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회 -->
사르제스에 해가 지듯 어느새 가공간에도 해가 졌다. 히엘은 명상수면 후, 정제된 마력을 온 몸으로 충만하게 느끼며 눈을 떴다. 이대로 하리에게 수면마법을 걸어버리고 마활궁으로 돌아가서 마지막 스크롤 작업만 하면, 당분간 업무에서 해방될 것이다. 적어도 핀이 원정에서 돌아올 때 까지는 휴가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피로가 풀려 기분이 좋은 그는 산뜻한 목소리로 하리를 불렀다.
“우리 광녀, 밥은 먹고 노냐?”
하리는 집안에 없었다. 서음이 나오는 책들이며 마법 영상구라던가, 악기들이 죄다 실내에 있었지만, 하리만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히엘은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근처의 개울물에서 물고기를 잡는다던가, 가시나무를 뜯는다던가, 그런 놀이를 할 거란 생각에 집 주변 작은 숲을 뒤졌지만, 그녀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허…… 이것 봐라.”
히엘은 마활의 탑이었다. 큰 마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투시가늠마력으로 그녀의 위치를 찾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 가공간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기껏 정제한 마력을 마지막 작업만 남은 스크롤 제작에 쓰지 않고 그녀를 찾는 것에 쓰는 것은 직업 정신이 투철한 그에겐 꺼려지는 일이었다.
“어쩐다, 어쩐다…… 뭘 어째. 아아. 아아. 으흠.”
그는 목을 풀다가 곱상한 생김새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광녀! 어디서 뭐할까! 빨리 대답하면 오빠가 폭죽 크게 팡팡 터트려준다!”
날은 어두워져갔고, 히엘은 스산한 바람 소리와 풀숲을 헤쳐 다니는 곤충들의 날개 비비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도대체 그녀가 어디에 숨었기에 대답을 안 하는지,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재구성 당시 동굴이나 계곡 따위를 깊게 만들어둔 적은 없지만, 그래도 넓이가 어마어마해서 혹시라도 그녀가 집도 못 찾은 채로 헤맬지도 몰랐다. 가뜩이나 미쳐있는 여자가 또 겁을 먹고 상태가 이상해진다면 보람이고 뭐고 전부 사라질 것이었다.
투시가늠이라던가, 외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는 잠시 가공간을 떠나 자신의 처소에 들러서 비행파충류 한 마리를 어깨에 얹어 데리고 왔다. 궁의 복도를 지나오는 동안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투명마법을 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가 가져온 비행 파충류는 뱀의 얼굴에 부리가 달려있고, 검은 날개를 길게 늘어뜨린, 성인만한 크기의 생물체였다. 그것은 마계생물 셰일루티스로 히엘의 귀한 수집품 중 하나였다. 그는 셰일루티스를 하늘로 날려 보내며 종속어를 사용했다.
[자그마한 여자애 보면 바로 알리라고.]
셰일루티스는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펼치며 하늘로 날아갔다. 편하게 한다면야 하리를 발견하는 즉시 그대로 등에 업고 오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좀 겁이 많은 여자였던가. 히엘은 셰일루티스가 그녀의 위치를 알려줄 때 까지 느긋이 추가 수면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침대에 눕기가 무섭게, 셰일루티스로부터 그녀가 있는 장소가 종속어로 들려왔다.
“아, 괜히 가져왔잖아.”
하리는 그가 생각한 것 보다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녀는 먼 곳에 보이는 마을까지 바늘을 구하러 가는 것이 너무나 힘든 나머지, 중간에 포기했던 것이다.
“어디보자, 그 장소가……. 못 말리겠군. 니이새 둥지라니.”
니이새 둥지는 주황색 지붕 집의 뒤에 있는 숲에 만들어 둔 것이었다. 니이새라는 생물은 이빨이 나있는 부리로 갈대에 보푸라기를 일으켜, 그것으로 부드럽고 커다란 둥지를 만드는 습성이 있었다. 남방 지역에 있는 거대 조류의 둥지를 숲에 아늑하게 숨겨두는 것은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히엘의 취향에 적격이었던 것이다. 그는 하리가 아늑하고 편안한 곳을 용케도 찾아냈다고 생각하며 그곳으로 갔다.
하리는 아이보리색 갈대 보푸라기 둥지 위에 제 몸을 아기 새처럼 웅크리며 속편하게 자고 있었다. 히엘은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어놓고, 쿨쿨 잔다고 대답도 안 했겠다? 감히 귀한 수집품을 직접 가져와 쓰게 하다니. 그는 자고 있는 하리에게 쉬어버린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여태 내게 셰일루티스를 쓰게 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얼마나 깜찍하신지.”
그런데 그 말이, 자고 있던 하리에게 고백같이 들리고 있었다. 하리는 잠결에 히엘의 말 중 앞부분을 자기 마음대로 잘라먹어버리고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깜찍…….’ 이라는 부분만 인상적으로 새겨들었다. 굉장한 편집기술이었다. 미치긴 했지만 본래 하리 에센은 스물네 살의 낭만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아가씨였다. 낭만 소설의 문구들은 대략 빤했다. 날 이렇게 흔든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내 가슴을 뛰게 만든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이렇게 깜찍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등등등……. 히엘의 말도 그러한 낭만소설의 빤한 문구처럼 들렸고, 하리는 눈을 스르르 뜨며 얼굴을 붉혔다.
“히엘 님.”
“응? 님이라니?”
