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12화 (12/123)

<-- 12 회 -->

그러나, 사실 둔할 만도 한 것이, 어차피 이 가공간은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공간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했다. 여가를 위해 만든 공간이었고, 그렇기에 바느질 선생을 여자로 보아서는 절대로 곤란했다. 자신은 그저 휴식과 안식과 흥미를 동시에 충족시켜줄 절대적 취미 공간을 원했을 뿐이지, 은밀히 안기 좋은 여성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각, 사각, 가위질 하고 홀짝, 홀짝 차를 마시며 핀핀거리는 핀시에게 쉿-쉿- 하는 하리의 모든 것이 신경 쓰이고 있었다.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바쁜 생활에 치여 기본적인 욕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일어난 현상 같았다. 남자란 것은 애초에 그런 동물이었다. 언젠가 분명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었다. 엔에게 고백했다 거절당하고 나서 본의 아니게 그녀와 학교 교구실에 갇혀버렸던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숙녀를 좋아한다 말하던 엔, 그 때문에 자신의 고백을 단번에 거절했던 엔, 그래서 야속했던 엔과 함께 그 교구실에 갇혀 있었을 때에도, 그는 지금과 같은 곤란한 욕구에 휩싸였었다. 그것은 필시 마음과는 다른, 오히려 마음과는 철저히 분리된 수컷으로의 단순한 욕구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욕구는 늘 그랬듯 황후와 잠자리를 가지거나 혼자서 해결하면 싹 사그라지는 덧없는 욕구이기도 했다.

‘더 있다가는 위험해지겠어.’

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 조각을 자르던 하리는 핀의 움직임에 마시던 꿀 차를 코로 들이킬 뻔했다.

“프, 풉! 왜, 왜 그래?”

긴장한 하리가 벌떡 일어나 뒷걸음쳤다. 핀은 이곳에서 나가려고 제복 상의를 다시 갈아입다가 그녀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녀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긴장한 모양이었다. 문득 그녀가 죽음의 방에 처음 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옷을 벗으려 했었지. 나, 참. 생긴 건 어려서는…… 곤란하잖아.’

핀은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하고 베개를 들어 하리에게 내보이며 돌아섰다.

“베개 생각은 다음에 해온다.”

“어, 어디 가는데?”

“바빠서.”

핀이 무언가 쫓기는 사람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바로 떠나자, 하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핀시에게 말했다.

“아, 바쁘면 왜 낮잠을 잔다고 한 건데. 사람 놀라게. 휴.”

[후잇! 후잇!]

황제가 탐탁지 않은 핀시는 그녀의 주위를 날아다닐 뿐이었다.

***

“그곳에 계셨습니까, 폐하.”

죽음의 방에서 나온 핀은 침상에 걸터앉아있던 황후를 보고 놀라서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하리의 투박한 베개를 그대로 구석에 숨기듯 슬쩍 던져버렸다. 하리 때문에 두근거리던 가슴이 이제는 무언가 나쁜 짓을 들키기 직전 아이의 가슴처럼 쿵쾅이고 있었다. 황후의 표정이 어두워 그 짓이 들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무슨 일이오?”

“황태자가 쓰러졌습니다.”

첫 아들을 잃고 두 번째 아들마저 쓰러졌다는 소식에, 핀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

엔과 세라비의 오두막 앞에는 바다 풍경이 지워지고 울긋불긋한 가을 풍경이 새로 들어서 있었다. 가공간의 하늘은 높고,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는 세라비는 슬픈 표정이었다. 엔의 호흡이 전과 달리 가빠졌기 때문이다. 엔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그녀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 세라비는, 가공간을 창조한 마법사에게 하필이면 이런 가을 풍경을 깔아달라고 부탁한 엔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엔. 다시 바다 풍경 깔아달라고 하자, 응?”

“이게 아늑해서 좋아.”

“…….”

“세라비, 나중에 폐하께 이곳을 나가게 해달라고 간청 드려.”

“싫어.”

“그래야해. 여기까지 따라온 것만으로도 난 너무 미안하니까.”

엔이 켜는 그렐은 너무나도 경쾌했다. 평소라면 세라비가 노래를 흥얼거렸을 테지만,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엔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그러다가 저 멀리 길에서 하리가 핀시와 함께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기운 없이 손을 들며 대충 인사를 했다.

“아아, 저기 볼이 새빨간 숙녀분이 오시네. 저런 표정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혹시 폐하랑 무슨 일이라도?”

“거봐, 내가 뭐랬어? 폐쇄된 공간에서는…….”

그들은 예전 자신들의 농담을 떠올리며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잰걸음으로 온 하리가 숨을 가쁘게 내쉬며 엔의 어두워진 안색을 걱정했다. 그녀는 엔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잠 못 잔거예요?”

