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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방을 둘러싼 그러한 비정상적인 사정을 하리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모든 바느질 수업이 끝나고 나면 자신이 죽을 거라는 것, 단지 그 뿐이었다. 지금 그녀는 무기력한 얼굴로 황제와 마주 앉아 있었다. 핀은 그녀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그가 기대하는 것은 자신이 만든 핀쿠션에 대한 바느질 선생의 평가였고, 선생이 얼마나 솔직한 평을 해줄까, 하는 것이었다. 굳게 닫혀있던 하리의 입술이 서서히 열리는 순간 핀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고, 고작 한 개? 왜 숙제를 다 안 해왔어? 아무리 바빠도 두 개 다 해왔어야지. 우리 어머니 가게는 보통 이런 게으른 학생이면 수강료를 도로 돌려주고 다시는 못, 못 오게 해. 정말 바느질 하고 싶은 사람 맞아? 너무 듬성듬성 혀, 혀, 형편없잖아. 대체 그렇게나 빵빵하게 솜을 채우라고 했는데 이 헐렁한 쿠션감은 뭔지, 참…… 나.”
숙제인 핀쿠션이 만들어지던 당시, 핀은 시종들의 눈치를 보느라 당장 채울 솜을 찾지 못했었다. 그래서 자신의 침소에서 사용하는 이불 속 털을 빼내 그것으로 핀쿠션의 속을 채웠었다. 그 털은 마계의 귀하디귀한 생물 엔젤리카의 털이었고, 핀 딴에는 그 털을 넣으면서 이렇게 비싼 재료가 들어간 핀쿠션은 세상에 하나뿐이라고 웃기까지 했었다. 그런 사연을 알 리 없는 하리는 그가 만든 핀쿠션을 보며 아부 없는 솔직한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다시 물을게. 왜 이, 이, 런 형편없는 숙제를 한 거야?”
“…….”
핀은 황태자의 죽음에 슬퍼하느라 바느질을 못한 것이 아니었다. 슬픈 시간에 분량을 나누는 건 조금 우스울지 모르겠으나, 그는 칼같이 고작 사흘만 슬퍼하는데 시간을 썼고, 그 나머지 날 동안은 복수, 그리고 그 사건을 정리하는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숙제였던 핀쿠션 두 개도 어제 잠들기 전에 겨우 생각나 시종들 몰래 대충 만들어 온 것이었다. 두 개가 아닌 한 개만 완성했고, 급한 마음에 한 것이라 바느질 선은 너무나 엉성했다. 결과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학생으로서 실격이 마땅했다. 혼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핀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자기 하리가 불안한 낯빛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니지. 어쩌면 다, 다행인가?”
그녀의 상태가 이상해보인 핀이 물어보았다.
“뭐가 다행인데?”
“가, 가르치는 맛이 난다. 하하하! 호호호!”
“……?”
“처음부터 잘 하면 재미없지. 그래. 으허허!”
어설프고 과장된 웃음소리를 흘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등 불안해 보이는 하리의 모습에 핀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는 지병을 앓던 어머니를 잃고서 궁에 납치되어와 폐쇄된 공간에서 흉흉한 별명으로 불리는 황제에게 바느질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금 이렇게 황제를 멀쩡한 ‘척’ 대하는 것부터가 가상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평화로운 풍경 마법이라도 주변에 새로 걸어줘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던 핀이 갑자기 인상을 굳히고 말았다. 불현 듯 하리가 죽음의 방, 그 진짜 진실을 알아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한 것이다.
“궁금한 게 있어.”
황제의 말에 하리는 흠칫 놀랐다. 그가 강요하는 대로 반말을 쓰고, 시키는 대로 아부하지 않고 바느질 선생 본연의 자세로 교육하는데 뭔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을까? 그녀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에센.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걱정 있어?”
“…….”
“설마 교육이 끝난 후의 일도 알고 있는 거야?”
하리는 대답 대신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교육이 끝난 후 일어날 아주 아주 무서운 일을 안다고, 그런 죽음을 맞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눈빛으로 외치고 있었다.
“누가 알려 준 건데? 시녀장은 아닐 테고. 엔이야?…… 대답해.”
“그, 그렇사옵니다.”
“수업은 이걸로 끝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핀은 곧바로 죽음의 방을 나섰다.
***
핀은 엔을 찾았다. 그녀가 지내는 곳은 죽음의 방과 이어진 마법가공간이었다. 그녀는 창 밖으로 바다 풍경이 보이는 아늑한 나무집에서 그렐이라는 현악기를 튕겨대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엔의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황제가 와도 엔은 연주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검은 머리 여인이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엔을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핀은 하리에게 죽음의 방에 머무는 사람들의 앞날을 미리 이야기해버린 엔이 너무나 미워서 짜증을 내고 말았다.
“어째서 에센에게 수업 후의 일을 알려준 거야?”
“그 아이 표정 꽤 재미있잖아.”
“여기가 네 재미 보는 장소인 줄 알아?”
“아니. 여기는 내가 죽을 날 까지 내 애인과 함께 천국놀이를 하는 공간이지.”
