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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24화 (2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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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녀’가 말하는 ‘사신’이 동생임을 눈치 못 챈 히엘은, 하리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그분이 사신다’ 생각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 최고의 마법사인 자신이 미친 여자와 새벽에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실소가 나왔다. 사실 동생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업무가 없는 이런 시간에는 정신없이 여인들과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여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좋아하는 젊은 남자였고, 인기 많은 탕아였다. 제국 수도 아이얄의 아가씨들은 그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뺨을 붉혔고, 그와 단 한 번이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랐으며, 덕분에 그는 그 아가씨들 중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얼마든지 가벼운 만남을 편하게 즐길 수가 있었다. 포로 출신 여인에서부터 전직 마활 출신의 여인 디아세라까지 그의 여성편력에 신분과 인종이란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문제였고, 그런 자유로운 일상들이 그가 생각하는 인생 최고의 낙이었다.

벌레 하나도 죽이지 못하며, 파괴 스크롤을 만드는 것도 잔인하다 생각하는 여린 성정을 가진 남자. 웬만한 미녀보다 아름답다는 절색의 외모 탓에 제국의 공주라 놀림 받는 황형 히에라지엘의 실체가 그렇다는 것을 지금 이 광녀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살짝 따분하고 답답해하는 히엘의 속도 모른 채로 자기만의 공포에 사로잡혀 중얼거렸다.

“사신이랑 내가 무시무시한 계약을 맺고 말았거든…… 흐윽.”

“나, 참.”

그녀는 훌쩍이며 히엘을 바라보았다. 바느질을 가르쳐주지 못해 미안한지 초록색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줄줄 흘릴 것만 같이 일렁였다.

‘저러다 울겠네. 진짜 우네. 울 것 까진 없잖아.’

히엘의 갈색 눈동자가 하리의 초록색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마력정제에 전념하고 있는 기간에는 광녀를 보아도 여자로 봐지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넘치는 체력을 가진 지금, 어쩐지 광녀가 자꾸만 광녀가 아닌 ‘여자’로 보이고 있었다.

하리가 외쳤다.

“흐맛! 오빠 쌍코피 터진다! 흐익!”

애당초 보름간 금욕한 주제에 호수 물에 젖은 광녀의 몸을 본 것이 문제였어, 라는 생각과 함께 히엘은 급히 손수건을 찾았다.

***

용암도 얼어버릴 것 같은 가혹한 추위였다. 살카 부족의 요새는 붉은 깃발 하나를 바람에 스산하게 휘날리며, 먼 곳의 적들을 응시했다.

“불복하겠다…… 라, 뭘 믿고 저러는 건지 간이 크다고 할 수밖에는.”

사르제스 제국 최정예부대 ‘블랙유니콘’의 리더는 황제 대신 그렇게 이죽거렸다. 황제를 포함한 블랙유니콘의 전원이 궁금해 하고 있었다. 믿는 구석이라고는 살카령 빙반뿐인 인구 삼만 명의 자그마한 원시부족이, 대체 무슨 배짱으로 대제국에 붉은 깃발을 내밀며 불복의 신호를 보내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명해주십시오, 폐하.”

살카를 굴복시킬 방법에는 현재로썬 두 방법이 존재했다. 하나는 요새를 지지하는 빙반을 화염령 스크롤을 이용하여 녹여서 몰살을 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테스트 스크롤로 요새 중심에다 불덩이를 던져 겁만 살짝 주는 방식이었다. 블랙유니콘의 리더는 황제의 선택을 기다렸고, 붉은 깃발을 무감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황제는 손을 내밀어 짧게 말했다.

“테스트. 직접 하겠다.”

블랙유니콘의 리더는 자그마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활의 탑인 히엘이 그토록 테스트만 쓰라 주의를 주었던 것에 황제가 응해주니 다행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는 테스트 스크롤을 황제에게 내밀었고, 황제는 직접 주문을 외우는 것도 성가시다는 듯, 성검에 깃든 마력으로 스크롤을 긁어 성검어로 주문을 대신 외우게 했다. 그 표정에는 일을 간단하게, 그리고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만 담겨있을 뿐이었다. 성검이 검붉은 기를 뿜어내며 우웅- 울기 시작했다. 테스트 스크롤이 반쯤 읽혔다.

마병사들의 리더는 살카 다음 공격지인 레닌령으로 떠날 이동진을 생각하며 테스트 스크롤의 발동을 기다렸다. 이내 한줄기 강렬한 화염구가 살카족 거주지 중심에 자그마한 홀을 생성시키며 폭발음을 냈다. 이제 살카 부족은 제국에 겁을 잔뜩 먹었을 것이다. 블랙유니콘 부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폐하! 뒤를, 6시 방향에……!”

인구 삼만 명의 살카 부족이 사르제스 군에게 배짱을 부린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으윽!”

“아으으윽!”

황제가 뭐라 대꾸를 할 새도 없이 제국군 뒤에서 복병이 나타났다. 황제를 감싸는 다중보호막 밖으로 블랙유니콘 병사들의 피와 살점이 튀기 시작했다.

‘망할……!’

뒤돌아본 황제는 눈을 심하게 찌푸렸다. 공격자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새하얀 설원의 풍경이 거대하게 일그러져가는 것만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나타난 괴상한 존재는 퀘세드락으로, 마계 생물 도감에 아직 이름도 등재되지 않은 신종 몬스터였다.

[스으으으윽! 스파아아앗!]

“윽! 폐하! 녀석은 투명체입니다!”

