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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28화 (2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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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드래곤 품위는 삶아먹고 왔냐?’

히엘은 드래곤에게 신경을 끄고 원래 목적-하리가 원하는 천을 다시 사오는 것을 상기했다. 사실 시녀들에게 시켰어도 괜찮을 일이었다. 굳이 이렇게 변복을 하고 평민들이 활보하는 거리를 돌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거리로 나오지 않으면 어수선한 마음이 정리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내일 가면 안 되느냐, 안 가면 안 되느냐, 좋아한다, 가지 말라, 는 말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사람의 바지춤을 잡던 하리를 떠올리면 당황스러웠다. 혼자 갇혀 있는 여자가 제게 잘 해주는 자를 보니 정이 들 만도 할 것이나, 그 이상의 감정은 피차 무의미했다.

히엘은 딱 천 더미만 가져다주고 그곳을 자주 찾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직물 상회들을 둘러보았다. 종이에 적힌 대로 열심히 구했다. 상인들은 말쑥하게 차려입은 미청년이 꼼꼼하게 천을 찾고, 고르는 것을 보고는 흥미로운 시선들을 보냈다.

“여기 적힌 이 시리즈는 단종된 겁니까?”

“그렇지. 구하려면 웃돈을 더 줘야, 그리고 여기엔 취급 안 해요.”

“그렇군요. 혹시 취급하고 있는 상회를 아시면 좀 가르쳐주십시오.”

“그야 어려울 건 없지만, 길모퉁이 돌아서면 왼쪽에…….”

히엘은 상인에게 길 설명을 듣다가 문득 가게 저 안쪽의 시제품 드레스를 보았다. 아이보리색 비단에 청록색 장미 장식이 달린 드레스였는데 황궁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화려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단순하지만 가볍지 않은 우아함이 있었다. 히엘은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의 하얀 원피스를 떠올렸다. 언제나 마법으로 대충 만들어진 투박한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 하리에게 저 고운 드레스를 입히면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히엘의 시선을 놓치지 않은 상인이 넌지시 이야기했다.

“예쁘지? 우리 딸이 디자인을 공부하는데 그 애의 솜씨라우. 워낙 디자인을 예쁘게 해두었기에 비싼 비단을 주며 만들라고 해서 이렇게 가게에 걸어두고 있어. 젊은이가 애인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면야 비단까진 아니더라도 더 싼 원단으로 똑같이 만들어 괜찮은 가격에 해줄 수 있는데, 어떠슈? 말만 하시…….”

“이거 그냥 파실 수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히엘의 말에 상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평민이 사기에는 꽤나 값이 나가는 드레스였다. 비단의 값부터가 평범한 드레스 가격의 수십 배나 했다. 하물며 훌륭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완제품이었다. 상인은 젊은 청년이 드레스에 대해 잘 모른다 생각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도 그냥 팔고 싶지만, 어지간한 귀족이 아닌 이상 이걸 살 수 있을 젊은이 또래는 없다고 본다우. 내 이 디자인 그대로 린넨으로 만들어서 싼 가격에다가…….”

“이거면 되겠습니까?”

상인은 히엘이 주머니에서 꺼낸 옥금화를 보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옥금화는 보통 금화와 달리 마계금속으로만 제조되며, 다양한 빛깔이 신비롭게 뿜어져 나오는 특수 화폐였다. 금화보다 더 귀한 가치라서 이런 작은 상회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인은 옥금화 뒷면 황궁 재정부의 인장을 제대로 확인한 뒤 시제품 드레스를 고운 천에 포장하기 시작했다.

“옷차림을 보고는 귀족 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죠.”

조용히 웃은 히엘은 상인으로부터 길 안내를 마저 받고 그곳을 떠났다. 그는 하리가 드레스를 마음에 들어 할지 궁금했다.

‘이별 선물이라 해두자고.’

***

자신의 처소에 도착한 히엘은 심란한 얼굴로 엽궐련을 연달아 피워댔다.

“하, 미치겠네. 뭐한 거지?”

드넓은 남색 카펫 위에 온갖 드레스며 장신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이보리색 비단 드레스로 시작되었던 이별 선물이 어쩌다 이렇게 많아진 건 지 히엘 자신도 잘 몰랐다. 원래 사야 할 천은 새까맣게 잊고서 어느 샌가 하리에게 어울리는 것들만 한 가득 품에 안고 있었다.

실로 태어나서 처음 해본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선물을 할 만큼 진지한 만남을 이어간 적도 없었고, 아주 약간이나마 진지했던 만남에서도 이러한 선물을 시종들에게 시켜 보내면 보내었지, 직접 고른 적은 없었다. 하리가 가공간 안에서 투박한 원피스만 입고, 장신구라고는 머리 묶는 가죽 끈이 전부였기에, 그것이 눈에 밟혀 하나 둘 씩 사게 된 것들이었다. 그게 이렇게나 많아질 줄이야, 히엘은 기가 찼다. 이제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당황스러웠다. 그 광녀가 이걸 받고 무슨 의미로 받아들일까? 괜히 상처 주게 되는 건 아닌가? 그냥 가지 말아야 하나? 이대로 발걸음을 끊어버려?

하지만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툭, 하고 엽궐련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튕겨나가 허공에서 소멸되었다. 그는 머리를 긁다가 선물들을 중심으로 마력 이동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 흘렀다.

