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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15화 (1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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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엘이 가공간을 재구성하는 동안 핀은 태후로부터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그 부탁이란 후계의 여지를 더 두라는 것이었다. 황태자를 노리는 사건이 또 한 번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고, 이제 핀에게 남은 자식이라고는 티에리아 하나뿐이었다. 때문에 태후는 황녀가 나오든, 황자가 나오든, 어쨌든 또 하나의 황손이 나와야 할 거라며 핀에게 의무감을 지어줬다.

황후 리이라는 연달아 일어난 아들들의 불행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추모기간이라 황궁의 모든 꽃들이 생기마법을 받지 못하고 시든 상태였는데, 그녀 또한 그 꽃들과 같이 시르죽은 꼴이었다. 만사에 지친 것은 핀도 마찬가지였고 그들의 밤은 차가운 날붙이가 시든 꽃을 잘라버리는 것처럼 무정하며 피폐했다.

핀은 해가 뜨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리이라에게 냉정하게 지시했다.

“그대 부친에게 일러두시오. 이중성력자, 얼른 찾는 게 좋을 거라고. 가이덴 부대 입궁식 전후에 계획된 일이었을 테니 그대들에게도 책임이 있어. 폐황족으로 살아가긴 싫겠지? 곧 태중에 또 황손을 품게 될 거라고 책임에서 비켜갈 수 있을 거란 안일한 생각은 관두는 게 좋아.”

원래부터 애정이 없는 사이였긴 하나, 이런 때에 아내를 몰아갈 만큼 비정한 남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핀은 겔사균을 옮긴 것이 가이덴 성전이란 것이 밝혀진 순간부터 가이덴 대주교의 딸인 리이라에게 날선 경계를 세우고 있었다. 서글픔과 모욕감에 참을 수 없는 그녀는, 핀이 떠나고 나서도 한참을 울었다.

***

“헉…… 으욱, 욱!”

히엘은 온몸의 마력을 가공간의 투시에 사용하다가 토기가 올라와 중단하고 말았다. 그는 사르제스의 마활 탑이라는 중요 임무를 지고 있었지만 엄연히 황족이었고, 때문에 실제 전투에는 단 한 번도 참여한 적 없었다. 그간 해왔던 업무 또한 전투에 필요한 파괴마법 스크롤 제작이 전부였었다. 그런 그에게 가공간의 목이 나뒹구는 시체, 썩어가는 핏자국으로 얼룩진 광경은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과연 자신이 이 역겨운 가공간의 재구성에 성공해낼까, 장담할 수 없는 그는 연거푸 심호흡을 하다가 결국에는 욕지기를 내뱉었다.

“제기랄, 재구성이 아니라 투시가늠에만 사흘 다 쓰게 생겼네.”

창문이 열리고 엽궐련의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골치 아프고 답답한 듯 연기를 깊게 내쉬다가, 침대 쪽으로 고개를 슬쩍 돌려보았다. 이불 속에는 깡마르고 불쌍한 여자가 파묻혀 있었다. 곧바로 여자의 수면마법을 파훼하고 퀼트가 섹스 맞느냐 묻고 싶었지만, 정신이 이상해보이니 미뤄두기로 했다. 그가 지금 당장 투시하고 싶은 것은, 욕실 안 가공간이 아닌 황궁 서고의 단어사전들이었다.

‘아, 대체 퀼트가 뭐냐고.’

궁금해죽을 노릇이었다. 동생의 약점을 가지고 어릴 적처럼 놀리는 짓궂은 상상을 해본 히엘은 다 피운 엽궐련을 허공에 던져 소멸시킨 뒤, 하리를 향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이내 씁쓸하게 변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저렇게 미치게 되었을까. 자신도 그 공간이 끔찍하고 토기가 밀려오는데 거기서 지냈던 저 여자는 대체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지간히도 운이 없는 여자였다. 엽궐련 세 개가 더 탔다. 그후 마음을 독하게 먹은 히엘은 두 시간 만에 가공간 전부를 투시가늠 해냈다. 이제 마력으로 재구성을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문득 기억에 남는 가공간의 풍경들이 그의 호기심을 끌었다. 디딤돌이 있는 정원, 연한 풀색과 상아색으로 범벅이 된 방의 색조, 레이스 커튼, 연갈색 목재 가구들, 티팟 세트, 패브릭 롤들, 바느질 바구니, 흔들의자 두 개, 테이블, 가을 풍경의 오두막, 현악기, 곡물 포대와 예쁜 접시들, 다양한 종류의 차들, 책장 등, 아무리 보아도 평범한 가정집들이었다. 추측컨대 어쩌면 동생 녀석은 황궁과는 다른, 평범한 평민의 집을 바랐던 것일 지도 몰랐다.