“으윽!”

퀘세드락과 살카 족 간에 모종의 계약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원시부족이 제국에 불복할 수가 없었고, 마계생물이 제국군을 공격할 리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황제는 내부의 적부터 없애기로 했다.

“방향을 말한 녀석의 목을 쳐라.”

제국군의 등 뒤, 6시 방향에서 투명체로 추측되는 적을 발견한 자는 필시 아군이라 여길 수 없다 여긴 것이었다. 또 한 번 황제의 가시 같은 의심이 가지를 뻗기 시작했다. 최정예 마병사 부대인 블랙유니콘 마저 믿을 수 없다면 대체 누굴 믿어야 한단 말인가. 핀을 어금니를 꽉 깨물며 퀘세드락으로부터 거리를 넓혀갔다. 블랙유니콘의 리더가 외쳤다.

“호위를 제외하고 모두 흩어지도록!”

퀘세드락은 지름 300m에 달하는 납작한 원형으로, 그 색이 투명하여 보는 이들의 눈에는 그 형체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풍경이 일그러지는 현상으로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핀은 자신의 주위에서 최정예 병사들이 퀘세드락에게 삼켜져 아예 사라져버리거나, 칼로 벤 것처럼 반듯이 몸이 잘려 나가는 것을 보고는, 고민할 것 없이 소멸 스크롤을 쓰기로 했다.

“녹여라!”

그러자 블랙유니콘의 리더는 재빨리 테스트 스크롤이 아닌 진짜 화염령 스크롤을 꺼내 핀에게 내밀고, 병사들과 함께 핀을 엄호했다. 퀘세드락은 투명한 몸으로 전면의 풍경을 일그러뜨리며 점점 그들을 압박해왔다. 후방의 병사들이 보호막 하나 없이 죽어나갔다. 핀은 테스트 스크롤을 읽던 성검에게 중지할 것을 전한 뒤, 직접 자신의 마력어로 화염령 스크롤을 읽기 시작했다. 거대 투명 생물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스아아아아아! 스으으으으!]

[펑퍼퍼퍼퍼퍼펑!]

“레닌령 입구로 이동!”

전원 퇴각을 해야 할 때였다. 호위 병사들이 단체 이동진을 마력어로 생성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투 중 단체가 단시간에 이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대기 시간 동은 처참한 광경은 더욱 처참해졌다.

“크윽! 슈라허, 안 돼!”

“으윽, 윽!”

하위 마병사 하나가 제 동료의 몸이 반 토막이나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신음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건 사라지는 것이라 할 수 없었다. 단지 잘린 부위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황제는 발동중인 화염령 스크롤을 보호하며 주변을 살폈다. 자신을 엄호하는 고위 마병사들을 제외한 모든 마병사들이 그렇게 찢긴 듯이 몸의 일부, 혹은 몸의 전부가 사라져갔다.

‘저건 분명……!’

황제는 퀘세드락의 공격스타일을 그제야 파악해냈다. 언젠가 마계생물의 능력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다. 마력으로 차원을 주무를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은 바로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사물을 다른 차원으로 옮겨버리거나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퀘세드락은 블랙유니콘 부대를 같은 동공간 다중차원으로 이동시키거나 소멸시키는 중이었던 것이다.

“폐하! 스크롤도 사라집니다! 어서!”

“으윽!”

호위 병사들마저도 공격을 받기 시작했고 황제의 다중보호막 역시 군데군데 균열이 났다. 가장 강력한 황제의 보호막이 그 지경이 되자 이제 모두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도 황제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동진에 집중해라!”

하지만 그때, 황제와 블랙유니콘 전체를 레닌령으로 옮기려던 이동진 마저 퀘세드락의 공격을 받으며 그들이 서있던 빙반은 부서져버렸다.

그리고 사르제스 제국군은…….

***

그날, 하리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쌍코피가 터져버린 히엘은 ‘바느질에 필요한 여러 종류의 천들을 구해오겠다, 아주 많이 가져오겠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며칠 동안 가공간을 찾지 않았다.

하리는 마법영상구에 나오는 연극을 보며 서음이 나오는 책들을 가위질했다. 종잇장들은 기괴하거나 귀여운 종이인형이 되어 바닥을 어지럽혔다. 가위질 당한 채 펼쳐진 책들이 괴상한 서음을 내었고, 그 소리가 듣기 싫은 하리는 그 책을 덮어버린 뒤 다른 책을 열어 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법영상구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면 그 부분을 다시 뒤로 돌려서 구경하고 자신도 따라 웃었다. 아하하. 으하하. 호호호. 넋 나간 웃음이 쓸쓸하게 집안에 울려 퍼졌다. 무의미하게 웃던 그녀는 ‘저것도 연기냐’고 구시렁거리며 마법영상구를 꺼버렸다.

히엘이 만들어준 악기 그렐은 마법영상구처럼 유용하게 쓰였다. 하리는 그렐을 잡고 도레미파, 도레미파, 음을 내보다가 노래를 불러보며, 때로는 직접 멜로디도 만들어보았다. 지루한 놀이들이 이어졌다. 종이 인형으로 지저분해진 바닥에 비질을 하는 것도 놀이였고, 호숫가의 아기백조들을 괴롭히는 못된 짓도 놀이였다. 발광식물들이 밤을 밝힐 때 니이새 둥지로 가서 잠이 드는 것도 동화 같은 놀이였다. 드넓은 가공간 안에서 혼자 지내는 ‘광녀’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놀이로 생각하며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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