“흑흑, 으아악!”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서러움에 울고 있던 하리는, 갑자기 제 몸을 짓누르는 온갖 옷과 장신구에 파묻히듯 깔렸다. 히엘은 이동장소를 재설정해두지 않은 것에 후회하며 하리를 깔고 있는 무거운 것들을 옆으로 치워주었다. 그리고는 신음하는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

“그때부터 계속 이렇게 울고 있었던 거야?”

하리는 히엘을 야속한 사람 보듯 했다. 퉁퉁 부은 얼굴, 눈물이 방울방울 맺힌 기다란 속눈썹, 원망스러움을 담은 눈동자, 그것을 보고 있던 히엘은 갑자기 또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 울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진짜로 가버리면 어떡해요! 흑흑…….”

“내가 분명히 천 그런 것들 사서 온다고 했을 텐데. 그것도 못 참고 애처럼 엉엉 거려? 스물네 살 아가씨 맞아? 아니면 아직도 광녀인 거야?”

“저는 광녀가 아니에……!”

버럭 외치려던 하리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온갖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보고는 뒤늦게야 이상함을 느꼈다.

“천들은요?”

“응? 천 같은 거 이제 필요 없는 것 같아. 그리고 이것들은 다 선물.”

하리는 널브러진 선물들에는 관심 없이 히엘이 말한 것 중 ‘필요 없다’는 한 마디에 서운한 얼굴이 되었다.

“왜요?”

히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제 의미 없어졌으니.”

하리와 바느질을 함으로써 그녀의 정신을 되돌리려 했던 일이 이제는 다 무의미한 듯했다. 그녀는 더는 광녀라 할 수 없었다.

“아무튼 하리, 이제 울보는 그만하자고. 강해져야 해. 이곳 나가서 살려면.”

난데없이 그런 말을 하는 히엘을 하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저를 도, 돌려 보내주신다고요?”

“응. 언제까지 여기서 이럴 수는 없잖아.”

히엘은 진지했다. 황제가 하리의 자유를 허하지 않으면 그는 황제의 모든 비밀을 알려버리겠다는 유치한 협박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원래라면 진즉 해도 될 것이었지만, 황제가 변방전에 임하기 전에 잡음을 일으키기 싫었을 뿐이었다.

“그 서운한 표정은 뭐야? 좀 더 즐거워해도 된다고, 에센 양.”

“흐흑.”

그녀가 또 울음을 터트리자 히엘은 그녀가 기뻐서 운다고 여겼다.

“여기서 나가면 안 좋은 기억은 모두 잊고 새로 시작하는 거야. 원래 에센 양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밝게 살 수 있길 빌…….”

“싫어요! 대체 왜 제게 이러시는 거예요!”

갑자기 따지고 외치는 하리의 행동에 히엘은 당황했다.

“에센 양?”

“으흑흑! 흑!.”

하리는 저쪽 구석으로 가서 웅크린 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왜 우는지는 자신도 잘 몰랐다. 황제에게 납치를 당해 갇히고, 잔인한 일을 겪고, 히엘을 만났다. 그때부터는 온통 머릿속에 히엘뿐이었다.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린 지 너무 오래라, 그냥 히엘만 볼 수 있다는 것에만 만족하고, 그와의 시간만을 기대하며 지내왔다. 동화 같은 풍경과 아름다운 마법사의 보살핌에 익숙해져버린 그녀의 온전치 못한 정신에, 히엘이 아까 한 말들은 잔인한 이별 선언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이봐.”

히엘은 그녀에게 다가가 눈을 맞춰 앉았다. 기뻐할 줄 알았던 그녀가 이렇게까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자 그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왜 울어? 뭐가 싫은데?”

하리는 고개를 파묻은 채로 섭섭했던 것을 모두 말해버렸다.

“이레 동안 찾지 않으셨어요. 가지 말라고 했는데 가버리셨어요. 이제는 저를, 저를 왜, 이렇게 보내시려, 저는 히에라지엘 님만 있으면 되는데!”

‘얘, 왜 이러냐.’

멀쩡한 정신이라면 상대가 어떤 신분, 지위인 것은 대충 눈치 챌 터였다. 멀쩡한 여자라면 감금 상태를 벗어나게 해준다는 말에 이토록 서럽게 울며 싫다고 말할 리는 없을 터였다. 일개 평민 출신 여자가 황족에게 당신만 있으면 된다고 떼를 쓰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떼를 쓰고 있었다. 떼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미쳐있다. 이 비정상적인 어리광은 미쳤으니 가능한 것이었다. 히엘은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광녀, 어쨌든 여긴 외롭고 쓸쓸한 곳이야. 분명 밖으로 나가면 더 좋은…….”

“당신이 없어서 외로운 거였다고요!”

고개를 들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히엘은 순간 얼어버렸다. 붉은 입술은 그간의 말이 자신도 버겁고 민망한지 떨리고 있었고, 눈물에 짙어진 진초록의 눈동자는 그럼에도 상대를 찌를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 제가 한 말은 다 어떻게 들으신 거냐고요! 저는 당신을 좋아하는데, 당신만 있으면 되는데, 흑…….”

히엘은 결국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고 말았다. 정말이지 동생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그 어린 녀석은 왜 광녀와 있어주라고 시켰던 걸까. 자신이 그렇게 한가해 보였나? 만만한가? 형이란 존재가 뒷감당하려 있는 거야? 괜히 황제 탓을 해보며, 그는 하리를 대하던 친절한 태도를 버렸다. 그리고는 원래의 탁하고 까칠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리.”

“흑, 왜요!”

“잘 생각하고 대답해.”

“네?”

“보통 말이지. 그런 얼굴로 남자들한테 그렇게 좋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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