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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27화 (2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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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빙반 아래, 얼음 파편 속에서 황제는 의식이 돌아왔다. 제국군을 괴롭히던 퀘세드락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황제를 둘러싸고 있던 다중보호막도 거의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몸 곳곳에 날카로운 얼음 조각에 긁힌 상처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어쨌든 목숨은 건진 상황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핀은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하아…….”

햇빛이 스며드는 빙반 아래, 그의 숨은 인간의 온기가 아닌 이곳 살카령 지하의 공기보다 더욱 차가운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천천히 다시 숨을 쉬던 황제는 이 이상한 현상의 원인을 생각해보았다. 몸의 반이 그대로 사라져버렸던 병사들, 퀘세드락의 특수 공격. 그는 뭔가 알 것 같아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

쿵쿵 뛰고 있어야 할 심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가슴을 누르며 박동을 확인해보았지만, 가슴은 뛰지 않았다. 손목의 맥도 그러했다. 전신의 핏줄이 불필요하게 그저 그 형태만 유지한 채로 존재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다섯 명의 블랙유니콘 병사들 중 하나가 깨어나 황제를 보며 질겁한 소리를 냈다.

“폐하, 안색이!”

자리에서 겨우 일어난 황제는 가까운 얼음 조각판 하나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살아있는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제의 성검은 그의 주변에서 붉은 기운을 불길하게 뿜어내며 떠돌았다. 마치 성검도 블랙유니콘 병사처럼 황제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심장이 사라져버렸다.

자신의 상태를 확실하게 알게 된 황제는 퀘세드락을 떠올렸다. 대상을 동공간 다중차원으로 소멸시키거나 이동시키는 그 마계 생물은, 제국군을 공격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심장까지 강탈해버린 것이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수선 피우지 마라.”

의식을 차린 뒤 처음으로 나온 말에 황제는 조금 놀랐다. 목소리는 예전과 똑같았고, 심지어 그는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일어날 수도 있었다. 심장이 가슴에 없을 뿐이지, 그 외에는 모든 부위가 살아있는 사람처럼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때 마침 성검이 다행이라는 듯, 검음을 냈다.

[우우웅- 우우우웅-]

황제의 씁쓸한 웃음이 이어졌다. 성검은 사르제스 건국 초기부터 역대 황제들을 보살피며 그들의 최후까지 지켜왔었고, 충성의 맹약을 맺은 마활들 보다 더욱 더 제국의 앞날을 생각하는 존재였다. 비록 황제의 심장이 퀘세드락의 공격을 받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지만, 이렇게 멀쩡히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성검이 가진 자체의 힘이 어딘가에 있을 황제의 심장을 그 육체와 공명시키는 것이리라. 황제는 그렇게 여기며 성검에게 마법어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 몸 상태를 가지고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황제에게는 변방전이라는 대륙 통일의 마지막 임무가 있었다. 그는 널브러져 있는 병사 들 중 한 명의 몸을 뒤졌다. 그 자는 모든 종류의 파괴 스크롤을 지니고 있던 자였다. 황제는 그 자로부터 스크롤을 빼낸 뒤 병사들을 깨웠다.

“레닌령으로 가겠다. 이동진을 만들어라.”

“하지만 폐하, 지금 폐하의 상태로는 안 됩…….”

“지금 이 숫자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예?”

“타협이나 보류는 없다. 이것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병사는 황제의 손에 쥐어진 파괴 스크롤들을 보았다. 지상 위의 모든 생명체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위력을 가진 스크롤들, 때문에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해야 할 것들이었다. 오죽하면 마활의 탑이자 황형인 히에라지엘이 ‘무모한 황제가 스크롤 남발의 폭주를 할까 싶으면 그때엔 그를 기절시켜서라도 막으라’고 주의를 주었을까. 지금 타협이나 보류가 없다 말하는 황제는 다른 변방들을 살카처럼 기다리지 않고 모두 스크롤로 휩쓸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폐하…….”

병사는 황제를 막아야했다. 도무지 황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저런 위태로운 몸으로 끝까지 해치울 필요가 있을까. 얼마든지 이대로 황성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나머지 일을 해도 될 것이었다. 변방을 파괴 스크롤로 모두 쓸어버리면 제국이 가질 수 있던 이점들도 사라지게 된다.

“재고해주십시오.”

“마병사들은 이동진을 그려라. 레닌령이라 했다.”

“페하!”

“레닌령이라 했다.”

선황이 말한 제국통일의 끝에 눈이 먼 황제에게 병사들의 저어된 간청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그저 빙반 위, 얼음 조각 틈 사이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하얀 새 한 마리만 보일 뿐이었다.

***

제국 수도 아이얄의 북쪽에 있는 ‘검은 산’은 드래곤의 안식처이자 모든 생물들이 정기를 빨리는 죽음의 산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주 먼 옛날, 사슴들이 뛰어놀고 각종 아름다운 꽃과 식물들이 흐드러졌으며 기이한 새가 노래를 부르던 그 신비로운 장소는 드래곤이 온 뒤로 모든 것이 새까맣게 변한 채 박제처럼 굳어버렸다. 지금의 검은 산은 마치 대륙 최강의 마력 생물인 드래곤 하나만을 위한 거대한 박물관이 되고 말았다.

