쩌면 당신이 무르셔서 아들을 그렇게 몰아세우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어.”

황제의 눈빛에 제 아버지를 경멸하는 기운이 보였던 것은 히엘만의 착각일까. 황제는 제 형보다 성정이 독하여 황재의 재목으로 찍혀 강제로 마력 성장을 당하고 곧바로 궁을 떠나 어딘가에서 유학을 해야 했다. 그 후에는 끊임없이 전쟁에만 참가했었다. 피로 얼룩진 과거를 살게 한 아버지에 대한 동생의 원망을 히엘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점점 그 원망이 짙어지는 듯했다. 변방전을 치른 후에 더욱 더 사람다움을 잃어가는 황제를 보며 히엘은 한번쯤 동생의 과거를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며, 보듬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늘 마음으로만 그칠 뿐이었다. 자칫 상처를 건드리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며 황제는 선황이 내린 의무감, 그림자에서 해방을 느꼈다. 황후는 네 번째 회임 중이었고, 황태자 티에리아는 제 아비가 과거에 그러했듯 두 번째 추가 마력성장을 받고 열네 살이 되었다. 황제는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아비를 잃은 황후의 슬픔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심장이 불안정하단 이유, 후계의 자격을 좀 더 끌어올려야 한다는 이유로 강제 마력성장을 받아야 했던 아들 티에리아의 짙은 그늘은 외면해버렸다. 이제 이중성력자만 잡히고, 심장만 원래 상태로 되돌려놓으면 황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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