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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19화 (1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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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하리는 분명히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이불 속으로 더욱 깊게 파고들며 흐느꼈다.

“흐흑…… 그래. 다 네 탓이에요. 다 너 때문이에요.”

서서히 달이 기울었고, 고개를 숙인 핀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났다. 하리는 핀이 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 까지 이불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사르제스 제국군이 이번 기회에 가장 먼저 점령할 변방은 살카 령으로 선택되었다. 살카는 대륙에서 가장 혹독한 기후였다. 살카령 깊숙이 깔린 신비로운 얼음 암반이 그 기후의 원인인데, 사르제스 제국이 노리는 곳은 바로 그 얼음 암반을 소유함으로써 얻는 상업상의 이득이었다.

앞으로 변방 소국들이 가진 이점들을 차근차근 빼앗으며 마활을 재편성하고 황권을 더욱 견고히 다지는 것이 황제의 계획이었다. 마침 사르제스는 뜨거운 여름이었고, 핀은 혹독한 기후 속에서 맞이할 살카 전(戰)을 휴가처럼 여기겠다고 마음을 다스렸다.

거리상 대부대를 이끌고 가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황제가 직접 소수의 마병사 정예부대를 이끌어 포탈을 타고 이동할 예정이기에, 출정에서 귀환까지의 시간은 길어봐야 열흘 정도 걸릴 것이었다. 히엘이 스크롤 만드는 데 보름이나 걸린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핀은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다.

최근 마력성장을 받아 열 살이 된 핀의 셋째 아들이자 현 황태자인 티에리아는 살카 전에 참전하고 싶다고 간청을 했다. 겨우 열 살 된 아들이 그런 말을 진지하게 하자 핀은 그 패기를 칭찬한 뒤, 궁에 머무르라 단호하게 말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후계자를 데리고 험한 곳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도 황제와 황후는 황손을 보기 위한 의무적인 잠자리를 가졌다. 황제는 해야 할 일이 끝나면 매번 얼음장 같은 얼굴로 같은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해체된 가이덴 신성부대에 대한 잡음이 없도록 할 것이라는 경고, 그리고 어떠한 식으로든 셀바히트 관련 문제가 또 한 번 일어나면 그 책임은 황후의 부친인 가이덴 대주교에게 묻겠다는 협박, 등의 내용이었다. 그럴 때 마다 황후는 시체와 같은 얼굴로 기계적인 대답을 했다. 그녀는 점점 황제에게 질릴 만큼 질려갔다.

비록 기존에 치러왔던 규모가 큰 전쟁과는 다른 소규모 변방전이라고는 하나, 몇 개월만의 출정이었다. 준비가 완료되어갈수록, 전장의 혈풍을 미리 느끼기라도 했는지 황제의 성검이 검붉은 검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전에 없던 불길함이 핀을 괴롭혔다. 그동안 너무 쉬었던 탓일까.

열여덟 살 때부터 전쟁터를 전전해왔다. 요즘처럼 황궁 내에 오래도록 머무른 적이 없었다. 몸의 편안함은 살육을 해왔던 피폐한 정신과 물과 기름 같은 관계였고, 그래서 그는 이 불안정한 상태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일이 매일 아침마다 포탈을 타고 마력화산으로 사냥을 나가는 것이었다. 일종의 전쟁 전 준비 운동 같은 것이었다. 온갖 동물과 몬스터들이 들끓는 그곳에서 미친 듯이 몸을 풀고 나면 마음의 어중간한 불안함 따위는 금세 날아갈 수 있었다.

사냥을 나가기 전에 친형에게서 각종 방어마법을 받는 것은 필수였다. 그는 오늘도 하리를 돌보기 위해 욕실 가공간으로 ‘출근’ 하는 히엘을 보며 인사 대신 지시했다.

“둘러.”

각 분야의 모든 마력을 마스터한 히엘에게, 그 짧은 말은 모든 방어마법을 둘러달라는 의미였다. 각종 마법 스크롤 업무에 쫓기고 동생의 미쳐버린 바느질 선생까지 돌보느라 늘 피곤한 히엘은, 퀭한 눈으로 핀을 노려보다가 성의 없이 보호마법을 쳐주었다. 그리고는 짜증스럽게 걸으며 가공간이 있는 곳으로 가려 했다. 그때 갑자기 핀이 망설이며 물었다.

“잠깐.”

“뭐.”

“…… 걔는 좀 어때?”

“뭐가.”

“정신.”

“나야 모르지. 나도 거기서 마력정제 한다고 잠만 자니까. 궁금하면 네가 가보던가.”

그날 밤 하리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본 뒤로 핀은 그녀에게 가는 것을 꺼려왔다. 만나고 싶고, 다시 예전처럼 지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이 가둬둬야만 하는 현실을 자신도 외면하고 있었다. 괜스레 핑계가 나왔다.

“난 보다시피 바쁜…….”

“하긴 넌 바쁘지. 어머니께서 요즘 황손, 황손, 하시면서 아주 난리도 아니시더구나. 변방도 밀어야 해, 애도 낳아야 해, 아침마다 짐승 피로 샤워도 해야 해, 그래가지고 언제 걔랑 ‘퀼트’ 한 번 수 있겠냐?”

