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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같은 그녀가 좀 더 신나게 놀 수 있도록 마법을 써볼까 생각한 그는 일단 로브로 몸을 칭칭 싸매며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바위에 걸터앉아 하리의 머리 위에 마법의 폭죽을 팡팡 터트려주고, 잔잔한 음악이 나오는 나팔꽃을 띄우고, 달도 평소보다 크게 보이도록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등, 간단한 저급의 마력들을 사용했다. 하리는 아기백조들의 날갯죽지를 고문하다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는 풍경을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콧노래를 부르며 물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발광(發光)수초를 뜯으러 돌아다니는 등 아이처럼 즐겼다.
검은 밤하늘, 포울룬디의 푸른 달, 온열 마법 효과를 받은 호수의 샛노란 기운, 그 차가움과 따뜻함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풍경에 폭죽 불꼬리가 색색의 색실이 흘러내리는 듯 호수로 떨어졌다. 꿈결 속 풍경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리는 생각했다. 그러한 분위기에 가없이 젖으니 잔인했던 지난 시간들이 뇌리에서 깨끗이 지워지는 듯했다. 천천히 눈을 감은 그녀가 입 꼬리를 올렸고, 그걸 보고 있던 히엘은 씁쓸하게 웃었다. 바쁜 업무 뒤에 찾아오는 상념의 시간이라도 시작된 걸까. 그녀를 향한 가엾음, 불쌍함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점령지의 모든 노예들이 운이 없이 제국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것과 같이, 황제의 사사로운 욕구에 휘말려 이곳에 오게 된 하리 또한 불운한 여인이었다. 그 불운함을 탓해야 할 것이었다. 히엘은 변방 부족의 정리가 끝나면 동생이 부디 저 여자를 자유롭게 놔주기를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법 폭죽이 깔끔히 지워졌다. 이제부터는 저 광녀에게 식사라도 시켜야 할 시간이었다. 아니, 꼭 뭔가를 먹여서 살을 찌워놓아야만 했다.
“어? 더 해줘요, 폭죽. 더 팡팡!”
“저녁 먹으러 가자. 이제 온열 마법도 끝이라 물이 식을 거야. 감기 걸릴래?”
“여기서 물고기 잡아 구워먹으면 안 돼요? 나, 나, 물고기 먹고 싶어요! 꼬치에 꿰어서 구워 먹으면……!”
사르제스 영토는 대륙 가운데 위치해있었고, 큰 강을 중심으로 번성한 수도 아이얄 외에는 생선 요리가 귀한 편이었다.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마법사들이 황제를 위해 무엇이든 하든 궁에서야 얼마든지 날생선, 염장생선, 건조생선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히엘은 비린 것을 싫어해서 그냥 자기 취향대로만 육류, 과일요리만 하리에게 주었었고, 그 탓에 하리는 생선이 먹고 싶어진 것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붉고 아름다운 꼬리를 살랑이며 노니는 관상어들을 보며 탐욕스러워 보일 정도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여운 히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무슨 야영 온 줄 아냐?”
“여어어기에서어, 야영 안 되나요?”
“광녀, 나 너무 피곤하게 만들지 마.”
“죄송합니…… 얏! 거기서, 잉어!”
하리는 통통한 잉어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잡으려다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히엘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봐, 여긴 진짜 공간이 아니라고. 그래서 그것도 진짜 물고기가 아니라서 맛이 없다고. 물가로 나와서 깨끗이 새 옷 갈아입으면 물고기 구워준다. 얼른 나와.”
“히잉…….”
그제야 하리는 아쉬운 표정으로 히엘의 손을 잡았다. 하늘하늘하던 하얀색 원피스가 물에 흠뻑 젖어 그녀의 몸에 쫙 달라붙었다. 순간, 속옷 없는 알몸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마법으로 예쁜 원피스를 구현하긴 했어도, 속옷과 같은 자그마한 것들을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히엘은 아차 싶었다. 만들어줬어야 했는데. 그러다가 한편으로는 ‘저 광녀는 어쩌면 미치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남자의 알몸을 보고서 ‘꺄아’하고 소리 지를 줄은 알면서 어떻게 지금처럼 자신의 알몸이 젖은 옷 아래로 그대로 드러나는데도 부끄러움 하나 없을 수가 있는지 신기했던 것이다. 히엘은 의식적으로 하리의 몸이 아닌 다른 데를 보려고 노력했고, 그러다 문득 스쳐가는 한 생각에 눈이 커졌다.
‘가만…… 그래! 하던 거 해보면 돌아올지도 몰라!’
히엘은 당장 언덕 집으로 돌아가서 하리에게 요깃거리를 챙겨준 뒤, 퀼트준비물들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뭐라도 꿰매고, 자르고, 만들고 하다보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 것이다.
어느새 그들은 호수가장자리까지 걸어갔다. 하리는 조금만 다리를 올리면 뭍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 갑자기 머뭇거리며 멈췄다. 앞서가던 히엘이 답답하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온.”
“그게…….”
“응?”
“여기 이거 좀…….”
“응? 어디?”
