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회 -->
“시, 싫어! 베개 안 해! 너한테 베개 따위는 다시는, 다시는 가르치지 않을 거야!”
“베개 말고 다른 거 준비해 놔. 쿠션이든 뭐든 가르치라고…… 그게 네가 여기 살아있는 이유야.”
거세게 경계심을 드러내는 하리에게 핀은 자기도 모르게 협박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의 서늘한 눈빛에 하리는 일순 움츠러들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업하지 않겠다는 외침을 한 것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흐응, 네에! 네! 근데 바늘 없다! 바늘 없는데에.”
바늘 없는데, 바늘 없는데, 나는 없는데……. 몇 번이나 반복된 말이 강박적으로 나왔다. 누가 보아도 제 정신이 아닌 여자였다. 하지만 핀의 눈에 그녀는 적어도 며칠 전 보다는 나은 상태였다. 길고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제법 차분히 묶여 있었고, 입고 있는 흰색 원피스도 때가 탄데 없이 깔끔했으며, 눈빛도 전보다 흔들리지 않았다. 몸이 마른 것은 여전하지만, 혈색이 발그레하게 돌아왔고 보는 사람에게 안도감을 주고 있었다. 비록 히엘이 마력정제 때문에 명상수면을 한다고 말대꾸도 해주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핀은 제 형을 하리의 곁에 두길 잘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점점 하리에게 다가갔다.
“어, 왜애…… 오지 마. 오지마세요. 진짜, 진짜 계속 오면…….”
핀의 그림자가 하리의 몸에 깔리자, 하리는 이제 황제가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그렐을 들고 그를 때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단지 생각뿐, 그녀는 황제에게 그런 폭력을 행할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황제를 때리는 상상만 하며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때려버릴 거야…….”
그녀가 아주 작은 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핀은 갑자기 그녀가 들고 있는 그렐을 잡고서 그녀의 품에 고이 안겨주었다. 마치 아까처럼 연주를 계속 하라는 듯, 그렇게 차분한 몸짓으로. 그리고는 식은땀을 흘리는 그녀의 이마를 차가운 손으로 닦아주며 그녀와 눈을 맞춰 바닥에 앉았다.
“아흐레, 아니 여드레 만에 다시 올 거야. 그러니까 수업 준비 해두라고.”
하리는 자신에게 수업을 시키는 못된 황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바느질 도구도 안 갖춰놓고 수업 준비를 하라고 하는 황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잔인한 짓을 해놓고서 원래 하던 일을 다시 하라고 시키는 황제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으으…… 손 치워. 치우란 말이야!”
“그리고.”
“…….”
“퀼트.”
“으응.”
“나와 해야 해.”
핀은 하리의 턱을 잡고 자신을 보도록 돌렸다. 호기심과 공포가 가득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핀은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듯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저 먼 산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작게 했다. 한 번 했던 말이 또 나왔다.
“나와 해야 해. 다른 누가 퀼트하자고 해도, 하면 안 돼. 대답해.”
그것은 마력정제를 위한 명상수면이 끝나고 나면 시간이 여유로워 미친 여자에게 이상한 짓을 하고도 남을 그 어떤 마법사에 대한, 자신도 모르는 견제의 말이었다. 형이라는 그 마법사는 원래부터 난봉꾼으로 유명하지 않았던가. 하리는 황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졌다.
“왜애? 퀼트 할 사람이나 불러주고 그런 말을 해.”
“명령이야.”
“그러니까, 바늘, 없는데…….”
“바늘 없어도 퀼트 하면 안 돼. 약속이나 해.”
“히끅! 어어…… 치이. 네. 안합니다.”
핀은 씩 웃으며 돌아섰고, 하리는 바늘 없어도 퀼트하면 안 된다는 이상한 말을 하는 황제를 미친놈 보듯 봤다. 그렇게 미친 여자와 미치게 만든 남자는 며칠 동안, 어쩌면 길어질 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의 이별을 앞두고 헤어졌다.
***
히엘은 스크롤 작업과 하리를 맡은 이후로, 머리를 누이기만 해도 잠에 금방 빠져들었다. 말이 잠이지 그가 눈을 감고 있는 일의 대부분은 효율적인 마력 운용을 위한 명상수면이라는 정신노동이었다.
그가 명상수면에 깊게 빠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욕실 문이 열렸다. 핀이 하리를 만나고 돌아오는 참이었다. 잠을 방해받은 히엘은 노곤히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고, 핀은 짧게 명령조로 말을 뱉었다.
“가.”
하리에게로 가보라는 의미였다. 달랑 그 말만 하고서 사냥을 나가는 동생의 뒤통수에다 대고 히엘은 무언의 욕지기를 뱉으며 발차기 시늉을 했다. 그 기척에 핀이 뒤돌아보았지만, 히엘은 요즘 허리가 안 좋다며 괜스레 딴청을 부렸다.
“형.”
난데없이 이름이 아닌 형이라 호칭하는 핀을 히엘은 무슨 일이냐는 듯 보았다.
“응?”
