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회 -->
히엘은 동생이 마활들과 황제의 통신 수단인 필기르의 깃털 대신 이렇게 또 직접 얼굴을 마주하려는 것을 보니 가공간 관련 일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앞일을 생각하기만 해도 피곤하고 짜증이 나는 그는, 어깨를 으쓱 들어 보이며 또 무슨 일이냐는 듯 무언으로 물었다.
핀은 딱 하루 동안 고민했던 말을 뱉었다.
“거기로 좀 가줘.”
“뭐? 또 왜? 나 바쁘다. 네가 벌인 일 추스르느라.”
“왜 히엘이 해?”
“그럼 내가 하지, 죽상하고 앉아있는 노인네들 시키겠냐?”
“그러라고 있는 마활들인데.”
“하여간 속 편한 소리하네. 근데 왜 거기로 가라는 건데? 더 구성시켜야 할 것 있나? 나 이제부터 마력 최단 시간에 효과적으로 쓰려고 폼 잡아야 한다. 너 그게 뭔지도 까먹었지? 칼질하느라 바빠서 마력 정제가 뭔지도…….”
“걔가 사람이 필요하대.”
“뭐?”
“명상수면은 거기 가서 해도 되잖아. 부탁이야.”
동생에게서 듣는 두 번째 ‘부탁’이라는 말에 히엘은 별 일 다보겠다는 표정을 했다. 솔직한 말이 나왔다.
“귀찮은데.”
“부탁이라고 했어.”
핀이라고 히엘에게 하리를 맡겨두는 것이 그리 편하진 않았다. 형이 은밀한 공간을 재구성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퀼트가 뭔지 알아버린 형의 그 시시덕거리는 표정이 불편했고, 형이 바느질 선생을 사람몰골로 만들면서 어떤 것을 캐물었을까, 생각만 할수록 찝찝했다. 거기다 형은 제국 최고의 바람둥이로 알려져서 여자를 곱게 내버려둘 위인도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형과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핀에게는 불편한 일이었다. 그러나 비록 좀 불편하긴 해도 황족이고, 형제이며, 얼마든지 가공간을 주무를 수 있는 마법사였다. 그런 히엘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었다.
“귀찮아도 해. 히엘 밖에 돌봐줄 사람이 없어.”
돌보다? 히엘의 미간에 가느다란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미 자신은 퀼트가 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은 동생이 그 여자를 섹스 노리개라 둘러대지 않았던가. 스크롤 제작을 떠맡아 짜증나는 판국에 노리개상대도 같이 하라니, 황제라지만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녀석이라 생각하며 히엘은 속을 숨기지 않고 내질렀다.
“망할…… 내가 마활 탑이나 되어서 고작 미친 여자애 말동무나 하며 살아야겠냐? 스크롤만 생각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그러니까 부탁한다고 했잖아.”
“하! 너, 걔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데?”
“필요한 사람.”
“필요해서 그렇게 방치해놨냐?”
“죽이기 싫어.”
“죽이지 마. 풀어줘. 그럼 되잖아.”
“그건 안 돼.”
“왜?”
“안 돼.”
“하, 나 참.”
히엘은 이죽거리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전 대륙을 통일한 거나 마찬 가지인 제국 황제가 되어서 바느질하는 남자라고 만천하에 알려지는 것이 두렵냐고, 알려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이 너 할 일만 잘하면 괜찮다고,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놀려대면 이 융통성 없고 자존심만 센 동생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결국 히엘은 동생을 떠보기 위한 가장 간단한 수를 생각해보았다. 제국 최고의 마법사에게 가공간을 재구성시키면서 까지 죽이지 않는 여자라, 노리개가 아닌 정말로 좋아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토록 바느질이라는 것이 중요했나. 같은 남자인 이상 대답은 추측이 되지만, 그럼에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냥 물어보면 대답이 순순히 나올 것 같지 않아 재미없을 것이다. 히엘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핀을 떠보았다.
“뭐, 가줄게. 거기.”
“잘 생각했어.”
고맙다가 아닌 잘 생각했다는 말에 히엘이 피식 웃었다.
“핀, 근데 말이야?”
“……?”
“나도 걔랑 ‘퀼트’해도 되냐? 그럼?”
히엘은 대답의 기로에 선 동생의 표정을 신나게 감상했다.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핀은 무표정하게 히엘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히엘은 알 수 있었다. 동요 없어 보이는 동생의 머릿속이 실은 유치한 고민으로 얼룩져있다는 것을.
“아, 나도 걔랑 퀼트해도 되냐고.”
“…….”
핀의 조각 같은 볼이 살짝 씰룩였다. 이를 꽉 깨무는 것일까. 히엘은 동생이 귀여웠다. 그 귀염둥이를 한 번 더 휘젓고 싶어졌다.
“더 살 찌워놓으면 퀼트하기 딱 좋겠더란 말이….”
“안 돼.”
“안 돼애?”
“두 번 말 안 해.”
허어- 오우- 안 돼? 입모양으로만 벙끗거리는 장난이 나왔다. 그런 히엘의 모든 태도에는 이미 퀼트가 섹스가 아닌 바느질이란 걸 안 눈치가 배어 있었다.
핀은 형이 얄미웠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둘러댈 말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솔직하게 터놓고서, ‘그녀는 내 바느질 선생이니 이상한 짓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감히 황제의 사람에게 손을 대느냐’고 화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핀은 히엘에게 아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히엘이 눈치껏 하리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았으면 했으며, 이렇게 속이 빤히 보이는 장난은 그만 두길 바랐다.