하리는 히엘의 손을 슬며시 끌며 자신의 뒤쪽을 좀 보라고 고갯짓을 했다. 할 수 없이 히엘은 슬쩍 고개를 빼 호수바닥에 뭐가 있나 봤다. 하리는 그때를 노리고 히엘을 그대로 잡아끌었다. 풍덩, 첨벙, 촤르륵! 기껏 닦고 건조시킨 뒤 셔츠에 바지에 로브까지 싸맨 히엘은 전부 다 젖어버렸다. 하리의 머릿속은 아직도 니이새 둥지에 누워 잠을 자던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히엘이 자신에게 홀딱 반했다 생각하며 그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장난도 봐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멋진 마법사 님, 함께 물놀이……. 꺄르르, 꺄르르……. 그런데 멋진 마법사는 사실 상당히 까칠한 성격의 마법사였다. 그의 입에서 거침없는 욕설이 나왔다.
“아! 이런 젠장, xx…….”
하리는 욕설을 하는 히엘을 악마 보듯 했다. 그 시무룩한, 그 상심한, 그 여린 눈빛에 히엘은 성격대로 그녀에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괜스레 뒷목을 긁으며 호수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너한테 한 욕 아냐. 나 넘어지게 한 돌한테 한 거야. 나아아아쁜 돌 같으니라고.”
“네…….”
“물놀이 계속 하고 싶어?”
“네…….”
이를 어쩐다? 그는 할 수 없이 꼼수를 부렸다. 그것은 바로 호수에 냉기마법을 덮어씌운 것이었다. 금세 차가워진 물에 하리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히엘은 그녀의 팔을 다시 잡고 호수 밖으로 끌었다. 다 젖어 떨고 있는 광녀는 어른의 몸을 하고 마치 갓 목욕을 마친 신생아 같았다. 히엘은 자신이 제국 최초의 황족 출신 보모라며 썩 유쾌하지는 않은 웃음을 키득거렸다.
“큭, 참 나…… 물놀이는 다음에 하고, 밥 먹어야지. 얼른 가자.”
“네…….”
그렇게 히엘은 하리를 언덕 집으로 데리고 가 건조마법을 걸어주고, 엉성한 디자인의 속옷도 대충 만들어 주고, 새 원피스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시종들의 눈치를 살펴 투명마법을 두른 뒤, 부지런히 복도를 오가며 그녀에게 생선 요리를 바치기도 했다. 언제까지 그녀에게 정화 마법만 걸어둘 수 없어서 양치질 하자고 하고, 욕실에 가둔 뒤 씻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한 차례 사소한 일들이 지나간 후였다.
“광녀, 아니지. 하리, 제대로 바느질 한 번 해볼까? 그 전에 내가 도구들을 잘 몰라서 그런데, 여기다가 좀 어떻게 생겼는지 그려줄 수 있겠어? 그대로 만들어줄 테니까 말이야.”
하리는 종이를 내미는 히엘을 빤히 보다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림 솜씨 하나는 괜찮은 편이었다. 그리는 족족 마법으로 도구들이 구현되었고, 신기하다는 탄성과 바늘이 바닥에 떨어져버렸다는 둥 사소한 소란, 수다들로 몇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자. 우리 광녀, 원피스 어깨 끈 올리고. 옳지. 이름이 뭐더라?”
“흐흐…… 하리 에센.”
“오, 아주 예쁜 이름이네? 에센 양은 퀼트, 바느질 쟁이야. 그치?”
“네.”
“퀼트 중에 뭐가 제일 만들기 쉬워? 보통 뭘 제일 처음 만들지?”
“어…… 나인 패치 핀쿠션요.”
“오호…… 라아. 나인, 나인, 나인…….”
나인 패치? 아홉 조각을 다 잘라야 한단 말이야? 귀찮은 히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나인 패치 너무 어려워 보이는데 원 패치는 어때?”
하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그럼 그거 만들자. 그거 궁금해. 오빠 바느질이 궁금해졌어. 바느질 흥미로워. 가르쳐 줄 거지?”
“아…….”
“응?”
“아…….”
하리는 황제가 멋대로 해놓고 간 약속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른 누구와도 ‘퀼트’하면 안 된다는 그 무시무시한 약속을 떠올리자, 히엘과 퀼트를 하는 것이 새삼 무서워진 것이었다.
“광녀, 또 왜 그래?”
가장 쉬운 바느질을 해보며 그녀의 상태를 바로잡아주고 싶었던 히엘은 또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멀쩡하게 바늘도 만들어 줘, 천도 대충 만들어 줘, 그런데 왜 안 하는 건지, 왜 통 시작을 안 하고 겁먹은 강아지처럼 가만히 있는 건지……. 인내심이 별로 없는 히엘이었지만, 광녀를 대할 때는 달랐다. 그는 최대한 웃어 보이며 살살 구슬려 보았다.
“에센 양. 내가 광녀라 불러서 삐친 거야? 아니면 아까 물놀이 하지말자해서 삐친 건 아니지? 지금 무슨 생각해? 아무튼 삐친 건 아니지? 내가 사실은 오늘 퀼트가 너무 하고 싶었거든! 응, 응. 자…… 한 번 가르쳐줘 볼까, 자세하게…….”
“어, 가르쳐주고 싶은 데요오…….”
“응응. 그럼 빨리 가르쳐, 얼른.”
“가르쳐주면, 계약이 파기 돼…….”
“무슨 계약?”
하리는 갑자기 가슴을 움켜잡으며 호흡이 곤란한 듯 겨우 말했다.
“사신이, 사신이랑 내가, 어떤 계약에 사로잡혀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