아름답던 산이 ‘검은 산’이라 불리게 된 뒤로 어느덧 천 년이 흘렀다. 드래곤은 이곳에 질릴 만큼 질려 있었다. 그는 평소에 인간들이 별 다른 일을 일으키지 않는 한, 즉 인간들이 공물을 꼬박꼬박 바치는 한 얌전하게 굴었다. 제국 모든 생물들을 제 발 아래 엎드리게 할 수 있으면서도 그 힘을 부리기는커녕 나태한 일상을 보냈다.

그는 수컷 드래곤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서 툭하면 자그마한 몸체의 인간 소녀로 변신을 했다. 그런 행색으로 산책을 하는 것은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또 지하에 모아둔 공물들 중 아주 자그마한 보석들을 추려내어 인간의 번화가로 가서 여러 물건들, 특히 숙녀의 옷을 사는 데 취미를 붙이기도 했다.

오늘도 검은 산을 빠져나와 아이얄의 모든 고급 드레스 샵을 돌며 자신만의 취향을 쫓던 드래곤이었다. 종업원과 샵에 있는 디자이너들에게 유행과 디자인에 관한 온갖 수다를 떨어대며 인간 시늉을 하던 그는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군가가 마법어로 그에게 어떤 사실을 알려왔기 때문이었다.

[…… 황제는, 그렇게 되었다.]

종업원은 갑자기 멍하니 있는 작은 숙녀, 드래곤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드래곤은 종업원의 말에는 관심 없이 인간의 언어로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살아있는 놈을 그렇게 시체로 만들어버리면 어떻게 해? 아, 시체는 아닌가. 그래도 심장이 없으면 시체 맞지, 뭐.”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시체요?”

종업원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는 드래곤을 해괴하다는 듯 보았다. 드래곤은 치렁치렁한 붉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 옷 별로네. 다른 가게 좀 돌다가 와야겠어.”

여태 비싼 옷만 보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며 돌아서는 숙녀의 태도, 심장이 어쩌고, 시체가 어쩌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 태도에, 종업원은 기분이 상했다. 여태 자신이 상대한 손님이 미친 사람에 불과할 뿐이었다고 여기며 그를 내쫓았다.

“썩 꺼져버려! 어디 재수 없게 사람을 놀리고 지랄이야!”

여태 이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드래곤은 아무렇지 않게 다른 가게로 갔다. 드레스자락을 나풀거리며 걸어가는 그를 보고 누군가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으니, 그 자는 바로 히엘이었다.

‘미친 변태 파충류 같으니. 오늘도 저 자그마한 몸에 온 마력을 꽁꽁 싸매고서 돌아다니네.’

드래곤의 강한 압축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자는 오직 사르제스 마활의 탑, 히에라지엘 뿐이었다. 그는 드래곤과 마주쳐봐야 지루하고 좋은 일도 없어서 적당히 몸을 피하려 했지만, 드래곤이 히엘의 마력을 먼저 느낀 것이 문제였다.

[그대, 이런 곳에는 어쩐 일인가?]

배시시 웃으며 마법어로 그렇게 전해오는 드래곤에게, 히엘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색한 몸짓으로 대륙 최강 생물체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똑같이 마법어로 대답을 해주었다.

[뭔가를 좀 사러 나왔습니다.]

가지 말라고 애원을 하는 하리를 뿌리치고 천을 사러 나와 거리를 방황하던 중이었다. 하리가 그려준 무늬의 천들을 시녀에게 시키지 않고 몸소 수도의 곳곳을 뒤지며 찾던 것이었다.

[사러 나와? 여자를 사나? 허허허.]

드래곤은 난봉꾼 황형이 대낮부터 신나게 즐기러 거리로 나왔겠거니 하고서 껄껄 웃었다. 물론 수컷 드래곤의 껄껄거리는 웃음은 숙녀 특유의 입을 가리고 수줍게 호호 웃는 것으로 포장이 되었다는 것은 당연.

[그게 아니라 뭔가를 사러 나온 것이라고…….]

[훗, 그대는 여전히 그 난봉꾼 기질을 버리지 못했군.]

[예?…… 아니, 그게 아니라…….]

숙녀 행세를 하는 드래곤에게 매번 적응을 하지 못하는 히엘이 난처하게 대답을 하는데, 드래곤은 손사래를 쳤다.

[되었네. 소싯적에는 나도 그랬으니. 즐거운 시간 보내게.]

유유히 지나쳐가는 드래곤을 보며 히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래곤이 공물을 더 달라는 둥, 검은 산에 정기가 부족하니 새 생물들을 좀 가져오라는 둥, 귀찮고 성가신 명령을 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변태라니까, 새빨간 머리카락에 새빨간 드레스라니. 작작 좀 하지.’

그렇게 히엘이 가던 길을 가려는데, 갑자기 드래곤이 그를 불러 세웠다.

[이봐, 그대. 내 갑자기 그대에게 적당한 충고가 생각났는데.]

[미천한 인간으로서, 충언 감사히 여기겠습니다.]

[작작 좀 즐기고 다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해놓고서는 뒤돌아서기가 무섭게 ‘작작 들기라’말하는 드래곤의 속을 통 알 수 없는 히엘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황제…… 아니지, 황형으로서의 품위를 생각할 나이가 되지 않았던가.]

뜻 모를 엉큼한 웃음을 흘리며 돌아서는 드래곤을, 히엘은 한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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