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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22화 (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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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 함께 살카 출정에 나설 최정예 부대 블랙유니콘의 병사들이 마활 탑의 최종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엘은 피곤함이 잔뜩 쌓여 좀비 같은 분위기로 귀 뒤를 긁다가, 병사들에게 말했다.

“화염령은 빙반이 녹으면 답이 없으니까 최악의 경우에만 사용하고, 어지간하면 피 보지 말고 곱게 해결해. 청괴석령 스크롤은 공기에 닿으면 안 되고, 식령은 열기 관리 잘하고, 용령 스크롤은 진짜 힘들게 만든 거야, 그러니까 아껴 쓰도록. 아, 또 그리고…….”

병사들은 말끝을 잠시 흐리는 히엘이 뭔가 중요한 사항이라도 더 말하려나 싶어 집중했다. 그러나 히엘이 하는 말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그저 과격한 성정으로 전쟁에 임하는 황제를 향한 염려의 농담일 뿐이었다.

“혹여 무모하신 어느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스크롤 남발을 하시려 한다면, 그대들이 곱게 기절시켜드리도록.”

병사들은 땀을 삐질 흘리며 당황했다.

“하하, 노, 농을…….”

“농이 아냐. 난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고…… 좋았어, 여기까지가 농담이라 해두지.”

“하하, 하…….”

히엘은 블랙유니콘 병사들의 리더를 따로 불러 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

모두가 무사하게 돌아왔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또한 이번 출정에서 황제가 스크롤을 절약한다면, 그것들은 훗날 다른 전투에서 유용하게 쓰일 것이었다. 또한 마활들의 일감을 덜어주기도 할 것이었다. 길게 이야기하다보니 어느 순간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이라던가, 제국을 걱정하는 마음이 아닌, 업무상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아 그는 잔소리를 중단했다.

“후. 그럼 이걸로 회의는 마치고, 난 출정식은 가지 않겠어. 수고해.”

변방 소부족민들을 치러 가는데 굳이 배웅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남아있는 정제마력으로 온 몸에 정화마법을 써버리고 침소로 갔다. 푹 잘 생각이었다.

***

한편 그 시각 핀은 혼자서 성검의 검기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검기는 전보다 짙어져 피처럼 붉은 색을 뿜어냈다. 사르제스 제국 다음으로 큰 나라였고, 그래서 정복하기도 힘들었던 티아센 왕국전에 임할 때에도, 성검이 지금과 같은 불길한 기운을 내뿜은 적이 없었다.

이것은 어쩌면, 흉흉한 사건을 미리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단지 변방의 소부족들을 정복하러 가는 것뿐인데 긴장감이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가이덴 신성보호막, 마활들의 다중, 다원소방어막, 직접 이끌고 갈 블랙유니콘 병사들의 호위 등으로 안전을 다졌지만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에 그는 눈에 난 칼자국을 손톱으로 찔러가며 이를 꽉 깨물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았지만 오늘처럼 평정을 잃은 적은 없었다.

무엇이 원인일까. 그는 문득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냈다. 붉은 머리카락, 풀잎처럼 맑은 눈동자, 겁먹은 얼굴, 그녀의 얼굴.

출정식 전에 한 번만 더 보고 싶어진 그는 가공간으로 향했다.

***

그 시각, 히엘은 블랙유니콘 병사들과 회의를 마치고 막 가공간에 도착을 했다. 가공간에 올 때 직접 걸어서 오는 핀과는 달리, 그는 마력이동을 이용하는 편이었다. 도착 지점은 잠에 들기 좋게 언제나 침대 위였으며, 때마침 하리는 어제 걸린 핑리스에 깊게 빠져 잠을 자고 있었다.

“광녀, 잘 자네? 나도 이제 잘 거예요.”

그런데 그가 침대 위로 이동해서 피곤에 지쳐 드러눕는 순간, 문이 열렸다. 방문자는 핀이었다. 형제는 서로를 보며 침묵을 했다. 각각 피곤함과 불안함을 담은 눈빛을 말없이 교환했다. 그러다가 동시에 말이 나왔다.

“잘 거야.”

“자지 마.”

또 한 번 정적이 감돌았다. 히엘은 출정식에 참가하기도 귀찮을 만큼 피곤했고, 핀은 그런 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마활 업무가 어디 쉬운 일인가. 형제는 다시 동시에 각자의 말을 했다.

“나는 이제 여기서 푹 잘 거야.”

“그럼 히엘은 다른 방에서 자.”

픽, 하고 웃는 소리가 나왔다. 동생의 반응이 우스운 히엘의 웃음소리였다. 그는 동생에게 자신이 왜 다른 방에서 자야 하느냐고 의뭉스럽게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자잘한 말싸움을 할 기운이 없어서 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곧바로, 며칠간의 출정을 앞두고서 감금시켜둔 여자에게 미묘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제 동생을 쫓아낼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광녀를 핑리스에서 깨어나게 한 뒤에 소란을 일으켜버리는 것은 어떨까. 히엘은 고민 않고 하리를 깨웠다. 잠에서 깨어난 하리는 핀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히엘의 뒤로 숨어버렸다.

