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회 -->
하리는 깔끔히 정리된 죽음의 방을 보고 텅 비었던 정신에 하나 둘 씩 이성의 조각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황제가 엉성한 솜씨의 핀쿠션 하나를 숙제로 가져온 날 뒤로 하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인생 최후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만들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바느질 도구만이 있는 공허한 공간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어머니에게서 배워왔던 바느질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직물 길드의 디자이너가 되길 원했던 아가씨였던 것만큼 기본적 드로잉 실력이 있었고, 그래서 도안쯤은 한 시간 만에 뚝딱 그릴 수 있었다. 도안 완성 후에는 그것을 오려서 색색의 천에 대고 부위별로 오리기 시작했다. 그런 집중의 시간들은 그녀에게 현실을 잊게 해주었다.
하리에겐 운이 좋게도 황제는 한 달 간 수업을 받으러 오지 않았고, 죽이러 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에센 부인이 생전 해놓았던 작품보다 더 뛰어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보통의 장인이라면 세달 쯤은 꼬박 들여야 할 것을 한 달 동안 완성해내다보니 정신과 손가락이 뭉개진 것은 피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됐든 그러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던 덕분에 살게 된 상황이었다. 그녀는 깨끗해진 죽음의 방을 뚫어질 듯 보다가 이성 조각을 하나, 둘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덜그럭, 덜그럭. 제멋대로.
그녀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옮겨갔다.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나 던지고는 줄곧 침묵하는 긴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 남자 역시 제 머리 색깔만큼이나 새까만 눈동자로 하리를 보고 있었다. 비록 눈과 이마에 걸쳐 길게 난 칼자국에 흉흉하긴 분위기가 있었지만 미남은 미남이었다. 하리는 웃었다. 미남이라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미남의 이름도 떠올려냈다. 어마어마한 신분도 생각이 났다.
“핀?”
“응.”
“황제 폐하?”
“내가 폐하라고 하지 말…….”
“핀?”
“응.”
“나 왜…… 안 죽었나오이?”
괴상한 말투로 묻는 하리, 그녀의 눈동자가 다른 날과 달리 유난히 동그랗게 도드라졌다. 안 죽었사옵니까, 안 죽게 되었나요, 안 죽었니, 그 모든 말들이 하리의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엉켜 그런 이상한 말로 나온 것이다. 핀은 한참 전에 했던 말을 또박또박 다시 해주었다.
“나. 도. 그. 런. 대. 형. 작. 품. 하고 싶다고. 가르쳐 줘. 에센.”
“아…….”
“아, 가 아니잖아. 계속 그렇게 멍청하게 있을 거야?”
“아…….”
“이봐, 에센.”
“흠…….”
덜그럭, 덜그럭, 그녀의 이성 조각은 아직도 맞춰지고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핀쿠션 열 개가 생소했다. 정신은 점점 제 자리를 찾기 시작했지만, 그래서 황제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눈치도 있었지만, 어째서 황제에게 숙제 낸 핀쿠션이 약속대로 두 개가 아닌 이렇게 많은 열 개나 테이블 위에 올라올 수 있을지 궁금한 것이었다.
“피인? 그러니까 이건 뭐니?”
“숙제. 저번에 내가 대충 해왔잖아. 그래서 반성하느라 제대로 해왔어. 무려 열 개. 이정도면 성실하지?”
“음.”
전과 다른 꼼꼼한 누빔, 그러나 하리는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분위기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에 그대로 드러났다. 지루하고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그 모든 기분들이 그녀의 표정에 녹아 있었다. 시간도 많지 않고 슬슬 답답해진 핀은 그녀의 어떤 반응이라도 듣고 싶어서 보채기 시작했다.
“에센. 어떻게 하면 네가 만든 것처럼 그런 걸 만들 수 있느냐, 물었다. 황제로서의 명….”
“시끄러!”
