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25화 (25/123)

<-- 25 회 -->

노는 내내 그녀는 궁금했다. ‘예쁜 마법사 님’은 그날 왜 코피를 흘리셨을까. 바느질을 가르쳐달라고 하셨으면서 어째서 오시지 않는 걸까.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조금만 기다리라 해놓고서는 사람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드는 건 아닌지. 그녀는 히엘에게 섭섭했고,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다. 이 감옥 같은 곳에서 지내는 그녀에게, 히엘이 없는 일상이란 너무나도 쓸쓸하고 적막한 휴가일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전처럼 울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탁 트이고 아름다운 가공간이 그녀에게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다정하게 속삭여준 덕분이었다. 언덕 아래 호수는 온열마법이 자동으로 걸려있어서 밤마다 노란 기운을 따스하게 뿜어냈고,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주기적으로 마법의 폭죽도 터졌다. 뿐만 아니라 집안의 저장고에는 히엘이 챙겨두었던 음식들이 충분했다. 적어도 사람답게 사는 것에 지장은 없는 환경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저녁마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호수에서 달콤한 과자를 씹으며, 또 하늘의 폭죽을 감상하며 차분하게 히엘을 기다릴 수 있었다. 오직 히엘만을 기다리다보니,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이라던가, 황제, 사신으로 연상되는 단 한 사람의 모습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렇게 이레가 흘러갔다. 목욕을 하러 호수에 몸을 담근 하리의 머릿속은 온통 히엘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는 지금 이곳이 따스한 호수인지, 아니면 지독한 외로움의 나락인지 스스로도 너무나 헷갈렸다. 그리움에 지친 그녀는 결국 마침 자기의 앞에서 떠다니던 아기백조 한 마리를 품에 안고서 왈칵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흐아앙, 왜 안와, 왜! 히엘 뭐해요! 어디 갔어! 흑…… 흑흑.”

저장고에 있던 마른 빵, 육포, 과일, 식용수, 등이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새로운 영상이 들어오지 않은 마법영상구는 이미 쓸모없는 돌덩이인 채로 언덕을 나뒹굴었다. 더 이상 그녀가 가위질을 하고 놀 책들도 없었다. 광녀라 불리는 그녀는 자신이 미칠 것 같다는 자각이 있는 썩 괜찮은 미침을 또 한 번 겪을 조짐이었다. 그녀는 아기백조의 가느다란 목을 쓰다듬으며 ‘언젠가는 너를 구워먹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슬퍼했다.

그 우울한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그녀가 목욕을 마친 뒤 훌쩍이며 주황색 지붕 집으로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히엘이 있었다. 처음 보는 각종 천 더미를 정리하는 그를 보자마자, 하리는 다짜고짜 달려들어 그를 껴안았다.

“히엘!”

“으켁켁! 놓고 말해! 누구 목을 조르려고?”

“흑흑,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이제 오세요!”

“켁, 나 죽는다니까? 일단 진정하시고, 자자.”

히엘은 하리를 진정시키며 자신이 가져온 천 더미를 보여주었다.

“보이지? 저거 다 고르고 사오느라 내가 늦었지 뭐야.”

그는 하리와 거리를 두며 서서 천 가지들을 하나하나 꺼내 하리의 앞에 들이밀었다.

“좀 보라니까? 예쁘지? 잘 골랐지? 고급이란다. 이 정도면 앞으로 바느질 실컷 할 거야. 이런 것을 구하느라고 그동안 바빴다고.”

말을 하면서 히엘은 하리의 몸을 살폈다. 훌쩍이는 그녀의 얼굴은 일단 모른 체 하더라도, 그 외의 모습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혼자서 세탁을 하기라도 하는지 깨끗한 원피스, 가지런히 빗은 머리카락에, 구두를 제대로 신고 있는 발 까지, 누구도 그녀를 보며 광녀라고 여기진 못할 것이었다. 그는 씩 웃으며 계속 천 더미를 펼쳐보였다.

“이제 이런 걸로 나한테 뭔가를 가르쳐주기만 하면 돼. 아니, 그럴 필요도 없으려나? 하, 이거 참 직접 고른 수고가 아쉽네. 그래도 구경이나마 실컷 하라고.”

능청스러운 말이었지만 모두 거짓이었다. 사실 그 천들은 전부 시녀들이 사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히엘은 이레 동안 무얼 했던가. 이 난봉꾼 마법사는 황제가 출정을 하기 전부터 여러 업무로 인해 피로가 쌓여있어서 기본적인 사내의 욕구에 충실하지 못한 채로 지내왔다. 오죽하면 미친 여자를 보고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쌍코피가 다 났을까. 스스로를 딱하게 여긴 그는 애인들과 신나게 즐기며 젊은 혈기를 추슬렀고, 어찌나 재미가 좋았던지 허리가 다 뻐근할 지경이었다.

스트레스며 욕구를 제대로 풀고 온 미남자의 산뜻한 분위기와 목소리는 하리에게 한결 더 멋있게 다가왔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천 더미를 진지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눈빛이 심상찮아졌다. 히엘이 살짝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에센 양, 왜 그럴까요?”

“틀렸어요. 이건, 이건 바느질 할 수 없어요. 마음에 안 들어요.”