‘근데 그게 숨길 일이냔 말이지.’

가공간의 본격적인 재구성에 들어가기 전에 히엘은 간단히 식사를 하면서 황궁 서고의 사전들을 투시가늠 해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퀼트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퀼트- 누비 또는 퀼트(quilt)는 이불이나 쿠션 등에 누비질을 하여 무늬를 두드러지게 만든 것을 말한다. 천과 천 사이에 깃털, 양모, 솜 같은 부드러운 심을 채워 넣어 만든다.]

“하아? 이 자식 봐라? 아니, 퀼트하는 여자랑 하는 게 취미인가? 도대체 뭐야?”

평민 집 치고는 필요 이상으로 많고 다양한 종류의 패브릭 롤이 굴러다니는 것이 처음부터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다. 동생이 욕실에 가공간까지 구성해놓고서 하려 했던 것이 바느질이란 것을 알아버린 그는 황당함을 넘어서 조금 짜증이 났다. 황제 본인의 취미로 만든 공간의 사소하고도 구질구질한 뒤처리를 제국 최고의 마법사에게 맡기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대마법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히엘은 일단 하리부터 깨웠다.

“이봐, 눈 좀 떠보라고.”

정신을 차린 하리는 테이블에 있는 케이크를 보고 구역질을 했다. 가공간에 갇혀 있는 동안 퍼먹고 산 것이 밀가루와 설탕 같은 것들뿐이라 케이크만 보아도 역한 것이었다. 히엘은 하리에게 먹을 것을 주려다 포기하고, 그녀의 거친 심호흡을 따라하면서 느리게, 천천히 바꾸며 진정을 유도했다.

“쉬이, 후우, 그래. 놀랄 거 없다고.”

하리는 히엘을 빤히도 바라보았다. 황형의 얼굴은 황제와 비슷하긴 하나, 좀 더 연한 갈색 머리에 눈매며 입매가 황제보다 부드러웠다. 그녀는 점점 경계심을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몸을 드러내놓는 것은 숙녀로서 아주 음, 뭐 나는 좋지만.”

히엘은 그녀의 몸에 둘둘 말려있던 린넨천이 흘러내리자 그것을 다시 올려주려 했다. 그 행동에 하리가 다시 겁먹은 눈동자를 하며 몸을 떨었다. 미쳐도 나를 남자로 보긴 보는구나, 그렇다면 몸을 더 가려야 할 텐데, 어이없고 귀찮아진 히엘은 아예 린넨 천을 들고 하리의 목 위로 아기 턱받이 두르듯 꽁꽁 싸매버렸다. 그제야 그는 흡족한 듯 웃었다.

“자, 자. 아가씨. 난 아가씨를 괴롭히지 않아. 진정하고……, 아가씨, 바느질하는 사람이야?”

하리는 대답대신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침대 밖으로 튀어나와 테이블에 놓인 과일들을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히엘은 과일을 그렇게 게걸스럽기 해치우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다른 시체들이 썩은 상태로 보아 그녀가 갇힌 기간은 약 보름 쯤, 그간 신선한 음식은 구경도 못 했을 것이다. 대략 추측한 히엘은 가장 큰 열매 하나를 하리에게 쥐어준 뒤, 다시 침대 안으로 그녀를 밀어 넣었다.

“여기 있으면 더 줄게. 기다려. 가만히 있어? 그래야 더 먹을 수 있으니까?”

그는 하리에게 그대로 투명 마법을 두른 뒤 시종에게 과일을 더 가져오라 지시했다. 투명마법을 두른 하리는 히엘의 말대로 얌전히 있었다. 황제의 침소에서 과일을 가져오라 말하는 황형을 시종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보았으나, 금세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마자 히엘은 하리에게 걸린 투명마법을 풀어주고 엽궐련 하나를 더 태우기 시작했다.

