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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4화 (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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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보리 토션 레이스 커튼사이로 산산이 부서진 햇빛이 따사로웠다. 목재 테이블 위에는 씁쓰레한 차향과 달콤한 쿠키냄새가 그윽하게 퍼지고 있었다. 온 책장에는 수공예 서적들과 예술서적이 가득했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크림 빛 마법구에는 바닥에 널브러진 각종 바느질 도구들과 보드라운 감촉의 패브릭 소품들, 색색의 패브릭 롤이 여러 개 담겨있는 바구니 등이 비춰져, 바느질 공간 특유의 아늑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소파에는 낮잠에 든 마법생물 핀시가 누워있었다. 핀시는 어른주먹만한 하얀색 새로 살이 잔뜩 올라 오동통하고 귀여운 인상이었다. 그 새의 몸에 바늘을 꽂으면 귀여운 소리가 핀, 핀, 하고 나왔다. 엔은 핀시의 몸에 바늘을 꽂아 주는 것이 핀시의 식사라 설명 하였고, 하리는 신기해하며 핀시가 아프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시침핀이란 시침핀은 모두 핀시에게 꽂아둘 정도로 핀시가 좋아하고 맛있어하고 배불러하는 것을 이해한 상태였다.

하리는 이곳에서 여태 핀쿠션을 의미 없이 아홉 개나 만들었다. 불안증을 해소할 소일이 필요했고, 마땅히 할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표정은 아주 어두웠는데, 단지 꼼짝없이 틀어박혀서 황제에게 바느질을 가르쳐야 한다는 현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깊은 이유는 바로 이 공간의 이름에 있었다. 이 아늑하고 평화로운 바느질 교육방의 이름은, 부조화하게도 ‘죽음의 방’이었다.

‘이 방 이름은 ’죽음의 방‘ 이지. 모든 교육이 끝나고 나면, 너는 죽어.’

하리는 엔이 웃으며 한 말을 떠올리며 울었다. 죽음의 방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간단했다. 황제 핀라이트의 취미 생활이 외부에 새어나가면 안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 이렇게 될 거면 치료비가 없어 고통을 겪으며 하늘로 간 어머니가 이 방에 와서 교육을 했으면, 교육이 끝날 때 까지 치료나 받으며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 텐데, 하고 하리는 한탄을 금치 못했다.

첫 번째 교육 이후 황제는 들르지 않았다. 열아흐레쯤 되었다. 첫 교육 시간에 하리가 했던 것이라고는 작은 정사각형 천 조각 아홉 개를 이어 누빔 과정을 거쳐 핀쿠션을 만드는 것을 가르친 것뿐이었다. 큰손을 가진 황제의 바느질은 너무나 듬성듬성한 편이었다. 일반 수강생이었다면 다시 해오라고 숙제를 낼만한 하찮은 실력에도 하리는 잘했다고 추켜세우며 칭찬을 했었다. 반말을 쓰고 친구처럼 대하라고 해도 황제는 황제, 면전에서 형편없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도 창으로 사람을 꿰어 죽이길 좋아하는 잔인한 전쟁광 황제니까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황제는 정색하며 초보인 자기가 봐도 자기 작품이 형편없는데 거짓아부를 하며 가르칠 생각이라면 당장 이 방을 나가게 해주겠다고 웃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리는 질겁했고, 결국에는 그녀가 촘촘한 바느질, 촘촘한 누비의 핀쿠션 두 개를 만들어오라는 빡빡한 숙제를 내는 것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하리는 황제의 ‘이 방을 나가게 해주겠다’는 말, 그 천진난만한 표정을 떠올리며 진저리쳤다. 모든 교육이 끝나면 너는 죽어, 죽어, 죽어……. 엔의 그 말만이 자꾸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핀시. 그때 내가 끝까지 아부를 떨었다면 지금쯤 이 방을 나가서 시체가 되었겠지? 응? 나 너무 무섭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딴 달아빠진 쿠키 따위 아무리 먹어도, 접시 째로 입에 털어 넣어도 이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어쩜 좋니? 응?”

지난 열아흐레 간 꼼짝없이 죽음의 방과 그 방 밖의 작은 정원길만 구경하고 지냈던 하리는 이미 정신분열증 초기에 이른 나머지, 인간의 말을 할 수 없는 핀시에게 수다를 떨어대고 있었다. 가끔 와서 청소와 식사를 챙겨주는 엔 말고는 그녀의 대화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에센 부인이 생전에 집필한 열세 권의 수예서적과 서음이 나오는 각종 책들, 심심하지 말라고 황제가 마술사를 시켜 만들어준 마법 생물 핀시, 정원에 흐드러진 색색의 꽃들, 그것이 하리가 머무는 공간의 전부였다. 수도 아이얄의 직물길드 디자이너로 취직하려 했던 하리의 평범한 꿈은 모두 산산이 부서졌다. 재능은 있지만 흥미는 없는 바느질을 황제에게 가르치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이 그녀의 운명이 되었다.

퀭한 눈빛의 그녀가 바느질에 지쳐 밖으로 나갔다. 나가봐야 보이는 것이라는 좁은 길을 가진 정원뿐이었지만, 그것이 유일한 산책로이기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정원의 꽃을 따서 압화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녀는 생각했다. 생화도 아니고 압화를 머리에 달고 정원 안을 히죽대며 웃고 돌아다니면 미친 여자로 찍혀 어디 가서 황제의 비밀을 발설하지는 않을 거라 여겨져 풀어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말도 안 되는 바람일 뿐이었다. 미친 사람일수록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 더욱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하리는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었다. 꽃잎을 고르다가 본가의 꽃들이 생각나 더욱 울었다. 감성이 남들보다 섬세해서 우는 울음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감금되고 죽을 운명을 앞두고 있으면 누구나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숙제 해왔어. 바빠서 한 개만 겨우 해왔네.”