웃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다른 때 보다 더욱 독 오른 빈정거림이었다. 마력정제를 위한 명상수면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것이었고, 그것을 정신이 썩 온전치 않은 여자와 함께하며 동시에 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히엘은 하리와 지내는 시간들에 대한 불편함을 동생에게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명상수면을 위해 눈 좀 붙이려 하면 하리는 매번 폭죽을 안 터트려 주냐고 천진난만하게 물어댔다. 마음 약한 마법사는 난감해하면서도 곧잘 장시간의 마법 폭죽을 터뜨려주었다. 그렇게 하리의 정신을 다른 데 돌린 뒤 본격적으로 명상수면에 집중을 좀 하겠구나 싶으면 하리는 또 히엘을 방해했다. 히엘은 예뻐요, 히엘의 얼굴에는 꽃이 어울려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의 머리카락에 온갖 들꽃을 다 꽂아놓았다. 결국 히엘은 그녀가 차라리 다른 것을 가지고 놀라고 현악기 그렐을 만들어 주었다. 그녀가 몇 시간동안 악기를 튕겨대며 잘 놀자 히엘은 안심하고 소음차단 마법을 쓴 뒤 명상수면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따끔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하리가 히엘의 몸을 핀쿠션 삼아 가시나무가지를 꽂아대고 있었다. 히엘은 처음으로 하리에게 화를 내었고, 하리는 눈물콧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히엘은 미친 여자에게 화를 내버린 자신이 미웠다. 괜스레 우는 그녀에게 미안해서 ‘왜 그런 무서운 짓을 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때 그녀의 대답은 이러했다. ‘핀시가 생각나서요’. 핀시가 뭔지 모르는 히엘은 그저 하리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그분’이 사신다 생각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그렇게 하리에게 시달리면서도 스크롤 제작을 위한 마력정제며 각종 업무들을 해온 히엘이었다. 스스로도 자신이 대견할 지경이었다.

“뭐, 아무튼…… 내일이면 스크롤은 다 완성이야. 살카부터 친다며? 내일 바로 출정해도 될 거다.”

“빠르군. 보름은 있어야 한다더니.”

“엄살이었다. 피곤했으니까.”

“생각보다 쉬워지겠어.”

“그래. 그러니까 서둘러서 그 계집애 상대 얼른 네가…….”

그러나 히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핀은 욕실 문을 열어 가공간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일 당장 출정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전에 하리의 얼굴이라도 보고 떠나려 하는 것이었다. 히엘은 피식 웃으며 핀의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잠을 자도 개운치 못한 몸, 기다란 사지가 느슨히 늘어뜨려졌다.

“근데, 네 얼굴 보면 정신 더 나갈 텐데.”

***

하리가 머무는 가공간, 그 언덕으로 왔지만 정작 핀은 망설이고 있었다. 괜스레 밝은 햇빛 아래 풍경을 살피면서, 저 주황색 지붕 집으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 중이었다.

날씨는 사르제스의 뜨거운 여름과 다른 초봄의 포근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솜뭉치 같은 꽃씨는 바람에 느린 춤을 추듯 휘날렸고, 백조들은 우아하게 호수 위를 노닐었다. 진하고 달콤한 들꽃 향기가 코를 간질였고, 잔디와 풀숲에서는 곤충들이 뛰는 소리가 바스락거렸으며, 구름은 가장 멀리 보이는 설산 저 멀리까지 그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엄청난 규모와 세밀함을 자랑하는 공간이었다. 대륙 인간들 중 최고의 마력을 가진 히엘은 그 배려심도 최고였다. 시체와 폐쇄공간에 미친 사람에게 지금 이만한 풍경처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핀은 처음부터 히엘에게 가공간의 창조를 맡겨야 했다고 후회를 했다. 히엘 정도의 마력자라면 자신이 창조한 가공간 안에 이중성력을 숨긴 첩자가 들어왔는지 파악하는 것도 쉬웠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리가 첩자인지 아닌지, 처음부터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겔사 사건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리와 자신도…….

어느덧 핀은 주황색 지붕 집 앞에서 허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제와 모든 것을 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그렇지만 왜 포기할 수 없는 걸까. 어째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괴에 핀이 걸음을 돌리려 할 때였다.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잡았다. 노랫소리였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그대가 그리운 날, 많은 별을…….”

집 뒤편에서 그녀는 막 그렐을 튕기며 노래를 시작하고 있었다. 핀은 곧바로 그곳으로 걸어갔다. 각종 보호마법을 둘러 온 몸이 안개와 같은 것에 휩싸여있고, 검은 색조의 경갑을 입은 그의 모습은 하리에게 겁을 주기에 충분했다.

“…… 흐끅!”

딸꾹질 소리였다. 핀이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자 그녀는 그렐을 무기처럼 손에 쥐며 그를 경계했다. 핀은 자기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바느질 안 해?”

“흐끅! 아…… 안 해요. 바늘 없다.”

“그럼 하루 종일 뭐해?”

“히엘 오빠 자는 거 구경해.”

하리에게로 향하던 핀의 걸음이 뚝 멈췄다. 궁에서는 듣기 힘든 어떤 단어(오빠)가 그의 심기를 묘하게 건드린 탓이었다. 그러나 하리는 핀이 다가오지 않아 마냥 좋기만 했다.

“에센. 나는 곧 어디를 좀 갈 거야. 하지만 최대한 빨리 올 테니까, 수업 준비 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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