갑자기 빽 내지르는 하리의 큰소리에 핀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는 황당한 웃음을 짧게 웃다가 ‘감히, 황제에게 허?’ 하는 조금은 장난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핀쿠션들을 도로 핀의 앞으로 밀어내며 서늘한 평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눈이 있으면 잘 봐. 나처럼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이런 배색 감각으로? 이런 무늬 배치 능력으로? 틀렸어. 이따위 감각으로는 절대 그런 대형 작품을 만들 수 없다고! 대체 이 끔찍한 색 배치는 뭐야? 가뜩이나 채도 낮은 웜 그레이에 강렬한 형광파랑을? 미친 거 아니야? 연주황바탕에 아이보리색 꽃무늬가 있는데 그걸 배색한다고 쓴 원단이 하필 촘촘한 빨강초록타탄체크? 거기다 재질도 하나는 평직인데 하나는 올이 아주 잘 풀리는 것을? 장난해? 장난 하냐고! 무조건 촘촘히 누비고 많이 해오면 다인 줄 아냐고! 어쩌면 이런 끔찍한 작품을 해올 수 있는 거야!”
하리는 천둥과 같은 분노를 쏟고야 말았다. 한 달 간 미쳐있던 정신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런 중에도 아부 없이 솔직한 교육을 하라던 황제의 명령이 생각나 이렇게 큰 목소리로 ‘폭주’를 해버린 것이었다. 덜그럭, 덜그럭, 그녀의 정신은 아직도 조각 맞추기 중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반 미친 상태에서 지적해대는 것 하나하나를 듣고 있을수록 바느질 초보인 핀도 자신의 숙제들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남들에게는 아주 소소한 문제일지 모르나 그 나름으로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그는 자신의 미적 감각이 예술 작품을 수집하는데 열의를 보이는 황, 귀족 부인들보다도 더 높다고 남모르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침소, 아들들의 침소에 직접 이것저것, 사소한 배색까지 은근슬쩍 자세하게 조언할 만큼 색 감각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하리의 지적에 그의 은밀한 감각 자부심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하리의 정신이 덜그럭 거리며 제 조각을 맞춰가고 있었다면, 황제의 자부심은 와장창 제 조각을 흩트리고 있었다. 화가 나면 얼굴의 흉터를 긁는 버릇이 있는 핀이 검지손톱을 이용해 그 버릇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형편없단 말이지, 에센?”
“그래! 한마디로 너무너무 개판이야!”
마치 욕설과도 같은 느낌의 최종 평가가 나왔다. 핀의 눈이 번개처럼 분노로 번뜩였다. 한껏 제 솔직함을 분노에 실어 담아 내지르던 하리는 그의 눈빛을 보고 최종 이성 조각을 덜그럭 하고 전부 맞췄다. 그제야 황제 앞 가련한 평민으로서의 이성이 눈을 떴고, 그녀는 살고자하여 그대로 쓰러지는 척을 했다. 그렇게 그녀가 테이블 밑에 숨어서 황제의 눈치를 보는 시간이 얼마간 흘러갔다. 어느 초보 바느질쟁이의 입에서 작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센.”
하리의 몸, 뼈, 심장, 간 어느 하나 안 떨리는 구석이 없었다.
“좋아, 그렇단 말이지…….”
“…….”
“세상…….”
“…….”
“세상 그 어디에도 없…….”
“……!”
하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세상 그 어디에도 흔적 없이 죽여주겠단 말인가? 난 왜 사고를 치고 나서 생각을 하는 거지! 이번에는 유작을 만들 시간도 없겠군. 꼼짝없이 이 자리에서 황제 폐하의 성검에 찔려 죽을, 아니 맞아 죽을 것이다, 천국은 없어! 가이덴은 없습니다, 어머니! 하고 하리가 혀를 깨물려 할 때였다. 갑자기 그녀가 숨어있는 테이블 밑으로 어금니를 꽉 깨문 핀의 얼굴이 불쑥 들이닥쳤다. 그는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을 하리에게 찌르며 말했다.
“다시 해오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핀쿠션을 만들어오겠어! 핀은 다음번에 반드시 제국의 강철파렛트가 되어 최상의 배색감각을 보여주겠다, 결심하고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