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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라지엘 델 사르제스 혹은 히엘. 그는 올해 스물다섯 살의 황형으로, 드래곤 바로 아래의 강한 마력을 가졌다고 소문이 난 마법사였다. 그 마력 크기 덕분에 사르제스의 마활 탑이기도 했고, 제국의 공주라 불리는 곱상한 미모도 가지고 있었다. 유약하고 벌레 하나 제대로 죽이지 못한 성정에 황제를 선택하는 성검은 그를 황제로 뽑지 않았고, 그 덕분에 늘 황형, 마활 탑의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물론 그런 까닭으로 동생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고, 그래서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법 수련을 한다는 핑계로 궁에 있지 않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제국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겔사 사건 때 자신이 소속된 사르제스의 마활 동료 두 명이 황제의 성검에 죽어버린 것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편없는 녀석, 그저 다 죽이기만 하면 능사인줄 알지. 어째서 성검은 그딴 녀석을 황제로 뽑은 거야! 건방지게 나를 오라, 가라 하다니!’
붉은 카펫을 걸어가는 히엘의 청회색 로브자락이 신경질적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시종들이 황제의 침소 문을 열었고, 히엘은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한 손을 까딱 움직여 문을 닫으라 지시했다. 돌문이 닫히는 육중한 소리가 났고, 히엘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핀의 앞으로 다가가 테이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핀의 차분한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탁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이젠 나까지 쥐어짤 생각이냐?”
겔사 사건으로 핀이 마활 소속 마법사를 두 명이나 죽인 것에 대한 빈정거림이었다. 그 태도에 황제를 대하는 예의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핀은 그런 빈정거림에 대답은커녕 갑자기 욕실 문을 열어보였다. 그 안을 본 히엘의 눈이 한순간 휘둥그레졌다. 그러다 곧 한껏 찌푸려졌다. 욕실 안에 있는 한 여인의 괴상한 모습 때문이었다. 하리였다.
히엘이 오기 전, 핀은 하리를 씻기려다 그녀가 너무나 거세게 반항하자 포기를 했다. 그녀의 온 몸은 젖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가슴 자락 까지 오는 붉은 머리카락은 마구 흩트려져 있었으며, 지저분한 옷 대신 얇은 린넨천을 걸치는 둥 마는 둥, 그 맨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눈동자엔 겁이 가득했으나, 입매는 웃고 있으며, 불규칙한 호흡을 내뱉는 그 녀에게, 핀은 린넨천을 다시 제대로 둘러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핀의 손을 세게 쳐버리고 욕실 저 안쪽으로 숨어들어갔다. 히엘은 그녀의 모습이 흡사 학대를 당한 새끼 여우와 같다고 생각했다.
핀은 욕실 문을 살짝 닫은 뒤, 히엘과 마주앉았다. 히엘은 당황스러운 나머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저건 뭔데?”
한참 침묵을 지키던 핀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욕실안 가공간에서 빼내온 사람인데, 지금 거기가 좀 지저분해.”
“뭐? 그래서?”
“재구성시켜줘. 저 여자가 겁먹지 않을 그런 공간으로.”
“내가 건축가에 정신질환자 고쳐주는 사람인줄 아나보지?”
“부탁해.”
난생 처음 형에게 부탁이라는 말을 써보는 핀이었다. 일순간 히엘의 얼굴에 심술궂은 웃음이 스쳐지나갔다. 언제나 제 형을 그저 성검의 선택을 받지 못한 불운한 낙오자, 부리기 좋은 고위 마법사쯤으로만 대하던 핀이 갑자기 저자세를 하며 조급한 부탁을 하는 것에, 히엘은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다. 그의 표정에 심술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확실히 황후로는 변태적 욕구를 충족시킬 순 없었겠지. 암. 가이덴 대주교의 딸을 대상으로 저렇게 학대를 해선 안 되니까.”
황후 외에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핀이란 걸 알면서도 히엘은 그런 말을 던져댔다. 다분히 조롱을 넘어선, 시비라도 걸어 싸움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다. 그러나 핀은 화를 내지 않았다.
“부탁…… 한다고, 히엘.”
핀이 알고 있는 히엘은 표독스러운 말을 잘하긴 하나 그 표독함을 오직 말로만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실제 성격은 핀보다 섬세했고, 사람을 아꼈으며, 우유부단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잔정도 많았다. 같은 체구를 가졌으나 핀의 외모가 좀 더 남성적이라면, 히엘은 그 성격처럼 선이 고운 청순한 미색을 갖추어 제국의 공주라 불리기도 했는데, 히엘의 거친 말투는 자신의 그런 별명을 의식하여 나온 버릇이었다.
핀은 수많은 마법사들 중, 히엘을 가공간을 재구성하기에 가장 적절한 자라고 여겼다. 이미 가공간을 창조했던 마법사는 지하 감옥에서 겔사 사건 때 처형당하고 없었다. 핀에게는 자신의 비밀을 지킬만한 안전한 마법사가 필요했고, 친형이자 마활 탑인 히엘은 그런 점에서 최고의 존재였던 것이다.
“제국민들은 알고 있나 몰라? 황제 폐하께서 이토록 소름끼치는 취향을 가지고 계시는지 말이지.”
연달아 동생을 욕실에 여자를 가둬두고 겁탈하는 변태로 모는 형에게, 핀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런 거 아냐.”
