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9화 (9/123)

<-- 9 회 -->

'살려줄게. 안 죽일게. 평생, 여기서 살아.'

하리는 핀의 말을 떠올리며 불안한 생각을 접기로 했다. 비록 폐쇄된 마법가공간이긴 하나, 그 안에서 죽는 것 보다는 나은 일이었다. 앞으로 황제의 마음은 얼마든지 또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을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희망에 그녀는 웃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엔과 시녀장의 도움 없이도 혼자 죽음의 방 청소를 하고, 수업 시간에 필요한 천조각들을 미리 재단해두며, 자신을 다잡았다. 그러나 단지 그때뿐이었다. 황제가 죽음의 방에 들르지 않으면 그녀의 정신은 또 흐트러져갔다. 아무리 바쁜 황제라지만, 그렇게나 바느질에 대한 흥미로 눈을 빛내던 사람이 한 달 이상 오지 않으니 설마 그 흥미가 떨어져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염려가 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죽게 되는 건가? 황제는 분명 자신도 대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었다. 그때까지 잘 가르쳐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잊어버린 건가? 혼자 있는 시간들은 그런 온갖 불안을 불러들이기 딱 좋았고, 하리는 또 다시 불안증에 허우적거리고 마는 것이었다.

핀핀, 핀핀, 하고 우는 핀시의 몸에 새까만 진주알이 달린 시침핀을 빽빽이 꽂으며 하리는 한숨을 연달아 쉬었다. 그런데 아주 오래간만에 그가 방문했다.

“늦었지, 에센.”

핀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핀은 그녀와 자리를 마주하고 앉아 그녀의 어둡고 불안한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궁금했다. 이 여자는 왜 항상 겁에 질려있는 걸까. 사실 그는 하리가 죽이지 않겠다는 자신의 명령에 기뻐할 줄 알았던 것이다. 이미 테이블 위에는 숙제, 컵받침 네 개가 올려 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하리는 그것이 자신이 내 준 숙제라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난 얼른 하고 나가봐야 한다고.”

핀이 보채고 나서야 하리는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해야 평생 갇혀 사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었다. 하리의 침묵이 답답해진 핀이 자신만만하게 제 컵받침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디 트집 잡아봐.”

트집이라는 말에 하리의 눈썹이 씰룩였다. 분명 자신이 지난번에도 트집이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을 한 것 같은데, 황제는 그 말을 기억조차 못하는 듯해서 기분이 나빠진 것이었다.

“지금 나한테 욕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트집이라는 말이 기분 나빴어?”

“아니야!”

하리는 핀을 흘겨보며 뒤늦게야 컵받침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순간 핀이 소리 내어 피식 웃고 말았다. 하리의 뾰로통한 표정이 멍한 표정보다 훨씬 생기가 있어 귀여워 보였던 것이다.

“핀은 혼자 살아?”

여러 명의 황족을 이끌고 사는 황제에게 혼자 사느냐, 묻는 질문에 핀은 그 의도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뭐?”

하리는 황제가 해온 숙제에 ‘트집’을 잡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실 황궁 서고에서 온갖 서적으로 독학을 하여 각종 패턴을 습득한 핀의 바느질은 완벽한 상태였다. 누빔실로 기교를 부리는 것으로 보아 재능도 있었다. 하지만 하리가 보기에는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한 달 이상 이렇게 높아진 수준을 보아서는 바느질 선생이 굳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마치 바느질 선생이란 황제 자신의 독학능력을 뻐길 상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황제의 저 호승심어린 눈빛도 수상했다. 하리는 자신이 컵받침을 만들어오라 숙제를 냈던 목표를 떠올렸다. 그 이유는 실용적인 것, 가족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트집이라 해도 좋을 거야. 음. 그냥 내 의견이니, 그러려니 하고 들어봐. 일단 컵받침 모양이 네 개 다 다른데 이게 참 삭막하게 느껴져. 보통 수강생들은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서 뒷면에, 각자의 가족 이름을 적어서 가져오지. 왜냐하면, 집에서 쓸 거니까 말이야. 가족들과, 컵받침을 직접, 하, 함께, 쓰기 위해서…… 그런데 핀은 마치…… 수업이 끝나면 이걸 버릴 것 같아.”

황제가 맨 처음 만들었던 핀쿠션은 이 죽음의 방에서 고이 제 기능대로 쓰이고 있었다. 하지만 컵받침은 정말로 버려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취미에 대해 숨기고 가리길 좋아하니 말이다. 핀은 침묵했고, 하리는 눈치를 보다가 갑자기 식은 차를 찻잔에 따라 붓고는 핀의 컵받침위에다가 올리고서는 자신이 한 말을 정정하듯 중얼거렸다.

