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회 -->
아주 대범하게 황제의 숨기고 싶은 과거만을 골라서 말하는 그녀를 보며 핀의 얼굴은 새빨개지고 말았다. 때는 핀이 레인 토슈라는 이름을 쓰며 평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어딘가에서 들이닥친 습격자들은 주로 밤에만 황태자였던 핀을 노렸고, 핀은 최대한 그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그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런 피곤한 밤을 지내고 나면, 낮에는 수업을 받으며 졸거나 아니면 학교 뒤 개암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기가 일쑤였다. 청강생이자 학교청소부로 있던 엔은 그런 핀에게 늘 맨바닥에서 자지 말고 이거라도 베고 자라며 자신이 읽는 책을 몇 권 내밀곤 했었다. 당시 열네 살 사춘기 소년이었던 핀은, 스물한 살이지만 자신과 동갑처럼 어려보이는 아가씨 엔에게 자연스럽게 호감을 품었다. 그래서 고백을 했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엔은 웃으며, ‘미안, 난 애인이 있어. 너보다 더 아름다운 숙녀분이지.’라는 성취향성이 드러나는 말을 했었다. 난생 처음 누군가를 좋아했고 망설이며 고백까지 했던 핀은 그 한 차례 거절당한 경험으로 며칠 동안 뾰로통한 나날들을 보냈다. 알고 보니 나이도 많은 여자 엔! 나는 이미 예전에 다 본, 더는 유치해서 안 읽는 그런 책만 읽는 수준 낮은 여자 엔! 같은 여자나 좋아하는 엔 따위! 그런 식으로 그녀를 비웃으며 자신의 상심을 달래곤 했다. 그렇기에 황제가 된 지금에는 그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낯부끄러운 추억들뿐이었다. 핀은 그때를 생각하면 바늘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뻥 차이고 말았던 가련한 소년은 누구?”
“그만해라?”
하리는 얼굴을 붉히는 황제가 처음으로 귀여워보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놀리면 ‘바느질청년 핀’에서 ‘제국의 핏빛 강철 검’으로 변하게 되는 걸까, 위험한 호기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황제를 놀리는 것을 거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이런 갑갑한 곳에 가둬놓고 베개도 주지 않은 사람이 핀이잖아. 엔은 베개도 없이 숄을 겹쳐서 베고 잔다고. 그러니까 이번에 아플리케를 배우면서 확실히 친구의 베개도 만들어주는 낭만적인 일을 해보는 거야!”
황제가 일일이 그런 베개 사정까지 생각을 해야 하나? 가공간을 만든 마법사는 어찌나 엉터리인지! 베개 따위는 필수 아닌가!, 따위의 생각들을 하며 붉은 얼굴을 조용히 추스르던 핀은 하리가 내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 뜨, 뜨!”
식지도 않은 차였다. 황제의 그러한 모습을 처음 본 핀시와 하리는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하리의 표정이 마치 ‘너 정말 제국의 핏빛 강철 검 맞느냐?’고 묻고 있었다. 핀은 미지근한 맹물 한잔을 마시며 혀를 달랬다.
“좋아. 아플리케라, 확실히 배워주지.”
어차피 자신은 바느질 선생이 만들었던 그런 대작을 만들고 싶은 아주 작은 꿈이 있었다. 그런 대작을 하려면 아플리케 기법은 필수였다. 딱 그것만 철저히 배우겠다, 생각하고 그는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핀은 베개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없어.”
“풉, 내가 옛 이야기 꺼내서 삐친 거야?”
“무슨 말이야? 베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없다고 하는데.”
“삐쳤구나.”
“얼른 수업이나 하라고.”
“그럼 베개에 대해 생각해봐. 이게 내 수업 방식이야. 항의는 듣지 않겠어. 학생 핀 씨.”
하리는 바늘을 들기는커녕 쿠키만 야금야금 씹어대고 있었다. 수업 방식이라 하니 어쩔 수 없이 핀은 베개에 대해 기계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잠을 잘 때 베는 것. 끝.
“…….”
“……?”
“…….”
“……?”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말해버리면 눈앞의 빨강머리 초록 눈동자의 동안 아가씨는 또 구구절절 베개는 이래야 좋고…… 로 시작해서 트집을 잡을 지도 몰랐다. 결국 핀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베개에 대한 사색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색은 무엇이든 경험이 받쳐줘야 편한 법이었다. 그래서 거침없이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었다.
“에센, 나 여기서 자도 돼?”
일단 베개란 것을 베고 자야, 그것도 하리가 베는 평범한 베개를 베고 자봐야, 철학적 사색이든 뭐든 할 것 아닌가, 라는 핑계를 대지만 시간도 넉넉하고 노곤한 오후라 잠이 오고 있었다. 낮잠이란 것은 언제나 정신이 곤두서있는 그 자신에게 달콤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갑자기 하리의 뺨에 홍조가 번지고 있었다. 핀시도 핀의 ‘자고 가도 되느냐’는 말을 제멋대로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뺨을 붉히며 삐익삐익 거렸다. 핀은 눈앞 두 생물체의 반응에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며 자도 되느냐고 재차 침묵의 질문을 했다. 하리가 한동안 안 더듬던 말을 다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왜, 왜, 여, 여기서 자, 너, 너희 집, 궁궐같이 너른 집 놔두고, 궁궐이지 참. 아, 뜨뜨, 뜨!”