그러다 그는 갑자기, 차라리 변태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해버렸다. 애초에 친형이 마활 소속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마법사에게 시켜 가공간을 만들만큼 은밀한 목적성이 있었다. 자신의 폭주로 인해 하리가 저렇게 되어버리고 그녀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걸 위해서 그 가공간을 들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공간의 ‘목적’을 들키는 것만은 너무나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히엘은 집요히도 물었다.
“그럼 뭔데? 저기 저 여자가 있어야 하는 이유가?”
“아니. 차라리 그런 거라 해두자.”
“뭐? 해두자?”
“그것보다 재구성, 언제 해줄 거야?”
“시키는 거 안 하면 나도 성검으로 찔러 죽일 거냐?”
“…….”
침묵하는 핀을 보고 피식 웃으며 히엘은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그 기척에 하리가 흠칫 놀라 더 구석으로 파고 들어갔다. 히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욕실 벽면의 가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기가 무섭게 바로 나와 버렸다.
“젠장! 성검도 미쳤지. 무슨 시체애호가를 황제로 뽑아버린 거야! 너 대체 뭐하는 녀석이야?”
“그러니까 아니래도. 겔사를 옮겨온 자들을 수색했던 것뿐이야.”
“그걸 왜 저딴 식으로 가공간에서 지저분하게 해야 했는데? 왜 다른 사람을 시켜 안 치우고 날 시키는 건데?”
“말할 수 없어.”
“그러니까 왜?”
“말할 수 없대도.”
“그럼 나도 재구성 안 해줘.”
원래 감추려고 할수록 더 궁금해지는 법이었다. 히엘이 핀을 보며 의뭉스럽게 웃으면서 욕실 밖으로 다시 나오는데, 갑자기 하리가 진실을 내뱉었다.
“퀼트 했어! 쟤랑 나랑, 퀼트 했어! 나 죽이려다, 쟤가 미루고 있어, 자꾸! 자꾸! 나를 죽이는 걸 미뤄……. 무서워. 무서워. 흐흑…….”
핀의 얼굴이 일그러져갔다. 하리의 말에 히엘은 시체애호가, 변태를 보는 시선보다 더 짓궂은 호기심을 담은 시선으로 제 동생을 보았다. 호오, 퀼트? 퀼트? 가공간의 목적을 들켰다고 생각한 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설해버린 하리에게 너무나 짜증이 났지만 미친 여자니까 그저 주먹을 쥐고 깊은 숨을 내쉴 뿐이었다. 비꼬기를 좋아하는 히엘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 핀의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마법 전투 계획이 거의 대부분으로 채워진 대륙 정복 계획에, 마력은 보잘것없으면서 단지 육체적 능력만 월등하여 성검의 선택을 받아 황제가 되더니, 제 자식의 죽음에도 가공간이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바느질이나 즐기는 형편없는 자식이라고 욕해댈 것이 안 봐도 훤했다. 핀은 연달아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바느질 수업을 하는 동안 비교적 차분한 핀의 모습만 봐오던 하리는 성검 사건 이후 또 한 번 보게 된 핀의 다른 모습에, 그 때와 같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히엘은 동생을 비꼬는 대신 그녀에게 다가가 마법어를 날렸다.
[핑리스.]
의식을 잃게 하는 마법이었다. 하리는 그대로 욕실 바닥에 쓰러진 채 히엘에게 안겨 린넨 천에 둘둘 말렸다. 그리고서 바로 핀의 침대 위로 올려 져 물기며 기타 지저분함을 정화시키는 마법을 받고, 이불을 덮어쓴 채 침대 속에 깊게 파묻혔다. 테이블에 앉아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있는 핀에게, 히엘이 비꼬기를 그만두고 냉정히 말했다.
“재구성은 사흘 걸려. 마활 탑인 나도 사흘 걸리는 걸 애꿎은 애들 시켜서 더 일찍 하려 하지 말고.”
“…….”
“나한테 빚진 거다.”
“…….”
“그리고…… 아니다.”
끝까지 고맙다는 말은 안 하는 핀을 보며 히엘은 건방진 자식이라 생각했다. 딱히 동생을 위해 가공간을 재구성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저 여자가 불쌍해보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는 로브를 벗어던지며 핀에게 말했다.
“기본적으로 마법가공간을 재구성하려면 투시가늠이 필요하지. 사흘간 여길 쓰마.”
“뭐?”
“싫으면 말든가. 집중엔 비켜주는 게 좋을 거라는 걸 제일 잘 알 테고.”
“비켜주도록 하지.”
“아, 근데…….”
나가려는 핀이 잠시 멈춰 섰다. 히엘이 심각한 표정으로 핀에게 물었다.
“퀼트가 뭔데? 뭐하는 거야?”
도대체 퀼트가 무엇이라서. 무얼 뜻하는 단어라서, 동생이 그렇게나 화가 난 반응을 하는지 궁금한 것이었다. 스물다섯 평생을 마력 닦는 데 써온 히엘은 수공예 따위는 단 한 번도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퀼트가 뭔지도 몰랐다. 형이 퀼트를 모른다? 그 순간, 핀은 하리에 대한 분노를 차분히 잠재울 수 있게 되었고, 한참 생각하다 바느질하는 남자보다는 차라리 변태가 되는 게 좋다 생각하고, 대답을 던지며 침소를 나갔다.
“섹스야. 쟤네 나라에서는 그렇게 불러.”
졸지에 하리는 제국민이 아닌 외국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