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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17화 (1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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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는 곧바로 창틀 아래로 주저앉아 귀를 막아버렸다. 핀은 창틀을 뛰어넘어 실내로 들어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몸을 웅크리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다, 포기했다. 하리는 그의 옆에 닿기도 싫다는 듯 더욱 몸을 웅크린 채로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음. 많이 놀랐지? 그동안.”

하리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떨고만 있었다.

“좀 복잡한, 그런 게 있었어.”

“모, 몰라. 싫어. 싫어요.”

“앞으로 내가 좀 많이 바쁠 거야. 그렇게 됐어. 베개, 만들어야 하는데…….”

하리는 뒤통수를 묵직한 뭔가에 맞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핀을 보았다. 베개? 베개에 대해 생각해보고, 옛 친구가 벨 베개를 만들어보자고 했더니, 옛 친구를 그냥 ‘베지’ 않았던가. 그날, 감정 하나 없이 엔에게 눈 감으라 말하고 검을 휘두르던 핀의 모습이 떠오른 하리는 그만 소름이 돋고 말았다. 핀이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쳤고,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서 인간다움은 조금도 읽지 못한 하리는 시선을 외면했다. 그녀는 베개 따위, 아플리케 따위, 절대로 황제에게 가르쳐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가르쳐줄 수 없을 만큼 그가 두려웠다.

“못 만들 것 같아.”

하리는 핀이 한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바쁘니까. 보름 아니, 길게는 몇 달 수업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넌…….”

그러니까 넌? 수업을 못한다면 바느질 선생의 미래는 정해진 것 아닌가? 예정되었던 ‘죽음’으로? 하리는 울음을 터뜨릴 듯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핀이 하던 말을 이어서 했다.

“어떻게 하고 싶어?”

“…… 네? 응? 뭐?”

“궁 밖으로 나가는 건 안 돼. 여기, 이 공간에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이 안에서라면 뭐든지 하게 해줄게. 다시 수업 할 수 있는 날 까지.”

“수업…… 뭔 소리…… 왜 나…… 안 죽여요?”

“살려준다고 했잖아. 평생 여기서 살라고 했잖아.”

분명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었다. 하리가 만든 작품을 보고, 안 죽일 테니 평생 죽음의 방에서 살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 말을 지키기 위해 하리를 살려둔 것은 아니었다. 시한부 삶을 살던 첫사랑도 단칼에 죽였는데, 바느질 선생으로 데려온 여자를 죽이지 못할 이유가 대체 뭘까. 마지막 수업 때 그녀를 의식하며 가슴이 두근거린 탓을 해야 할까? 그러기에는 그녀를 방치한 시간동안 단 한 번도 그녀를 생각하지 않은 점이 자기 스스로도 이상했다.

모호한 감정을 담은 검은 눈동자가 가련한 여인을 보며 저도 모르는 저의 진실을 알고자 했다. 하리 역시 핀의 표정을 한참이나 살폈다.

“그렇게 보지 말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하고 싶은 게 뭔지, 말해봐.”

하리는 황제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몰랐다. 어두운 표정의 황제는 바느질 선생이라는 존재를 외부에 알리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다 못해, 아예 가공간 속에서 매장을 시킬 셈이었다. 좋다. 여기서 평생을 보내야 한다면, 하고 싶은 것 다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하리는 머릿속으로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정렬시켰다. 하지만 미친 그녀였기에 제대로 정렬을 시킬 수가 없었다.

“많아요. 되게 많은데. 나, 하고 싶은 거… 되게 많은데, 나중에 말하면 안 되나. 지금 생각나는 게…….”

“…….”

“사람이 필요해요. 아무도 안 죽을 수 있는 사람, 안 죽어도 되는 사람, 그런 사람.”

지난 시간동안 갇혀 죽을 거라는 불안감에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던가. 옛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이미 죽음의 방에 갇힌 순간부터 포기했다. 그저 엔과 세라비, 그녀들이 보고 싶었다. 언제나 개구지고 쾌활한 모습으로 자신을 놀리고, 안심시키고, 두근거리는 가슴에 대해 수다떨어주고, 노래를 가르쳐 준, 그 여인들이 필요했다. 다시 살려내라고 핀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한 말이, 사람이 고프다는 말이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서 죄책감을 느낀 걸까. 핀은 하리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갈게.”

“어, 어, 사람은, 대답은요?”

“원하는 대로 해줄게. 사람, 줄게.”

떠나는 핀의 뒷모습을 보며 하리가 목구멍까지 솟아오르는 말을 삼켰다. 분명 삼켰는데. 그녀는 삼켰다고 생각했지만.

“…… 너 같은 사람 말고요.”

핀은 걸음을 멈춘 채 돌조각처럼 굳었다. 하리는 제 입에서 나온 말을 뒤늦게야 자각하고 자신도 크게 놀랐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다 나온 말은 황제의 자조였다.

“그래. 나도, 나 같은 사람은 싫으니까.”

***

히엘은 불편한 자리에 참석하면 유들거리며 최대한 빨리 끝내고자 하는 습성이 있었다. 상대가 놀려먹기 재미있는 쪽이 아니라면 더욱 더 그러했다. 그는 눈앞에 있는 동료들에게 조금 과장스럽게 웃어보였다. 제국의 공주라 놀림 받는 미색을 가진 그였기에, 그 미소는 보는 이가 남성이라 하더라도 껌뻑 넘어갈 만 했다. 그러나 청회색 로브를 입은 두 명의 마활들은 전부 나이가 지긋이 든 자들이었다. 그들은 꿈쩍도 않고 유감을 티내며 어색한 분위기만 만들었다. 이런 자리가 불편한 히엘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 귀찮아. 이 짓도.’

그래도 본론에 들어가기 위해선 운을 떼야 했다.