당황에 빠진 하리가 뜨거운 차를 아무 생각 없이 홀짝이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핀의 배꼽이 뒤집어질 수 있었다.
“네가 베개를 생각해보라며. 그런데 엔의 눈높이에 맞출 베개를 생각하기에는 내 침소의 베개는 별로인걸. 왜냐하면 내건 마계생물 엔젤리카의 질 좋은 깃털로 채운 최고급 베개라서.”
일부러 으스대며 말하는 핀은 하리에게 그런 식으로 장난을 치는 중이었다. 하리는 그제야 심중의 엉큼함을 덜어내고 고개를 머뭇거리다가 끄덕였다. 비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 좋으시겠네요! 최고급 침구를 베고 덮고 주무셔서!”
“그러니까 나 좀 네 거 베고 잔다. 그래도 되지?”
“뭐…… 음…… 참, 오늘 아침에 머리는 감고 왔니?”
“하하하!”
갑자기 팍 웃음을 터뜨리던 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아까 침 흘리고 자던 사람에게 듣고 싶지 않은 의심이네.”
또 한 번 하리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아무튼 에센, 방해 마.”
짙은 하늘색 제복 상의를 벗은 핀이 하리의 침대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는 하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제에게 베개만 빌려줄 거라 생각했는데, 자기 침대에서 재워야 할 판이었다. 하리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침대에 누군가를 재워본 적이 없어 당황했다.
[핀-핀- 후잇- 핀!]
“에센. 걔 좀 조용히 시켜줄래?”
“…… 응.”
하리는 핀시에게 시침핀 밥을 주어 조용히 시키다가, 이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가위를 들었다. 이제부터 아플리케 할 것을 미리 오려둘 참이었다.
배부른 핀시 덕분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하리는 천 조각을 오리다가 식어가는 차에 괜스레 꿀이나 몇 스푼 더 타보고, 핀이 마시던 차랑 섞어보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손을 움직였지만 사실은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핀을 의식하고 있었다. 왜 이럴까. 상대는 바느질 선생인 자신을 죽을 때 까지 죽음의 방에 가둬놓고 바느질만 가르치라고 명령한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이다. 어딘가 알 수 없고 이상한 황제라서 겁이 나는 상대였으나, 그런 것보다는 일단은 미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미운 사람의 목소리와 숨소리가, 너무나 나른하게 하리의 귀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작은 숨소리일 뿐인데도. 왜인지.
‘두근거려…….’
이렇게나 사람에게 쉽게 두근거렸던가? 폐쇄 공간 생활로 사람 구경을 못 해서 그저 사람, 그저 다른 이성의 사람, ‘남자’라고 두근거리게 되는 건 아닌가? 그러나 핀은 ‘그저 남자’라 할 만한 정도의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은 황제라는 제국 최고의 권력자이고, 젊으며, 탄탄한 몸매에다가, 눈에 칼자국이 난 것 말고는 외모도 준수한 편이고, 흉흉한 별명과 달리 죽음의 방에서만큼은 평범한, 가끔은 다정하다 싶은 말투를 쓰는 남자였다. 꼭 폐쇄 공간이 아니었어도 하리 또래의 많은 아가씨들이 그를 보았다면 열에 열 모두 두근거렸을 지도 몰랐다. 황제가 잠을 자며 숨소리를 나른하게 뱉는 그 하나의 행동만으로도 하리는 그를 지나치게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의식하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 분명 졸렸는데 말이지.’
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리의 침대, 그 베개 위에 누워 머리를 누이자마자, 잠은커녕 정신이 또렷해져갔고, 가슴도 하리와 같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베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인데, 베개 생각은 핀시의 발톱만큼만 한 게 전부였다. 아, 이 베개는 에센이 베는 베개군. 이런데 누워서 작품 구상도 하고, 꿈도 꾸고, 침도 흘리고, 음, 갇혀있으면 아무래도 심심할 테지, 엔과 그 연인과 함께 놀게 허락한 건 아무래도 잘한 일 같아, 바느질 선생이 우울해있으면 나도 곤란하니까, 잠깐…… 에센이 베고 자는 거라고? 얼떨결에 혼자 ‘사는’ 숙녀의 침대에 누워버린 것인가? 갑자기 그의 표정이 굳어갔다. 비록 애정이 없이 지내온 사이라 하나, 자신에겐 황후가 있었고, 그녀에게 충실해왔다. 뿐만 아니라 권력을 간섭받거나 복잡해지는 것이 싫어 다른 비를 들이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다른 여자의 침대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쉽게 누워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야 멋쩍고 어색해져서는 둔한 자신을 책망했다.
‘형편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