“이 여자가 하도 날 괴롭혀 대서 말이야.”

엔은 연인 탓을 하며 음흉하게 웃었고, 세라비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리는 두 사람 가운데 앉아 한참을 침묵하다가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핀에게 가슴이 떨려버렸어요.”

그러자 엔과 세라비가 동시에 서로의 손바닥을 탁 마주쳤다.

***

황태자가 걸린 병은 셀바히트의 풍토병 ‘겔사’로 감염인은 구토, 탈진, 고열과 같은 증상을 이틀 정도 겪다가 피부수포, 뇌와 장기손상에 이르러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병이었다. 황태자는 신성 가이덴 부대 입궁식 당일 날 새벽에 기침, 조찬 때 구토를 일으켰고, 행사 후 탈진, 피부수포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그 무서운 진행 속도에 황실 의사들은 저어하며 핀에게 선고했다. 손을 쓸 여력 없이, 황태자의 삶이 길어야 사나흘 정도만 남았다는 내용이었다.

황족들은 겔사를 옮겨온 자가 황궁 내부의 셀바히트 첩자들이라 추측했다. 사르제스의 마활들은 겔사균이라는 미세 병균을 옮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황실 마법사들을 하위계부터 고위계까지 모두 샅샅이 조사, 심지어는 죽음의 방이라는 가공간을 만들어낸 지하 감옥 마법사까지 심문했다. 출신지가 조금이라도 셀바히트 영토와 가까웠던 마법사들은 위계와 상관없이 사형 당했고, 평소에 조금이라도 이상 행동을 보였던 자들 역시 잔인한 고문을 받았다.

다섯 살에 불과한 어린 황태자의 침대에는 겔사균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 차단 마력이 둘러져 있었다. 짓물러가는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며 황후와 동생, 죽은 형까지 불러대는 황태자의 모습에 핀은 슬픔과 분노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황태자는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카락 등 이목구비도 핀과 가장 쏙 빼닮아 태후가 유난히 아끼던 아이였다. 태후는 황태자의 나이가 어린만큼 마력성장을 사오년쯤 앞당겨 일찍부터 제왕학의 기초를 닦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고, 핀은 자신이 평민학교에서 잔인하게 성장해왔던 서글픈 기억이 있기에 아들만은 평범한 성장을 했으면 해서 그것을 거절해오며 드넓은 황궁을 마음껏 뛰어다니게 하고 또래에 맞는 공부를 시키는 등 유난히 신경을 썼더랬다. 하지만 기력을 잃어가는 황태자의 상태로 보아 이제 그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해지고 있었다.

“아, 아버지…….”

“그래, 여기 있어.”

“저는 운이 없는 건가요? 약한 건가요? 그래서…… 죽는 건가요?”

핀은 아들의 눈을 피했다. 운 없고 약하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말을 한 건 자신이었다. 왜 그런 말을 했던가. 하지만 아들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되었다. 그 어떤 일에도 평정을 유지해야 했다.

“살 수 있어. 그런 약한 질문을 하니까 더 아픈 거다.”

희망 없는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이 현실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다가 아들의 한 마디에 그는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 아버지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는데…….”

아들의 말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어 그대로 부서져 핀의 심장을 찔렀다. 자신은 훌륭한 인간이라 말할 수 없었다. 날 적부터 모든 것을 선황의 의지대로만 살아오고 살인기계가 되어버린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 한마디로 핑계를 대며 스스로를 위안하며 살아온 못난 사람이었다. 숱한 전쟁에 나가 대륙을 통일한 뒤 남은 것은 흉악한 별칭과 함께 전쟁 세금이나 무겁게 거둬들이는 폭군의 악명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갓 얻은 휴식기에 정작 지키고 보살펴야 할 사람들을 외면해버리고서 혼자만의 공간으로 도피하는 것에만 더 신경을 썼다. 늘 알고는 있지만 마주하기 싫은 현실이었고, 그래서 외면해왔다. 자신은 결코 훌륭한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

“언제나 용감하시고…… 멋지셨던…….”

“그런 말마라. 일어날 생각이나 해.”

“아버지께 딱 한 번…… 만이라도, 검을…… 배워보고 싶었…….”

“말하지 말고, 좀 더 자 둬.”

마력차단막 안으로 제 아비에게 손을 내밀던 황태자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작은 손도 침대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핀의 말대로 잠에 들고 있었다. 곪아가는 얼굴, 눈가로 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엉망이 된 얼굴은 죽기 싫은 두려움에 가득 차 핀의 가슴을 찢어지게 만들었다. 황태자는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그렇게 겔사균은 그 작은 소년을 짧은 시간에 하늘에 보내버리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