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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10화 (1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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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 군복 일색의 신성 가이덴 부대가 열을 맞춰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핀에게 충성의 예를 표했고, 핀은 황제의 검인 성검을 뽑아 보이며 그들에게 답했다. 신성보호기도에 특화된 이 부대의 병사들은 궁 곳곳에서 두 번 다시는 전 황태자 암살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궁을 지킬 임무를 맡을 것이다. 가이덴 대주교의 딸로 결혼 전부터 황궁에 신성 가이덴 부대의 주둔을 요구해온 황후 리이라는 뒤늦게야 정비된 부대에 황제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그 말투는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이제라도 제 말을 들어주시니 참 다행입니다.”

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후를 위시한 대주교파에서는 황궁 방위를 들먹이며 신성 부대의 주둔을 꾸준히 주장해왔지만, 무엇이든 불신하는 핀은 그것을 가이덴 교단의 세력을 넓혀 황권을 견제하고자 하는 대주교의 속셈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생각은 첫 아들이 살해된 지금에도 변화가 없었다. 최근까지도 신성마보호기도 등 방어마력에만 특화된 이러한 부대를 정비하는 것 보다 차라리 대륙 재야 고위마법사들을 데려오는 것이 더욱 낫다며 꾸준히 신성 부대를 반대해왔다. 그러나 황태자를 잃고 식음을 전폐하며 나날이 어두워져가는 황후에게 남편으로서 최소한의 배려가 필요했고, 또 셀바히트 소멸로 인해 생긴 셀바히트쪽 용병들을 흡수할 방편도 마련해야 해서 마지못해 신성 부대의 주둔을 허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부대 입궁식이 모두 끝난 뒤, 사흘 정도 여유가 남은 핀은 제복 차림 그대로 침소로 들어갔다. 팍팍한 직무에 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황후와 아들들과 가족의 한 때를 무덤덤하게 보내거나 혼자 마법 영상구를 보며 시간을 보냈을 테지만, 죽음의 방에서 컵받침 수업을 받고 난 후에는 그의 머릿속에 휴식 시간이란 ‘바느질 시간’이 전부였다.

거의 열아흐레 만에 죽음의 방 정원으로 들어선 핀을 맞은 것은 목 베개를 낀 핀시였다. 핀시는 하리가 만들어준 자그마한 아이보리색 목 베개를 끼고 핀핀 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몸에 꽂힌 시침핀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하리가 밥 주는 것을 잊었으리라. 핀은 핀시를 데리고 곧바로 실내로 들어섰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는 카펫 위에서 널브러져 단잠에 빠진 하리를 깨웠다.

“이봐. 감기 걸려.”

하리는 깨어나지 않았다. 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노란색 숄을 가져와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곤란한 듯 웃었다.

“황제한테 감기라도 옮길 셈이냐고.”

깨울 생각이 사라진 핀은 그대로 흔들의자에 앉았다. 하리는 늘 테이블 아래에 수업 준비물을 두곤 했다. 오늘은 그녀가 뭘 가르칠 것인지 궁금해진 핀은 테이블 아래를 뒤적거렸다. 조각천은 없고 목화씨가 드문드문 보이는 다소 톡톡한 아이보리색 린넨 원단만 있었다.

잠 많은 하리는 그대로 계속 더 잤고, 핀은 린넨 원단을 테이블 위에 두고 하리를 계속 관찰했다. 누군가가 잠에 든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노곤해져왔다. 그렇게 지켜보기만을 한참, 하리가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핀은 그녀의 침을 닦아주는 척 하면서 깨워야겠다고 생각하고 다가갔고, 때 마침 핀시가 배고픔에 못 이겨 제 몸으로 하리의 입을 뭉개버렸다.

“어으앗! 어푸푸!”

“깼군.”

하리는 눈앞의 짙은 하늘색 제복을 입은 핀을 보고 놀라서 후다닥 일어났다. 그녀는 신성 가이덴 부대의 입궁식 행사에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온 황제가 너무나 낯설었다. 하얀 셔츠를 입은 핀에게는 이제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를 정도로 익숙했지만, ‘제복’을 입은 모습은 상당히 고압적으로 보여 긴장을 해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궁에 뭔가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오늘은 무슨 일로, 화, 황제 폐하…….”

그녀가 이름이 아닌 ‘폐하’라고 부를 때 마다, 핀은 한숨을 쉬었다.

“…… 핀.”

