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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침소 창밖엔 스산한 바람이 짙은 구름과 나뭇잎들을 흩트리며 황태자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황제만이 들 수 있는 성검은 검붉은 검기를 뿜어내며 음산한 소리를 내었고, 본격적인 장례식 절차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핀은 그것을 뽑아들고서 마활궁으로 향했다. 이미 마활궁은 겔사균의 범인을 색출해내느라 아수라장이었다. 두 자릿수에 달하는 하위, 고위 마법사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고문을 받고 있었다. 원래 마활들이란 대륙에서 가장 강한 생물인 드래곤의 주관 아래 황제에게 양심과 충(忠)의 관념을 맹세하여 심장을 바친 자들이었고, 그러므로 황제를 위협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어야 했다. 그래야만 그들 자신도 황제로부터, 또 맹약의 주관자인 드래곤으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성검을 들고 마활궁에 들어선 핀이 다른 용의자들이 아닌, 마활 한 명을 직접 죽여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모두가 놀라 그를 보았고, 그는 덤덤하게 세 시간 안에 겔사균을 퍼뜨린 범인을 찾지 못하면 또 하나의 마활을 죽이겠다고 하며 자리를 떠났다.
제국 역사상 마활들을 제 손으로 직접 죽인 황제는 핀라이트가 처음이었다. 맹약을 한 번 맺을 때 마다 황제는 드래곤에게 엄청난 양의 공물을 바쳐야 했고, 그런 까닭에 황제의 성검에 찔려죽기엔 그들의 목숨은 너무나 비쌌다. 그러나 핀에게 그들은 그저 아들을 죽인 겔사균을 퍼뜨린 범인도 못 찾는 무능한 마법사들일 뿐이었다.
그는 폭주를 멈출 수 없었다. 첫 번째 황태자 암살에 이어 두 번째 황태자를 노린 감염사건은 불안한 미래를 의미했다. 다음 피해자는 막내아들, 태후, 황후, 그리고 핀 자신, 결국에는 사르제스 제국 자체가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나 셀바히트 숙청과 소멸에 온 힘을 다했는데도 일어난 풍토병 암살사건, 핀의 신경은 점점 곤두서갔다.
특히나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장소에서 범인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결국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핀은 마활들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까지도 직접 성검을 들고 갔다. 그곳은 자신만의 마법가공간이었다.
엔과 세라비의 오두막 주변에는 새빨간 단풍잎들이 쉴 새 없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하리가 핀에게 두근거린 이야기를 한참 꽃피우고 있던 세 여인들은 핀을 보자마자 눈빛으로 달콤한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들의 분위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핀이었다. 그 머릿속에는 온통 의심들뿐이었다. 핀의 손에 들린 성검을 본 엔이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여자들이랑 칼싸움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핀?”
“아니. 너희들 중에서도 있을 것 같아서.”
“응?”
대답 없이 싸늘한 분위기인 그를 보는 세 여자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져갔다. 하리는 얼마 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남자가 이러한 냉랭한 분위기를 뿜어내자, 그만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그가 망설임 없이 성검을 치켜들었다. 성검에선 검은 검기가 불길하게 뿜어져 나왔다. 엔이 외쳤다.
“너 뭐하는 거야!”
핀은 세 명의 여인을 하나하나 살폈다. 평민 학교 시절부터 청소부라는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게 각종 학문에 관심을 보였던 그녀, 여자의 몸으로 여러 곳에 악기를 켜며 전전하다 황제의 수도 아이얄 퍼레이드 때 우연처럼 만난 그녀, 죽음의 방 하녀로 오게 된 시한부 인생 엔 레이테. 그리고 출신 불명인 그의 연인 세라비. 거기에 바느질 선생으로 정해져 있던 에센 부인이 아닌 그녀의 딸 하리 에센. 의심을 하자고 마음만 먹으면 세여인 모두를 셀바히트의 첩자로 끼워 맞출 수 있었다. 그러나 핀이 제일 먼저 성검을 겨눈 존재는, 인간이 아닌 마법생물 핀시였다.
[피피피픽…….]
핀시는 단지 검기에 한 뼘 만큼 가까이 있었을 뿐인데도 바람 앞 촛불처럼 소멸해버렸다. 적어도 핀시는 겔사 균을 옮겨온 범인이 아니었다. 타 시전자가 차단마력을 둘렀거나, 스스로 차단마력을 두를 수 있을 정도의 마법생물이라면, 성검의 검기에 닿기도 전에 이렇게 약하게 죽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이제 핀은 다른 사람들을 겨누어야 했다. 겨누고 확인하지 않으면 찝찝함을 덜어낼 수 없기에. 망설임 없는 성검은 가장 먼저 그녀를 희생시켰다. 하리와 엔은 당황스러움을 마저 표현할 새도 없었다. 나무 집에 뜨거운 피가 흩뿌려졌다. 세라비의 피였다. 엔이 그녀를 안고 핀에게 항의했다.
“너 대체……!”