게다가 상대는 황제처럼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사신 같은 남자가 아닌, 천사였다. 자신의 구원자였다. 여자인 자신이 봐도 예쁘게 생겼으며, 그럼에도 목소리는 허스키하고 어딘지 반항아 같은 웃음을 짓지만, 또 행동만은 다감한, 매력 있는 구원자였다. 차분한 갈색 머리, 갈색 눈동자를 가진 큰 키의 미남 마법사였다. 하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괜스레 히엘을 보다가, 또 다시 딴 데로 시선을 돌리며 제 뺨을 식히려는 듯이 만져댔다. 누운 채로 어쩔 줄을 몰라 몸을 배배꼬기도 했다.
“어디 불편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광녀?”
그녀의 두근거리는 가슴을 모르는 히엘은 황당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조금도 의도하지 않았으나, 이제부터 그가 뱉는 모든 말들은 하리에게 낭만언어로 바뀌어 들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우리 광녀, 실컷 잤어?”(우리 예쁜이, 자는 모습도 예쁘네?)
“예쁘다니요. 저는 그냥, 평, 평범한…….”
“뭐라는 거야. 아무튼 일어나. 바늘이랑 만들어 줄게. 필요한 거 말해.”(어서 일어나, 네가 원하는 건 모두 만들어 바칠게.)
“고, 고맙습니다.”
“고맙긴. 네가 필요한 거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나뿐인데. 이게 내 일인데.”(네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뿐인데. 난 그런 남자니까.)
히엘은 주황색 지붕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간단히 바느질 수업에 필요한 자그마한 물건들 몇 개 만들어내고, 마활궁으로 가서 스크롤을 제작한 뒤, 진정한 잠다운 잠을 자는 게 오늘 하루 남은 시간 동안 그가 할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광녀가 느릿느릿, 머뭇머뭇, 오는 둥 마는 둥 늑장을 부리는 것이었다.
“이봐…… 뭐해? 안와?”
히엘은 본디 짜증이 심하고 참을성이 부족한 편이었다. 마력을 타고난 것이야 천운이지만, 그것을 배우는 것에 쏟아 부은 집중력과 인내력은 자기 자신도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런 그가 미쳐버린 아가씨의 느린 걸음을 참아내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얼른 쉬고 싶은 지금 몸 상태라면. 그녀의 사박사박 걷는 소리가 너무나 답답하여 가슴까지 답답해지자, 그는 결국 그녀에게로 다가가 손목을 붙잡았다. 하리는 그의 악력에 가슴이 쿵쿵 하고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으히힉!”
“빨리 좀 들어가자고.”(얼른 너와 실내에서 오붓하게 있고 싶어.)
하리의 눈이 커졌다. 히엘은 그 눈을 보지 못하고 그녀를 질질 끌며 집으로 향했다. 바람이 누군가의 가슴처럼 세차게 불었다. 꽃향기가 주황색 지붕 집을 중심으로 달콤하게 퍼졌다.
“허, 이렇게 손목을 꽉 잡으시면!”
고작 손목이 잡힌 것 하나로 남자의 박력을 느낀 하리는 부끄러웠다. 그것을 모르고 히엘은 바느질 도구들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바늘이랑 솜이랑 천이랑, 아, 근데 천은 그냥 어디 가서 대량 사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건 뭐 내가 알아서 하고, 그거 말고 또 뭐 필요해?”
말을 하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 히엘이 뒤돌아보았다. 하리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꼬고 달뜬 호흡을 뱉고 있었다. 가히 정신이 수상해 보이는 상태였다. 기껏 그녀를 정상의 상태로 만들어간다고 생각하던 히엘의 만족감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좀 이상해 보이는데 바늘 만들어 줘도 되나? 남의 몸에 꽂는 것도 모자라 제 몸에 꽂을 수도 있고…… 아직 만들어주면 안 되겠군.’
그는 하리의 손을 놓아주고선 손짓을 하며 집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착하지, 얼른 들어가, 얼른! 하리는 발그레한 뺨을 두 손바닥으로 비비며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뒤를 따라가던 히엘은 문득 그녀에게 일시적 냉기가 감도는 네레크(정화마법)을 걸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궁금해졌다. 그녀가 온전한 상태라면, 그 냉기를 감지할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네레크.]
무언의 주문을 외운 후 히엘은 하리에게 느낌을 물어보았다.
“광녀, 춥지?”
그러나 하리는 냉기를 느끼기는커녕 히엘을 보기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춥냐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배시시 웃기만 했다. 짧게 혀를 찬 히엘은 그녀를 침실로 보냈다.
“자자, 우리 광녀. 피부가 점점 사람피부로 되어가고 있어. 하지만 더 좋아져야 한다고. 그러니까 잠이 좋거든. 여자는 잠을 잘 자야 해요. 그리고 일단 일찍 자야 내일 멀쩡하게 뭐든 할 수 있다고.”
“네? 훗.”
[핑리스.]
두근거림에 빠진 하리는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의식단절마법을 받은 이상 이제부터 잠에 빠져들 것이었다. 히엘은 엎드린 하리의 몸을 제대로 눕힌 뒤, 이불을 덮어주고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마치 잠자는 공주에게 인사를 하듯 황실예법을 갖추며 중얼거렸다.
“용서해라. 오늘은 바빠서 어쩔 수가 없어. 하지만 내일부터는 신나게 놀아줄게.”
그는 그대로 마지막 스크롤 작업을 위해 마활궁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