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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26화 (2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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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엘은 그 가슴골을 넋 놓고 내려다보려다 정신을 정리하고 자신이 할 일을 떠올렸다. 이 광녀가 원하던 천들을 사는 게 우선이다! 그는 종이를 절반으로 죽 찢었다. 천에 대한 설명이 적힌 부분과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부분을 정확히 나눈 것이었다. 아까부터 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종이를 어서 달라고 눈으로 보채고 있었다. 히엘은 종이를 그녀의 가슴골을 가리듯, 내밀었다.

“자. 미안.”

곧바로 종이가 낚아 채여 창밖으로 멀리 던져졌다.

“버리는 거야? 섭섭한데. 그리고 나 쌍꺼풀 너무 느끼하게 그리지 말아줄래? 다시 그려줘.”

“히엘 그린 거 아니에요!”

“아하,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언제까지 이런 자세로 있을 거야? 뭐, 나는 좋지만.”

그제야 하리는 자신이 엎드린 것도, 히엘에게 안겨있는 것도 아닌 어색한 자세로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가슴을 손으로 가리는 등, 경계의 눈을 했다.

‘가슴 보였어! 몰라!’

‘참 빨리도 알아채는군.’

돌아서서 책상에 다시 앉아 눈물의 흔적을 열심히 없애는 하리를 보며 히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사실 그는 자신에게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분명 며칠 동안 신나게 놀고 왔는데 말이지. 나, 반응할 뻔 했다고.’

그렇게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였다. 갑자기 하리가 뭔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칼이, 필요해요.”

뜬금없이 칼이 필요하단 말에 히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태 수줍어하고, 울고, 자기 가슴 보이는 것에 부끄러워 할 줄 알던, ‘정상인’같던 하리가 갑자기 칼은 왜 필요하다고 하는지 궁금한 것이었다.

“뭐?”

“칼, 주세요.”

무슨 결의를 다지는 것 같은 하리의 눈동자. 히엘은 한숨을 쉬었다. 칼 달라는 하리의 말을 자해 하겠다는 말로 들은 것이었다. 그는 마치 진짜 보모라도 된 듯 걱정스럽게 하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칼, 안 돼요. 위험해, 광녀.”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하리는 몽당해진 연필을 히엘에게 내보였다.

“하하…… 나, 참.”

고작 연필 깎기 위해 칼이 필요하다는 말을 그렇게 비장하게 할 게 뭐람? 히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랍을 뒤져 칼을 가져왔다.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칼을 들고는 연필을 깎아주었다. 사그락, 사그락, 명색이 황족인 자가 제 손으로 연필을 깎아본 일이 있었을까? 마력은 섬세하게 다뤄도 손까지 섬세하지 못한 히엘은 몽당연필을 더욱 몽당하고 만들며 진땀을 흘리고야 말았다.

“안되겠어.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금방 이거랑 똑같은 거 만들어서…….”

“됐어요. 이리 주세요.”

히엘은 마력으로 연필을 새로 만들어내려고 했고, 하리는 그에게서 칼을 빼앗아들었다. 그리고는 새 연필을 가져와 깎기 시작했다. 훌륭한 솜씨였다. 원래 그녀는 아이얄 직물길드에 들어가기 위해 드로잉을 오랫동안 배운 적이 있었고, 연필 깎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히엘이 하리의 옆에 좀 더 다가가서 앉으며 물어보았다.

“그런데 연필은 뭐하려고?”

“…… 게요.”

“응? 잘 안 들려.”

“…… 그리게요.”

“뭘? 더 필요한 천이 있어?”

“히엘을, 다시 그려드리고 싶어요.”

아까는 그토록 아니라고 부정을 하더니 결국에는 이런 식으로 수줍게 말하며 그림의 모델을 인정한다…… 라, 히엘은 자기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갔다.

“좋아. 나도 에센 양이 그림이든 바느질이든 뭐라도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내일 여기 종이에 적힌 천들 모두 구해오고 그림 도구들도 챙겨올게. 열심히 하고, ‘보통 사람’처럼 되는 거다? 응?”

“네…… 저, 그리고.”

“응.”

“‘에센 양’보다는 하리라고 불러주세요.”

또렷한 말투,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히엘은 어쩌면 그녀가 이미 제정신으로 반 이상 돌아오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리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어요. 히에라지엘 님.”

히에라지엘은 히엘이 아주 오래전에 가르쳐주었던 자신의 진짜 이름이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히엘은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리, 알았어. 그렇게 부를게.”

이대로 그냥 원래 살던 곳으로 보내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는 다음에는 희극 따위 말고, 좀 더 심오한 영상들이 들어있는 마법영상구를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떠날 것 같은 눈치에 하리가 그의 로브 자락을 붙잡았다.

“어디가세요?”

“응, 뭐 이것저것 사러. 천도 사야하고, 물감도…….”

“그냥 내일 가시면 안 돼요?”

하리는 세상 모든 안타까움과 슬픔이 다 담긴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며 갑자기 엎드려서는 히엘의 발목까지 붙잡았다. 여태 멀쩡한 듯 굴다가 이렇게 딱 달라붙을 때 보면 영락없는 광녀였다. 히엘은 식은땀을 흘렸다.

‘허, 미치겠네. 또 가슴 보인다고!’

그는 저번처럼 또 쌍코피를 터트릴 것만 같은 위기를 느끼며 하리로부터 몸을 떼어내려 했다.

“내일이라니. 오늘 생각한 김에 오늘 해야지.”