그러나 그녀의 말은 핀이 겨눈 성검에 막혀버렸다. 하리는 경기를 하며 호흡곤란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엔은 핀을 노려보았다. 허허허헉, 학, 숨을 쉬지 못해 괴로워하는 하리의 신음이 실내에 긴장감을 흉흉히 드리우며, 두 옛 친구는 서로를 응시했다. 핀이 감정 없는 목소리를 뱉었다. 엔에게 향하는 질문이었다.
“얼마나 남았어?”
“왜? 일찍 고통 없이 죽여주려고 온 거야?”
“아니. 대답이나 해.”
“내 낯빛 보면 알 텐데.”
“그렇군. 내가 너에게 미안한지 아닌지는 널 죽여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상황이다.”
“무슨 말이야!”
“눈감아.”
“핀!”
“감아.”
엔은 자신을 보지 말라 말하는 핀의 눈동자를 뚫어질 듯 보았다. 괴로움에 흔들리는 그 검은색 눈동자를 읽으며, 평민 학교 시절 유난히 수업시간에 잠을 많이 잤던 핀의 눈동자를 떠올려냈다. 그때와 닮은 눈빛이었다. 그것이 제 목숨을 노리는 습격자들을 죽이고 난 후의 달랠 길 없는 허무함과 피폐함을 담은 눈이란 걸, 엔은 몰랐다. 단지 핀이 뭔가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황제니까,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이라는 서늘한 영광의 이름 아래 그가 겪는 다른 상황들을 짧게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엔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었다. 죽어야 한다면.
“짧은 시간 이런 곳에서 실컷 쉬게 해줘서 고마웠어. 나, 아프고 싶지 않으니까…….”
깔끔히 죽여 달라는 말을 마저 하지 않고서 엔이 눈을 감았다. 검은 검기가 그녀의 목에 닿았다. 하리는 엔의 피를 뒤집어쓴 채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쓰러진 하리를 보는 핀의 눈이 여전히 괴로움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핀은 죽음의 방 시녀장도 죽여 버렸다. 그러나 끝내 하리만은 죽이지 못했다. 마치 성검의 검은 검기가 그녀에게만은 닿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듯했다. 핀은 자기도 모르게 하리를 두둔하고 있었다. 바느질 가게의 딸로 평범하게 자라온 하리, 의도치 않게 에센 부인의 병사로 부인 대신 납치되어 온 그녀가, 겔사균을 옮긴 범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핀은 엔과 세라비에게는 허용하지 않은 관대함을 하리에게 보였고,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에게 적응하지 못했다. 아니, 하리에게만 관대함을 베푼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그래서 황태자의 장례식 이후, 무려 보름 간 그녀를 찾지 않았다.
***
겔사균 사건의 후폭풍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성 가이덴 군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라며 궁 밖에서 쫓겨났고, 마력을 가진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그대로 황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마활들은 황실 내부 곳곳을 조사했다가, 결국에는 겔사균을 옮겨온 문제의 물건을 황태자궁에서 찾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겔사균 병원체는 셀바히트 교와 앙숙관계인 가이덴 교 성전이었다. 그 성전은 황태자의 것이라 주로 손을 댄 자가 황태자뿐이었다. 이 얼마나 무겁한 도발인가. 핀은 황족을 노리는 첩자들의 행태에 더욱 분노했다.
가이덴 수호마력이 둘러싸인 성전에 셀바히트 풍토병균인 겔사균을 옮길 수 있는 마력을 가진 자는 결국 단 하나로 좁혀졌다. 가이덴 내부의 성직자들, 본래는 셀바히트 쪽 인간이나 가이덴 성력을 마스터한 이중성력자들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핀은 장인인 대주교에게 압력을 가해 범인을 수색하라 일렀다. 성전 하나 관리하지 못한 서고 관리인들도 죄를 뒤집어쓰고 우르르 죽어나갔다.
대륙 통일을 이룩한 황제의 이름은 숱한 숙청과 심문, 고문 행위로 인해 너무나 빠른 시간 만에 제국의 핏빛 강철 검에서 제국의 핏빛 폭풍이라는 악명으로 변했다. 거리의 술주정뱅이들은 언젠가는 황제가 보복을 당할 거라고 저주했다. 황궁에서는 세 번째 황태자 대관식이 치러졌다. 새로운 황태자가 무려 여섯 살 이상의 나이를 건너뛰는 마력성장을 받은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핀은 황태자가 된 막내아들, 마력 성장으로 가공 지식과 지혜를 쌓아 열 살이 된 아이에게 난생 처음 주사를 부렸다.
“티에리아, 누구나 처음엔 성군이 되고 싶어 한단다.”
“아버지…….”
“어떤 일이 있어도 네 자신을 잃지 마라. 폭군으로 불리기 싫다면.”
그 후에 핀이 비틀거리며 향한 곳은 자신이 차마 죽이지 못했던 바느질 선생의 공간이었다. 옛 친구인 엔을 죽여 놓고도 못 죽인 여인인 하리를 아사시켜버리면 우스운 일이리라. 그러나 그런 생각을 지금 하기에는 너무나 뒤늦었다. 보름 만에 핀과 마주한 하리는, 쿠키를 만들 때 사용하던 설탕과 밀가루를 퍼먹으며 시체가 놔 뒹구는 공간속에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