“내가 필요해서 둔 사람이지, 히엘이 필요한 사람은 아니니까.”
“오우. 어련하시겠어.”
“…….”
히엘이 원한 것은 동생의 침묵이 아니었다. 하리를 죽이기 싫고 필요한 사람이라 하는 애매모호한 말을 듣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자기 마음을 시원하게 내지른 적 없는 동생이 이럴 때 나마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었으면 했다. 그런 반응이 히엘에게는 가장 맛있는 먹이였다.
“너, 은근 자극시켜.”
“……?”
“그렇게 돌처럼 있으면 내가 막 어쩔 줄을 모르겠거든.”
“무슨 말이야?”
“너한테 짜증이 좀 나고 괴롭히고 싶어진다, 뭐 이런 말씀이야.”
“아, 보상이라면 섭섭하지 않게 할게. 휴가와 마력분화구 소유권…….”
“틀렸어. 관둬. 언제나 네가 저지르고 나면 난 그 뒤처리지. 그런 문제쯤은 저지른 사람이 해결해도 될 건데 말이지. 아무튼 뭐, 그 아가씨가 불쌍하니 시키는 대로 할게. 황제 폐하께서 무려 부탁이라 말씀하시는데, 내가 어찌 거절을 하겠어? 간다.”
히엘은 핀에게 냉소를 보내며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핀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동안 사르제스 제국은 숱한 전쟁을 치러왔고, 그때마다 영광의 승리를 이뤄왔다. 하지만 얼마 전에 일어난 겔사 사건 등 전쟁 후유증이라 할 수 있는 크고 작은 문제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그럴 때 마다 히엘은 마활의 탑이라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왔다. 싫은 소리를 해대면서도 누구보다 바쁘게 일해 온 형이란 걸 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히엘이 방금과 같이 뒤처리를 운운하며 짜증을 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마디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저지른 사람이 해결하라니.’
자신을 뭔가 저지른 사람, 죄인처럼 대하는 히엘의 말은 혼란을 가져왔다. 겔사균을 옮긴 자는 핀에게 있어, 아들을 죽게 만든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자신이 황제가 아닌 평범한 아버지였어도 그 자를 찾아내어 도륙을 내었을 것이다. 숨기 좋은 곳에 머물러있는 정체가 불분명한 여자 셋을 의심한 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마활들이 그렇게나 수색을 해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었고, 결국 의심의 가닥이 마법가공간까지 미치는 것은 그 상황에서라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핀은 둘째 아들의 가이덴 성전에 겔사균을 옮긴 자가 하리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겔사균을 옮긴 첩자라는 게 밝혀지면 망설임 없이 다시 성검을 뽑아 죽일 수도 있었다. 다만 아직까지 확신이 없을 뿐이었다. 증거가 없을 뿐이었다.
다만, 그 의심과 동등한 크기로 그녀를 어쩌지 못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가진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은 왜 그녀를 죽이지 못했을까. 처음부터 그 쓰임이 다 하면 죽이려 했던 여자고, 그대로 가공간에 내버려둔 채 외면할 수도 있었다. 어째서 그녀를 다시 찾은 걸까. 그녀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형에게 아쉬운 말들을 들어가며 그녀를 신경 쓰는 걸까. 이미 미쳐버린 그녀를.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그녀와의 관계를.
수십, 수백 가지로 뻗어나가는 복잡한 마음에 허우적거리며 핀은 어느새 하리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한 걸음씩 걸을수록 혼란은 사라져갔다. 주황색 지붕 집의 문을 열 무렵, 뇌리에는 온통 하리를 보고 싶다는 단순하고도 순수한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핀이 온 줄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무언가로부터 몸을 보호하듯 이불을 둘둘 말고서 태아처럼 웅크린 채였다. 핀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길어버린 머리카락을 만지고, 파리한 볼을 쓰다듬으며, 기다란 속눈썹에 눈을 맞춘 채로, 한참을 앉아있었다. 색색 뱉어내는 숨소리, 한기를 느낀 듯 이따금 움츠러드는 몸, 그런 모습에 측은함이 밀려온 탓일까. 핀은 어느 샌가 그녀를 안을 듯 가까이 다가가다가 멈춰버렸다.
‘미친 짓이야.’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가던 때와 달리, 그는 끔찍한 것을 피하는 사람처럼 자리에서 재빠르게 일어났다. 거칠게 이불이 쓸렸고, 그 소리에 하리가 잠에서 깨어나버렸다. 눈을 뜨자마자 구석으로 파고들며 이불을 덮어쓰는 그녀의 모습, 그녀의 두려움을 느껴버린 핀은 다시 혼란을 느꼈다.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의 이불을 빼앗아버리고 싶었다. 어째서 네가 나를 두려워하느냐고, 정말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며, 마음속에 담아둔 하리에 대한 의심을 내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큼 다른 감정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늘 그랬듯, 단 한 사람에게라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고 싶었다. 피 냄새를 뒤집어쓴 살육마가 되는 것을 원한 적 없었다. 아들의 죽음으로 분노에 눈이 먼 미치광이가 되고자 한 적도 없었다. 어째서 운명은 이리도 멋대로인 걸까. 어째서 인간은 이다지도 불안정한 존재일까. 핀은 한탄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죄책감의 흔적을 내뱉고 말았다.
“전부, 내 탓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