황제의 나른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자, 하리는 엉망으로 일그러진 표정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첫 교육 때와 같은 편한 복장의 황제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숙제를 해왔다는 사람이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다. 아부로 교육하면 도리어 혼내는 황제, 모든 수업이 끝나면 바느질 스승을 죽일 생각인 황제에게, 하리는 괜한 친절을 부리기 싫어 솔직한 속내를 내보였다.

“숙제가 안 보이네. 제자로서 자세가 틀렸어.”

핀은 멋쩍게 웃었다.

***

무엇이든 칼같이 나눠서 하는 것은 제국을 이끄는 자에게 아주 중요한 습관이다……. 그 것은 선황 지네스테코가 황태자였던 핀에게 자주 가르친 점이었다. 핀은 자신이 매사에 칼같이 모든 면을 나누고 깔끔하게 처신해왔다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온 대륙에 사르제스의 깃발을 꽂으라는 건국이념이자 선황의 유지를 받들어 반 이상 진행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대륙 가장자리의 원시적인 부족들뿐이었다.

그렇다면 한 여자의 남편이자 아들들의 아버지로서는 어떠한가. 비록 애정 없는 결혼으로 가정을 이루었던 그였으나, 침략 전쟁으로 바쁘던 시절 말고는 가족들에게 충실했고, 비를 들이지 않았으며, 비는커녕 그 어떤 여인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큰 부를 쌓아올린 자가 작위며 권력을 얻고자 제 여식을 비의 자격으로 궁에 들이려 간청 하면 온갖 트집을 잡아 죄인으로 몰고 사형을 내리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이미 대륙의 반 이상을 흡수한 절대자에게 권력을 넘보는 이들이란 성가신 존재일 뿐이었다. 거기다 그는 황후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을 얻기도 싫었다. 자식들이 이복형제들과 피 터지는 권력 싸움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황후와 황자들을 위함이라기보다는 귀찮고 찝찝한 것을 피하려 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어쨌든 핀은 자신이 가족들에게 완벽한 남편, 아버지로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번 피비린내 나는 복수전은 어떠한가. 적은 수로 은근한 결집력을 보이며 구석구석 찾아야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셀바히트의 성직자들은 그에게 ‘완료’라던가 ‘완벽’이라는 개념을 절대 심어주지 않는 끈질긴 자들이었다. 셀바히트의 수장이 지휘한 마도사 황궁 침략사건은 그에게 소름끼치는 귀찮음을 안겨주었었다. 결국 핀은 황태자 살해 사건을 계기로 셀바히트라는 단어 자체를 대륙에서 소멸시켜 버렸다. 칼 같이 깔끔하게.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 또한 깔끔한 복수를 했으니 잊었다고 자신했다. 감정 역시 청소를 하듯 정리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실상 그가 늘 전쟁터에 나가있느라 아들들과 나눈 시간이 적었고 그만큼 부자간의 정도 희미하여 그런 생각 또한 가능한 것이었다. 그가 느낀 황태자 암살 사건의 분노는 아들에 대한 슬픔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안정을 깨트리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에 더 가깝다 할 수 있었다.

핀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았다. 정말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행동한 것일까? ‘칼같이 나누자’던 선황의 말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어딘가 나사가 풀려 비정상적으로 처신해온 것은 아닐까? 대륙 통일 전쟁에만 미쳐 단 한 번도 갈지 않은 무딘 칼로 만사를 두드려 패고 뭉개왔던 건 아닐까? 아버지보다 더 강한 황제라는 인상을 제국민들에게 보이기 위해 늘 모든 면에서 과격하게 대처한 듯했다. 그 결과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대륙 통일에 다가갈 수 있었고,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아래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 괜찮을지 늘 의문이었다. 자신은 하나의 인간으로 멀쩡한 상태인지……. 거친 껍질 속에 유약하고 평범한 정신을 가진 보통 사람인 이상 그런 위태로움과 불안함을 도무지 떨쳐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 그 누구에게 자신의 이런 혼란스러운 상태를 ‘칼 같이’ 안정시킬 수 있을까. 세 아들을 보고도 아직도 어색한 사이인 황후일까? 겨우 문자를 배우기 시작한 어린 아들들? 이제는 기억의 한 부분만 차지하는 과거 평민학교 시절의 사람들? 아주 작은 틈만 보이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부를 해대며 권력을 탐하려 하는 귀족들? 눈치만 보며 의학서의 정석대로 기계처럼 상담해주는 궁의들? 핀은 그 누구도 원치 않았다. 자신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그들은 결코 해결해줄 수도 없으며, 이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만들어진 ‘죽음의 방’이었다. 황제의 취미라고 알려지기에는 다소 잡음과 오해의 소지가 많은 바느질을 하는 공간, 황제의 불안하고 위태로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목적의 공간, 그 목적이 달성되면 사라질 공간,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었다. 장소는 황제만이 사용하는 침실, 그곳에 딸린 욕실의 벽면에 존재하는 마법가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만들어 죽음의 방을 구성해낸 마법사는 황궁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황제가 가진 마음의 문제가 처리되고 나면 그 마법사는 죽음의 방을 소멸시킨 뒤 사형당할 예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방을 담당하는 시녀장, 마법 생물 핀시, 그리고 제국 수도 아이얄에서 최고의 감각을 자랑한다는 에센 부인 역시 시간이 지나면 가공간과 함께 죽게 될 예정이었다. 칼같이 처신 하는 것을 좋아하는 황제는, 자신이 어떠한 식으로 마음의 문제를 해결했는지 그 흔적조차도 깨끗하게 없애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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