“응? 뭐가?”

“얇은 평직은 하나도 없고 죄다 이렇게 두껍고 올이 잘 풀리는, 그저 무늬만 예쁜 천들이잖아요. 이런 걸로 퀼트 못해요.”

도무지 퀼트에 관심이 없는 자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뭐가 되었든 지금 이 천들이 바느질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대충 알아들은 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천에 대해 짧은 설명을 하는 하리의 눈빛이 제법 흔들리지 않고 빛나서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발그레한 뺨과 적당히 오른 살도 보기가 좋았다.

“어어, 그래요, 에센 양? 그럼 얇은 평직, 뭐 그런 걸 구해와야겠네?”

“네.”

“그럼 우리 저기 책상에 앉아서 자세하게 좀 적어 볼까?”

“네.”

히엘은 하리를 책상에 앉히고 종이와 필기구를 준비해주었다.

“자, 여기 에센 양이 원하는 천에 대한 것을 상세히 적어두라고. 무늬라던가, 그런 것도.”

“네.”

하리가 부지런히 뭔가를 적고 그리는 동안, 히엘은 저장고를 확인하다가 당황하고 말았다.

‘참 잘 먹네. 이레 동안 다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닌데…… 살이 그냥 찐 게 아니었군.’

뿌듯함을 느낀 그는 부지런히 황궁 복도를 오가며 먹을 것을 채워두었다. 그런데 이레 만에 하는 광녀 뒤치다꺼리가 어째서인지…….

‘나 그냥 평민으로 살며 결혼이나 해야 할까봐. 왜 이런 짓이 재밌지? 애도 잘 키울 것 같군.’

강한 마력을 지닌 황족으로 태어나 대륙을 돌며 수련을 하다가 마활의 탑에 오른 뒤로 황제의 일을 수습하며 살아왔다. 제국의 일들과 지금 이렇게 한 여자를 돌보는 일은 같은 수습의 범위라 하더라도 차이점이 있었다. 평생 누군가를 위해 가공간을 만들고, 옷이며 식품 등 자질구레한 것들을 챙기며, 상대방의 기분이나 정신 상태를 유심히 살핀 적이 있었던가. 히엘은 하리 덕분에 평민들도 하기 어려운 일을 해본다며 피식 웃었다.

그가 주황색 지붕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리는 문소리도 듣지 못한 채 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히엘은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그녀에게 다가가 종이 위로 시선을 내렸다. 그제야 기척을 느낀 하리가 종이를 숨기려 했지만, 날랜 히엘이 종이를 들어 하리가 빼앗아가지 못하게 높게 들어버렸다.

“주세요! 잘못 적은 게 있단 말이에요!”

“흐음, 글쎄…… 난 더 구경하고 싶거든?”

자그마한 하리가 아무리 방방 뛰어올라도 훤칠한 히엘이 들고 다니는 종이를 빼앗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히엘은 하리를 놀리듯 느긋한 몸짓으로 종이를 올려다보았다. 어느 길드의 어떤 천이 좋다고 적힌 반듯한 글씨, 정교하고 섬세한 천의 무늬 그림들, 천들의 재질과 수량을 빽빽하게 설명한 부분 아래에는 시선을 끌어당기는 한 그림이 있었다.

“호오, 이거 나 그린 거야?”

하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도리질 쳤다. 하지만 부정은 무의미했다. 누가 보아도 히엘이라고 할 만한 얼굴이 떡하니 그려져 있었다.

“그게, 저기 그게!”

하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종이의 여백을 멍하니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려버린 히엘의 얼굴이었다. 그것을 히엘에게 바로 들켜버린 지금 이 상황, 그녀는 그저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히엘은 재미있다는 듯 그림을 살피다가 짓궂은 말투로 말했다.

“이렇게 잘 그리는데 누가 광녀라고 하겠어, 응?”

고개를 끄덕, 끄덕이며 동조하던 하리가 갑자기 그림을 돌려받을 방법을 생각하고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그것은 히엘을 간지럼 태우는 것이었다.

“윽! 나 겨드랑이 약하다고, 이봐!”

히엘은 상체를 움츠리며 팔을 살짝 내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하리가 폴짝 뛰어서 그 종이를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짧은 순간에도 히엘은 히죽거리며 팔을 뒤로 뻗어 그것을 못하게 막았고, 하리는 그만 중심을 못 잡고 히엘의 가슴에 상체를 댄 채로 바닥에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히엘이 엉덩방아를 찧었고, 하리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윽…… 광녀, 너무 과격하잖…… 어딜! 이 그림은 내가 갖고 있을 건데?”

히엘이 끝까지 종이를 주지 않자 하리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듯 그렁그렁해져서 간절히 애원했다.

“주세요, 얼른 주시란 말이에요. 흑…….”

“……!”

그녀가 울 거라 생각하지 못한 히엘은 잠시 동안 당황했다. 여태 광녀가 겁에 질려 울먹이는 것을 본 적은 있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야속한 감정과 수줍음이 섞인 묘한 얼굴로 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시선을 살짝 내리면 보이는 하얀 원피스 안 가슴골은 또 왜 이렇게 민망한지.

‘윽, 이런 가슴이라니…… 좋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