“욱, 꾸욱, 큽.”

“천천히 먹으라고.”

하리는 과일을 미친 듯이 삼켜댔다. 정화마법을 받은 상태라 지저분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히엘은 하리가 바느질을 하건 섹스를 하건 살부터 찌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실컷 먹어. 먹으면서 내 말에 고개 끄덕끄덕 하기만 하면 돼. 알겠어?”

하리는 과일껍질을 까느라 온 손톱에 붉은 물이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히엘은 피식 웃으며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퀼트 했어?”

끄덕. 우물.

“황제폐하랑 바느질 한 거야?”

끄덕끄덕. 우물우물.

“정말 바느질만 했어?”

끄덕, 끄덕, 끄덕. 그러다 하리가 초록색 눈을 히엘의 갈색 눈에 정확히 마주하며 침을 꿀꺽 삼키고 조용히 말했다.

“바느질 하고, 끝나면 나를 죽이려 했고, 바느질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두근거렸는데, 갑자기 오더니, 자기 친구도 죽이고, 가뒀어. 밥도 안 주고, 나중에는 물도 안 나왔어. 원래부터 나를 죽일 작정이었던 거야. 나를 죽일…….”

히엘은 피식 웃으며 저 혼자만의 음탕한 농담을 내뱉었다.

“어떤 방식으로 ‘죽였다’는 건지, 참.”

“검은 연기 나는 검이 막, 흐흐흑…… 엔이랑 세라비도 흑…… 핀시도, 흐흐흑…….”

그날의 잔인한 기억들이 떠오른 하리는 눈물을 굵게 쏟았다. 흐느끼는 소리가 커지자 히엘은 이제 소음차단 마법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재구성에 쓸 마력을 충전해야 할 시간인데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었다. 히엘은 하리의 울음을 멈추어주려 방법을 생각했다. 마력 있다는 게 좋은 게 뭔가. 그는 실내에 어둠을 깐 뒤, 허공의 여기저기에 사람 손바닥만 한 작은 불꽃을 허상으로 빵빵 터뜨려주었다. 흡사 걸음마 쟁이 아이를 달래는 것과 같은 솜씨였으나, 하리에겐 먹혀들었다. 허상 폭죽이 터지는 어둠 속, 그녀의 불안하게 떨리던 눈동자가 불꽃을 쫓으며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과일향기가 나는 입술이 반쯤 벌어지며 얼빠지고도 순진무구한 표정이 되었다. 그것을 뚫어져라 본 히엘이 씩 웃으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질문했다.

“황제 폐하 바느질 잘 하셔?”

“어, 잘 해. 사람 죽이는 것만큼 잘해.”

“정말, 정말, 바느질만 했어?”

“어, 바느질 하고 사람 죽이고, 아…… 더 터트려줘.”

“응. 더 크게 터트려 줄게. 자. 어때, 예쁘지?”

“우어…… 예쁘다. 슬프고, 예쁘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께서 너한테, 그리고 네가 말하는 여자들한테, 죽이는 거 말고 ‘나쁜 짓’은 안 하셨어?”

하리에겐 매우 이상한 질문이었다. 이유를 말해주지 않고 죽이는 짓 말고 더 나쁜 짓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하리는 히엘의 괴상한 질문에 나름의 대답을 해주었다.

“응…… 바느질 다 가르치고 나면 죽인 댔어. 더 크게 터트려 줘.”

“그래. 그래. 과일 다 먹으면 폭죽 더 터트려 줄게.”

그러자 하리는 손에 들고 있던 과일이며, 쟁반에 놓인 과일 전부를 껍질도 까지 않고 그대로 삼키기 시작했다.

“그러다 체한다고. 어이, 이봐. 미치겠네.”

[핑리스.]

결국 히엘은 하리의 의식을 단절시켰다. 이제부터는 가공간의 재구성을 위해 마력을 써야할 때였다.

‘나 참, 귀엽게 놀았네. 뭐? 섹스? 웃기고 있어, 진짜. 하여간 하는 짓은 나이를 속일 수 없다니까. 어린 자식.’

히엘은 솔직하지 못하고 자신을 가리는데 급급한 동생을 비웃으며 재구성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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