난봉꾼 형에게 가공간에 있는 미친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는 말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 고민하던 핀은 결국 포기하고 다른 말만 했다.
“…… 아무것도. 바늘이랑 천 같은 거, 저기에다 준비 해놔.”
“아하. 걔가 심심할 까봐 ‘퀼트’하라고 신경 써주는 거구나?”
히엘이 낄낄대자 핀은 대답 없이 사냥을 나갔다. 동생이 처음으로 바느질 선생의 존재를 인정한 듯해서 히엘은 피식 거리며 웃었다. 그의 몸 상태가 좋았다면 ‘이제야 퀼트가 뭔지 말씀 하시는 군’ 따위의 말을 하며 동생을 놀렸을 테지만, 그는 지금 새끼발가락 하나 꼼짝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그래서 가공간으로 순간이동을 하는 장소도 다른 곳이 아닌 침대로 설정해두었다.
“가서 실컷 잠이나 자볼까!”
마력이동을 한 그가 마주친 것은 침대에서 그렐을 끌어안고 이불을 둘둘 말고 있는 하리였다. 황제가 다녀간 후의 공포를 추스르고 있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히엘이 침대로 이동하자 커다란 눈을 빛내며 반색을 했다.
“히엘! 히엘 오빠!”
히엘은 그녀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손을 튕기며 퀭한 눈으로 웃었다.
“우리 광녀 잘 지냈니? 폐하께서 뭐라고 하시던?”
“수업준비 하래요.”
“아하. 수업? 바느질?”
“네에.”
히엘은 기지개를 펴다가 침대에 드러누워서는 하리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래. 그럼 오늘은 수업에 대한 생각을 좀 해보도록 해. 오빠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나가 있는 거다. 착하지?”
히엘은 졸음에 겨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썼다. 그러자 하리가 체구답지 않은 우악스러운 손놀림으로 이불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녀는 아까부터 한 가지 물건에 집착하고 있었다. 수업 준비.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이 있어야 했다. 바늘. 바늘. 바늘.
“바늘이 없는데!”
“뭐? 아하, 바늘. 바늘이라…….”
히엘은 평온한 명상수면을 위해 꼼수를 부리기로 했다.
“너 오늘 얌전히 굴면, 내가 가기 전에 바늘이랑 이것저것 다 준비해줄게. 이 오빠가 여기 와서 잠만 자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잠이 그냥 잠이 아니란다. 일종의 뭐랄까. 그래. 애국을 위한 중대 업무랄까. 그러니까 내 잠을 방해하면 안 돼요. 알겠냐, 광녀야?”
“네…….”
“그래. 착하네. 다시 이불 덮어.”
“네…….”
하리는 히엘의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주고는,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덕분에 히엘은 간만에 방해 없이 집중하겠다면서 명상 수면에 들어갔다.
하리는 히엘에게만은 고분고분했고, 겁을 먹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모든 것에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다 해주었다. 가공간을 재구성하던 사흘, 그리고 같이 있어준 오늘까지, 며칠 동안 그야말로 하리에게 천사나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운 마법 폭죽 팡팡 터트려주고, 악기도 만들어 주고, 씻기 싫어하면 정화마법을 걸어주고, 하늘하늘한 옷 가져와 입으라 하고, 신선한 재료로 만든 온갖 요리들도 갖다 바치는 그런 친절한 천사였다. 험한 일을 당한 그녀에게 예쁘게 생긴 마법사의 보호는 신의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히엘은 하리에게, 적어도 ‘핏빛 강철 검’ 보다는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히엘이 오는 것이 좋았다. 히엘이 잠을 자고 싶다고 하니 방해를 하기도 싫었다.
“좋아! 나는 나 혼자 할 수 있어!”
그녀는 히엘을 위해 바늘을 스스로 구하기로 했다. 중대 업무를 하며, 그래서 잠을 방해받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에게, 바늘 같은 자그마한 물건을 구해달라고 귀찮게 할 수는 없다고 뒤늦은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녀는 집에서 바구니를 찾아보았다. 마침 세탁 바구니가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을 들고 저 먼 곳, 설산을 응시했다. 설산을 감싸는 능선에 점점이 찍힌 집들이 보였다. 그 작은 마을이 자신을 상냥하게 부르고 있었다. 아가씨, 여기서 바느질 수업 준비 재료 사라고- 라며. 하리는 마음만 먹으면 설산 끝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히엘의 말을 기억해내고서, 결심했다.
“내가 사올게요! 바늘 내가 사온다!”
그녀는 자신을 유혹하는 마을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능선에 존재하는 마을은 그 모양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지, 실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은 진짜 공간이 아닌 마법가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주황색 지붕 집에서 멀어질수록 풍경들은 마치 물감으로 대충 칠한 엉성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 사실을 하리는 모르고 있었다. 모르지만 그래도 그녀는 당장은 달릴 수밖에 없었다. 피곤해하는 히엘을 위해. 혼자서 바늘을 구해내기 위해. 그녀의 하얀색 치마가 바람에 하늘하늘하게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