“안 돼요! 안 보내줄 거예요!”

하리는 히엘의 허벅지를 꼭 붙들어 안았다. 그 덕분에 그녀의 가슴골은 더욱 깊어졌다. 히엘은 이제 얼굴이 다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분명 허리가 부서져라 잘 놀고 왔는데 이 반응은 뭐냐고!’

그는 더 이상 하리로부터 몸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괜한 질문이 나오고야 말았다.

“너, 그러니까 너, 정신 말이야.”

“네? 제 정신이 왜요?”

“이제 멀쩡한? 아, 그러니까 전엔 안 멀쩡했다는 소리는 아니고, 그러니까…….”

“와, 히에라지엘 님이 횡설수설 하시는 건 처음 봐요! 재미있다!”

이제 광녀는 히엘을 보며 실소를 터트릴 줄도 알았다. 히엘은 어이가 없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 그것도 다 큰 남자의 목을 부서져라 매달린 채로 안으며 왜 이제 왔느냐고, 엄마 잃은 어린이처럼 눈물을 찔끔 흘려대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어째서 고작 천에 대한 메모 조금, 무늬 그리기 조금, 사람 얼굴 그리기 조금 했을 뿐인데 이렇게 멀쩡히 말하고, 멀쩡한 눈빛을 한단 말인가. 어째서 사람을 이렇게 가지 말라 잡으며, 놀리며…….

“눈이 참 예뻐요.”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켜 눈꺼풀을 만지작거릴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예쁜 보석을 본 여자처럼. 히엘은 고개를 뒤로 빼면서 어르듯 말했다.

“광녀, 무슨 장난이야? 남자한테 그렇게 유혹하는 거 아냐.”

손으로 히엘의 눈꺼풀을 만질 수 없게 된 하리는 두 눈동자로 히엘을 만지며 태연히 물었다.

“유혹, 하면 안 되나요?”

미쳤군. 여전히 미쳐있어. 그러니까 그다지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 쿵쾅거리는 심장은 뭔지, 히엘은 기가 찼다. 그녀가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지 통 모를 일이었다. 유혹? 유혹을 하면 안 되느냐고? 미쳐서 하는 소리인지, 안 미친 채로 하는 소리인지, 미치지 않았다면 지금 대체 이 행동은, 이 유혹은……?

“하리, 대체 그 유혹이라는 말을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거야?”

하리는 고개를 세 번이나 끄덕였다. 그녀는 예전 니이새 둥지에서 히엘로부터 들었던 말, ‘여태 내게 셰일루티스를 쓰게 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얼마나 깜찍하신지.’에서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말을 떠올리며 따라했다.

“여태 저 좋으라고 마법을 써주신 분도 히에라지엘 님이 처음이었거든요. 얼마나 고맙고, 멋지신지…….”

“광녀, 지금 무슨 소릴….”

“조, 좋아해요.”

눈을 살포시 내리깔며 설익은 복숭아처럼 상큼한 목소리로 내뱉는 고백이었다. 히엘은 괜스레 주머니 속을 뒤지며 손수건을 찾았다. 또 쌍코피가 터질 것 같은 느낌에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조심해. 상대는 광녀야. 미쳐있다고. 이딴 식으로 가슴이 뛰어서 어쩌자는 거야! 히엘이 자신을 다스리면서 심호흡을 하려는데, 하리가 그 숨을 막아버렸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광녀로부터 받은 고백은 숱한 여자들이 보낸 은밀한 신호와는 차원이 다른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놀라움과 섬뜩함과 설렘이 아주 잘 섞여 있었다. 진짜 감정이 그 중 무엇이든 위험했다. 히엘은 주머니 속에 있던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그 좁은 곳에서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고, 더 이상 접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구겨버리다가 결론을 내렸다.

“아, 나도 물론 우리 에센 양 아니 하리, 하리를 엄청 좋아하지. 아무렴.”

자신은 그저 이 여자가 불안증에서 벗어날 때 까지 같이 있어주는 조건으로 가공간에 드나들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래, 임무는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 임무에 그녀의 정신을 원래대로 돌려두어야 한다는 사항은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그것을 해왔던 것은, 단순히 취미 생활…….

“히엘은 저 안 보고 싶으셨어요?”

다시 친근하게 애칭을 부르며 묻는 하리의 눈동자는 얼른 그렇다고 대답을 하라고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부담스러움에 히엘은 하리를 뿌리치듯, 뒤돌아섰다. 당장 천을 사러 가고 싶었다. 아니, 천이든 뭐든 얼른 사러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애당초 자신은 불편한 자리는 최대한 유들거리며 빨리 끝내고자 하는 성격이었다. 특히나 상대가 놀려먹기 재미있는 쪽이 아니라면 더욱 더. 그리고 지금 하리는, 자신이 놀려먹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듯했다.

오히려 놀리는 쪽은 하리였다. 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서 안 보고 싶었느냐고 묻는 건지, 이렇게 가까이 따라붙으며, 이렇게 망설임에 용기를 담은 목소리로.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제가 조금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과, 광녀.”

히엘은 살짝 고개만 뒤돌아 하리를 보았다.

“……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요. 매일 밤 기다렸어요. 그리고 저는 광녀가 아니에요. 이제 그렇게 불리기 싫어요.”

“제정신이란 거지?”

“저는 늘 제정신이었어요.”

“제 정신이면, 후.”

나, 뭔가 저지를 것만 같다고! 히엘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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