핀이라고 편하게 부르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하리가 긴장의 표정을 풀지 않자, 그는 말 대신 표정으로 어떻게 해줄까, 라고 묻다가 뒤늦게야 자신의 복장이 그녀에게 낯설어 보였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바로 모자를 벗고 단추를 느슨히 풀었다. 그리고 또 표정으로 말했다. 됐지? 하리는 침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수업은 뭔데.”

“음, 오늘 수업은…….”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깔고 휴, 하고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는 그 모습이 도무지 바느질 수업할 때 조근조근 설명하던 하리답지 않아서, 한 마디로 어려 보여서, 호기심이 든 핀이 물어보았다.

“잠깐, 에센. 몇 살이야?”

“나? 스물넷.”

핀은 자신보다 하리가 한 살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평민학교 시절 소심한 십대 중후반의 여자 아이 같아 보이는데 스물넷이라니, 에센 부인은 딸을 결혼시키지 않고 왜 이 나이까지 혼자 두었나, 그러한 호기심도 생겼다. 그런 핀에게 의외의 질문이 들이닥쳤다.

“핀은 몇 살이야?”

자기 나라 황제 나이 정도는 좀 알고 있으라고, 이 무지한 백성아. 그러나 핀은 그런 눈초리를 보낼지언정 끝내 제 나이를 말하지 않았다.

“너보다 많아.”

“아.”

“…….”

“그래서 몇 살?”

“오늘 수업은 뭐야.”

핀은 자연스럽게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중에 엔에게 물어보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하리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목화씨가 드문드문 보이는 린넨천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오늘 만들 건, 사람을 계속 졸리게 하는 거야. 자도, 자도, 계속 자고 싶게 만드는 거. 사람을 계속 눕게 만드는 거.”

“그걸 바느질로 만든다고?”

“응.”

핀은 흔들의자에 앉아 고민하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농담을 했다.

“에센.”

“응?”

“수면제는 바느질로 못 만들어.”

“풉. 그게 아니고, 베개를 만들 거야.”

하리가 작게 웃자 기분이 좋아진 핀은 따라 웃었다. 하리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이번에는 누빔을 하지 않을 거야. 대신에 기법 하나를 가르칠 거야. 아플리케(바탕천 위에 다른 천이나 레이스, 가죽 따위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려 붙이고 그 둘레를 실로 꿰매는 수예.)라는 기법인데, 그걸 가르치면서 핀의 둘도 없는 친구 엔의 베개를 만드는 거야. 물론 그 베개는 핀이 만들어야 해.”

핀은 ‘핀의 둘도 없는 친구 엔’이라는 부분에서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는 엔을 친구라거나 한때 좋아했던 여자라는 ‘거창한’ 관계로 대하기보다는, 그저 어린 시절 같이 지냈던 사람, 죽음의 방 시녀로 두기 좋은 시한부 인생의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여겼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수업작품이 시녀의 선물이 된다는 것에 떨떠름한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찻물을 끓이는 하리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봐. 나보고 지금 그 녀석 베개를 갖다 바치라는 거야?”

그녀는 핀의 표정을 살피며 실망한 투로 말했다.

“나한테는 말을 편하게 쓰라면서 정작 핀은 자기 마음을 편하게 쓰지 않네. 흠.”

“뭐?”

“나쁘다. 나쁜 남자야.”

“어째서?”

“핀시 밥이나 주고 있어.”

하리는 시침핀 정리함을 핀에게 내밀며 다과를 준비했다. 어느 샌가 그녀는 황제를 점점 편한 태도로 대하고 있었다. 핀은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긴 했지만, ‘나쁜 남자’라는 말에 는 왠지 모르게 계속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그는 딱 흰색 진주알 시침핀만 골라서 정확한 간격으로 핀시의 몸에 꽂으며 연달아 물었다.

“그러니까 왜 내가 나쁜 남잔데?”

다과를 준비하던 하리는 배시시 웃으며 핀을 의뭉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언젠가 엔에게서 들었던 핀의 평민학교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맨날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졸고, 점심시간에도 개암나무 밑에서 잠만 잤다며?”

“뭐?”

핀은 처음에 하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기억을 돌이켜 보면 자신이 개암나무 밑에서 자 본 적이 딱 평민학교 시절밖에 없었다. 그제야 그는 하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광부 토슈의 넷째 아들, 레인이 누구일까? 소년 레인에게 매일 두꺼운 책을 두 권 쯤 내밀며 이거라고 베고 자, 짜샤! 라고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은 또 누구일까? 베개를 준 그 여자한테 사귀자고 고백을 했던 소년은 또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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