“바쁘신데 이렇게 소집령을 내려서 유감스럽고 죄송합니다만, 하하. 뭐, 아무튼 마활에 내려진 임무이니 회의며 확인을 하고 뭐 그래야 보고도 올릴 수 있고, 흠, 그럼…….”

그의 저자세는 황형과 마활의 탑으로서 황제의 패정에 대한 흠을 가려주기 위한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물론 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저 까칠하고 음습한 부류의 노인들을 어르고 달래줄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란 생각에 나온 행동이었다.

“폐하께서 마활을 추가 편성 하신다 합니다. 앞으로 동료가 더 생기니까, 우리가 좀 더 편해질 것 같아요. 하하. 그쵸?”

노인들은 불편한 표정으로 수염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히엘은 그들을 기껏 달래준다는 말이 마활 재편성에 대한 것이라 스스로도 폭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아마 자신이 노인들이었어도 ‘뭐? 동료가 더 생겨? 그래놓고 어린놈의 황제새끼 지 마음에 안 들면 또 성검으로 찔러죽일 거면서 뭐 하러 재편성해?’ 라고 빈정거릴 달램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은가. 중요한 건 이딴 쓸 데 없는 말들이 아닌 본론이었다. 이제는 대륙 가장자리를 정리하기 위한 임무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음…… 말이죠. 폐하께서는 빠른 시일 내에 밀어버리길 원하시지만, 작은 부족민들 상대로 광역 스크롤 만드는 건 공들께서도 나름 성가신 일일 테고, 그렇잖아요? 그러니 편한 게 편하니까, 제가 남아도는 게 또 시간과 젊음 아닙니까…….”

노인들은 다음 말을 기다렸고, 히엘은 후-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어르고 달래기의 결정타를 날렸다. 억지스러운 산뜻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스크롤은 전부 제가 맡겠습니다. 폐하께 올리는 보고에는 각자의 몫으로 해두겠지만, 일단 그렇게 알아두시라는 겁니다. 어떠십니까?”

한 마디로 어렵고 힘든 일은 자신이 다 할 테니 동생을 너무 미워말라는 뜻이었다. 황제가 마활 동료들에게 성검을 휘두른 사건으로 자존심이 다치고 정신이 다친 노인들은 일감을 덜어준다는 히엘의 말에 그제야 ‘아, 뭐, 그러실 필요는’, 등등의 말을 하며 황형을 치사했다. 히엘은 본론이 깔끔히 이야기 되었으니 서로 불편한 시간은 여기서 파하자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어지간하면 폐하께 재소집 되지 않는 날들을 다시 기약하며, 이거 진짜 제가 바라는 거거든요. 저도 성검에 찔릴까봐 무서워요. 아무튼, 평안하시길.”

제 살을 깎아 먹는 농담에 노인들이 그제야 너털웃음을 지었다. 만약 이 상황을 핀이 본다면 충신의 맹약에 묶여있는 자들에게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고 히엘을 한심하다 여길 것이지만, 인간관계가 어디 그렇게 칼처럼 딱딱 끊어지던가. 동생이 대륙의 피바람이라면 자신은 그 피비린내를 씻겨줄 훈풍이 되어야한다고 선황이 늘 말하곤 했었다. 꼭 선황이 말하지 않았어도 가뜩이나 침몰해가는 동생의 명성이 최악으로 치 닫을까, 히엘은 두려웠다. 싫고 미운 놈이라 해도 동생은 동생인 것이었다.

이것으로 히엘의 첫 번째 업무는 끝이 났다. 다음 일은 원시 부족민들을 덜 아프게 무찔러줄 스크롤을 고안하는 것이었다. 마력에 어두운 핀은 스크롤 정도는 사흘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속편한 소리를 했고, 히엘은 사흘 되게 좋아한다며 적어도 보름간은 전쟁준비나 열심히 하라 대꾸해두었다.

사실 히엘의 실력으로 대륙 가장자리에 옹기종기 아담하게 모여 사는 부족민들을 휩쓸 스크롤을 제작하는 것은 사흘이 아닌 하루만으로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광역 화염스크롤이라던가 암반 붕괴 스크롤 등 인간들을 몰살시키는 잔인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결집력도 약한 소수 부족민들 대부분은 정복 후에 사르제스 제국으로 노예가 되어 끌려올 것이었다. 이왕 스크롤을 제작해야한다면 그런 무식한 파괴 보다 각 소수 부족들이 모시는 신앙적 존재를 정령으로 구현해내 부드럽게 복종을 유도 하는 것이 히엘의 성향이었다. 거슬리는 족족 몰살시키고 소멸시켜버리는 핀의 타입과는 확실히 정 반대였다.

“레닌족들은 청괴석령, 화부족들은 용령, 하를은 식령, 아, 용령이 젤 까다로운데…… 이거 제작하려면 용의 비늘 필요한데. 흠……. 드래곤 형씨가 좀 도도하냔 말이지. 그치? 그래도 좀 구해와. 먹고 사는 게 이렇게 힘들다. 레실.”

“존명!”

히엘의 충복이자 제자인 레실은 예를 갖춰 답하며 그대로 황궁 포탈을 이용해 스크롤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러 떠났다. 눈치 좋은 다른 조수들은 히엘이 중얼거린 시점부터 각 정령구현 스크롤에 필요한 기초 작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언제나 그렇게 자연스럽게 히엘을 보조했다. 지시 없이는 숨조차도 눈치 보며 쉬는 황제의 사람들이랑은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히엘은 마력 정제를 위해 명상수면을 할 테니 반나절 동안 나라가 부서져도 잠을 깨우지 말라 종들에게 농담조로 일러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침소로 향했다.

침소에는 핀이 기다리고 있었다.

‘썩을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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