“버리긴 왜 버려. 이, 이렇게 쓰면 되겠네. 흐흐흐…….”

줄곧 생각에 잠겨있던 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각종 천들이 차곡차곡 정리된 서랍을 열어 천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뭐해, 핀?”

“다시 만들려고.”

“아, 아니야! 다시 하라는 말이 아니었어!”

“내 마음이야.”

핀은 새로운 바느질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하리는 통 말이 없는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어 괜스레 핀시의 몸에 꽂아둔 흑진주 시침핀을 하나, 둘씩 빼내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간 흘렀다. 핀이 완성한 것은 노란 색조의 원형 컵받침 하나였다. 마치 렌키스의 달과도 같은 모양이었다. 뒷면에는 ‘작은 태양’이라는 글자가 수 놓여 있었다. 그 단어는 렌키스의 달에 태어난 핀의 첫째 아들, 즉 죽은 황태자의 별칭이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자기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추모 의식이었던 것이다.

“고맙다. 에센.”

“응? 뭐가?”

“잘 가르쳐줘서.”

핀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무언가를 잊기 위해 정신없이 빠져들고 그것이 자신을 치유하는 길이라 믿었던 핀은 컵받침을 만들어오라는 숙제도 기계처럼 해왔었다. 하지만 하리의 ‘트집’을 듣고서 처음으로 가족, 죽은 아들을 떠올릴 수 있었고, 복수와 함께 해치워버렸다고 단정 짓던 추모도 진심으로 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잡은 하리의 손은 따뜻했고, 하리 역시 핀의 손이 생각보다 따뜻하다고 느끼며 자신이 도대체 뭘 잘 가르친 건지 의아한 표정을 했다.

“다음 수업도 잘 부탁해.”

그날, 하리는 처음으로 핀이 따뜻하게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

엔과 세라비, 연인들만의 가공간에 하리가 처음으로 구경을 왔다. 핀이 그곳을 방문해도 좋다고 허락을 한 덕분이었다. 그 가공간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늘, 그리고 하늘을 날아가는 갈매기 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엔과 세라비가 사는 작은 오두막도 하나 있었다. 오두막 울타리에 색칠을 하며 놀고 있던 세라비는 죽음의 방에 갇혀있어야 할 하리가 와서 놀라워했다.

“어라, 엔. 하리가 여기와도 괜찮은 거야?”

“핀이 허락했어. 여기 정도는 마음대로 들락거려도 된다고.”

하리는 죽음의 방과는 사뭇 다른 그들의 공간을 신기한 듯 구경하다가 질문을 했다.

“정말 이 바다가 가공간이라는 거예요?”

“응. 아무튼 우리 집에 손님이 다 올 줄이야. 크크큭.”

세라비는 붓을 내려놓고 간단히 먹을 것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리가 쭈뼛거리며 세라비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내밀었다.

“저, 따로 드릴 건 없고 이거요.”

“어? 예쁘다.”

하리가 내민 것은 컵받침들이었다. 일단은 타인의 공간에 방문하는 것이니, 선물이 필요했는데 줄 것이 마땅찮아 굴러다니는 도구들로 급하게 만들어본 것이었다. 죽음의 방 밖을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하리의 두려움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사람 놀리기 좋아하던 엔이 하리를 놀리고 겁주는 장난을 그만두고, ‘핀 그 녀석은 절대 널 죽이지 않을 거야’, 라고 안심을 준 덕분이었다. 하리는 엔이 연주하는 그렐 소리를 들으며, 세라비가 내민 차와 쿠키를 밝은 얼굴로 받았다.

“엔과 세라비는 여길 종종 나가곤 하나요? 외출이라던가.”

세라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린 떠도는 거 지겨워서. 그리고 남은 시간도 얼마 없으니, 그냥 여기서 둘이 노래하고 춤추고 노는 게 좋아. 아무튼 하리, 다음 시간엔 황제에게 뭘 가르칠 셈이야?”

“글쎄요, 폐하께서 워낙 바쁘셔서 그 때 이후로 또 보름 째 안 오시고 잘 모르겠어요.”

“그럼 베개는 어때?”

문득 하리는 한쪽 벽에 있는 그들의 침대를 보았다. 베개가 없고 두꺼운 재질의 숄이 켜켜이 쌓여 베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네요. 베개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