“으어, 왜 또 와! 이건 꿈이야. 악몽…… 으악, 으히히히힉!”

하리의 중얼거림에 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새까만 경갑을 입은 채로 각종 마력보호막을 검게 두른 핀의 모습, 그가 차고 있는 핏빛의 검기를 뿜는 성검 등, 모든 모습이 그녀에겐 사신의 강림처럼 보였다. 핀은 결국 그녀에게 다가가려다가 멈추고, 히엘을 보았다. 눈빛이 무언의 부탁을 했다.

‘부탁해, 그 여자를.’

히엘은 다른 뜻으로 알아듣고 이죽거렸다.

“황제폐하, 졸려죽겠나이다. 저는 이 광녀에게 털 끝 하나 손대지 않을 것임을 미리 알려드리는 바, 부디 근심 아니, 안심 하소서!”

핀은 돌아서서 출정식에 참가하기 위해 본궁으로 갔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리는 온 몸이 뻐근한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떤 일이 일어났더라, 멍하니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히엘에게 가슴이 두근거린 뒤, 자기도 모르게 잠에 빠졌고, 깨어나니 황제라는 무시무시한 ‘사신’이 있었고, 그 충격으로 다시 잠에 빠졌다가 이렇게 깨어났다. 황제를 봤을 때만 해도 침대에 함께 누워 있어주던 예쁘게 생긴 마법사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창 밖 하늘에는 아름답게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지이?”

사실 히엘이 방해받지 않고 잠을 자고자 그녀에게 연속으로 핑리스를 걸어버렸고,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저린 탓에 짧게 앓는 소리를 내던 그녀는 기지개를 폈다. 그러다 심심해져 집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히엘, 히이에엘, 오오오빠아.”

히엘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그녀는 집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밤, 푸른 달 빛 아래 가공간은 어둡고 차가운 남색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언덕 아래 백조가 노니는 호수를 제외한 모든 풍경이 남색이었다. 하리는 호수에 시선이 머물렀다. 샛노랗고도 신비로운 느낌의 빛이 호수 주위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예쁘다, 예쁘다, 중얼거리며 꿀 찾으러 가는 나비처럼 그 밝은 곳을 향해 맨 발로 뛰기 시작했다.

“히엘, 히이에엘!”

다른 곳을 제외하고 호수에만 신비로운 빛이 감돈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히엘이 그곳 호수에다가 온열 마법을 걸어두고 느긋하게 몸을 녹이는 중이었던 것이다. 어딘가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히엘은 하리에게 핑리스를 좀 더 길게 걸어두었어야 한다고 후회를 하며 물속으로 깊게 몸을 숨겼다. 목만 수면위로 올리고서 저 쪽을 보니 하리가 맨발로 하얀 치마를 나풀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저렇게 보니 완전 광녀 그 자체잖아……, 미치겠군.”

하리는 용케도 히엘을 발견하고서는 자신도 같이 목욕을 하자는 듯 외쳤다.

“나도, 나도 하자!”

히엘은 거절했다.

“안 돼! 오지 마, 저리가, 광녀.”

“왜? 나 씻어야 해.”

하리는 자신이 툭하면 제국 최고의 마법사에게 정화마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오지 말라는 히엘의 말에도 그녀는 기어코 흰 원피스를 다 적시며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경쾌하게 첨벙이는 물소리에 신난 그녀의 기분이 녹아있었다.

“와! 따뜻해요! 좋다, 조아아!”

히엘은 그녀를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서 물 밖으로 나왔다. 푸른 달빛 아래 늘씬한 몸이 젖은 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히엘은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서 준비해둔 수건으로 몸을 닦기 시작했다. 알몸을 누군가에게 내보인다는 민망함 따위는 그에게 전혀 없었다. 어차피 상대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광녀라서 굳이 가리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는 문득 하리가 배곯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물어보았다.

“너 테이블 위에 둔 과일이랑 음식은 먹었……?”

“꺄아!”

호수에 정신이 팔려 히엘에겐 관심도 없던 하리가 뒤돌아보고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정말 못볼걸 봐서 나오는 비명이라기보다는, 누가 들어도 장난스러운 비명이었다. 히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 알몸인 걸 빤히 알고서 호수로 온 사람이 누구더라? 나는 오지 말라고 했었다, 분명!’ 그러한 말을 하려다 그냥 마법으로 물기를 깔끔히 제거하고 건조한 뒤, 셔츠와 바지를 갈아입었다. 하리는 비명을 지른 것이 무색하게 다시 호수의 뜨끈한 물을 즐기며 백조를 쫓아다녔다. 어미 백조보다 더욱 빠르게 빨빨거리며 떠다니는 아기백조들이 그녀가 손에 넣고 싶은 목표물이었다.

“아기야, 아기야아!”

호수바닥 아래 깔린 미끄러운 돌들에 걸려 첨벙거리면서도 끝까지 쫓아가는 꼴이 흡사……. 히엘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 키우면 이런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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