엔이 말하는 애인은 그녀의 옆에서 노래를 부르던 검은 머리 여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세라비인데, 세라비는 지금 황제에게 예를 갖춘다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서도 엔을 향해 장난스럽게 씩 웃고 있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핀은 빈정거리며 한숨을 쉴 뿐, 그 이상 어떤 항의와 화풀이도 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엔에게 조금씩 져주는 편이었다. 그에게 엔은 평민학교 시절 처음 만난 여자, 난생 처음 반한 여자, 하지만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성 취향을 가진 여자라 포기해야만 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성으로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친구로서는 여전히 유효한 관계였다. 한때 핀이 수도 아이얄 퍼레이드 때 세라비와 함께 있는 엔을 보고, 다시 인사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다. 황제가 된 핀을 보고 엔은 놀라기는커녕 ‘짜샤, 많이 성공했다’라고 인사했고, 핀은 웃으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오느냐’ 반쯤은 농담으로 되물었다. 그때 엔은 ‘병에 걸려서 삶이 일, 이 년도 채 남지 않았으니 옛 친구를 마음대로 못 부를 거라면 지금 죽어도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당시 핀은 바느질을 할 공간을 마법사에게 시켜 구성하고 있던 중이라, 곧 죽을 엔을 죽음의 방 하녀로 쓰기에 매우 딱 적당하다고 여겼다. 엔은 세라비와 함께 갈 곳도 없는 떠돌이였고, 매사에 지나칠 정도로 긍정적이라 죽음의 방 하녀를 하라는 핀의 명령에 얼마든지 그러겠노라 수락했다. 거기다 황제 친구 둬서 좋다며 자신이 머물 공간에 창밖으로 매일매일 다른 풍경이 비치게 마법을 걸어 달라, 자신의 연인 역시 곁에 두게 해달라는 능청스러운 부탁까지 했다. 핀은 그녀의 편한 태도에 그 어떤 불만도 없었다.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이었고, 그랬기에 잘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바느질 수업 초반부터 하리에게 겁을 준 그녀의 심술만큼은 얄미운 것이었다. 적국의 수장이면 목을 따면 그만이고, 패역하게 굴면 역시 처형을 해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함께 지낸 엔에게만은 얄밉다는 이유로 무슨 보복을 해버리는 게 불가능했다. 핀은 짜증이 치밀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바느질 선생의 수업을 듣고 싶었다. 편안한 공간에서 편안히 자신만의 취미를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바느질 선생이 언젠가는 자신이 죽어야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이상, 그것은 불가능해져버렸다. 그는 선생의 겁먹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엔. 농담 아니야. 성가시다고.”
엔이 죽음의 방 비밀을 발설하지 않았어도 이미 그는 다른 이유로 충분히 성가신 중이었다. 대개 바느질을 잘하는 자들의 인상하면 넉살 좋고 몸도 풍만한 중년 부인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핀은 그런 사람을 바랐고, 그런 사람이 와야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같은 또래의 붉은 단발머리 아가씨가 큰 초록 눈을 끔뻑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란, 핀쿠션은 이렇게 만드는 거라며 조근 조근 말하던 그 분위기란……! 황태자의 죽음이 지나가고 난 뒤 잊고 있었던 하리 에센에 대한 자신도 모르는 설렘이 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궁정여인네들에게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평범함에 대한 설렘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평범함도 끝이었다. 핀은 탄식을 반복했다.
“성가시다고. 진짜 성가시단 말이다.”
엔은 그런 핀이 성가시다는 듯 대답했다.
“성가시니까 그냥 다른 사람 찾지 말고 걔랑 수업해. 그리고 어차피 넌, 걜 못 죽여.”
“네가 어떻게 장담하는 거야!”
“곧 죽을 사람들이 감이 좀 좋다. 평범한 여자랑 사귀는 게 황제 폐하 아니신가. 내가 그걸 초를 쳐버렸지만, 키키킥…….”
그녀의 연인 세라비가 동시에 큭큭, 하고 웃어댔다. 핀은 기가 찼다. 평범한 여자랑 사귀는 것? 철없는 시절 가진 하찮은 꿈일 뿐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저 이 숨겨놓은 가공간에서 바느질이나 하며 한 달에 단 몇 시간이라도 자신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과 마음을 터놓으며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곧 죽을 것을 아는 사람과 마음을 편하게 터놓으라고?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마음을 터놓으라고? 그것도 모자라 평범한 여자이기도 하니까 사귀……?
“어쭈. 핀. 너 얼굴, 붉어. 붉다고.”
엔의 말에, 핀이 버럭 소리쳤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핀의 반응이 재미있는 엔은 세라비를 바라보며 속닥거렸다.
“자기, 하리가 동안이긴 하지만, 미인인가? 응? 한 번 보고 반할 정도로 미인이야?”
“미인? 응. 동안 미인.”
세라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핀은 더욱 얼굴을 붉히며 짜증스럽게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고, 세라비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엔 역시 그렐을 다시 연주했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녀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날려주었다. 마법으로 생성된 인공바람임에도 산뜻함은 자연풍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엔은 느긋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때 세라비가 갑자기 노래를 멈추고 엔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폐하께서는 평민 여자가 취향인 거야?”
“아니. 아직 제대로 사랑해보지 못한 가짜 어른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