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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웃음은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의 평범한 청년의 웃음이었다.
“…… 그렇구나.”
하리는 테이블 위의 물건들, 다채로움과 다양한 무늬를 자랑하는 패브릭 뭉치, 가위, 핀쿠션, 바늘, 철 골무, 등등의 물건 즉, 죽은 에센 부인이 수공예 ‘퀼트’를 가업으로 삼으며 쓰던 물건들을 보고는 이제야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핀이 씩 웃으며 가위를 집어 들었다.
“에센.”
“응?”
“잘 가르쳐라?”
그 웃고 있는 눈빛이 너무 무서운 나머지, 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시 존대를 하고 말았다.
“네! 폐하!”
“반말!”
“응! 응! 폐하!”
그렇게 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인 바느질, 퀼트 수업은 시작되었다. 은밀한 마법의 가공간 안에서, 원래 교사로 납치되기로 했던 에센 부인의 사망으로 인해, 그 외동딸인 하리 에센과 함께.
***
사르제스의 마활은 제국 황제를 위해 충성의 맹약을 한 마법사들의 집단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마력의 크기만큼이나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권력도 막강했다.
디아세라도 한 때는 마활 소속의 마법사였다. 보통 마활이 되면 그 영광과 권력의 자리를 죽기 직전까지 누리려 하는 편이었는데, 디아세라는 달랐다. 그녀는 제국 7대 황제 핀라이트의 거침없는 대륙 정복 행보와 그에 따른 마법 전투 스크롤 생산 등 업무과다에 질린 나머지, 충성의 맹약만 유지한 채 마활에서 물러났다. 그 후에는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청춘을 마음껏, 방탕하게 즐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녀는 지금 침대에 누워 한 남자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지난밤을 함께 보냈던 그 남자는 여자를 쾌락의 끝으로 이끄는 데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여자처럼 예쁜 인상, 적갈색 머리카락은 한없이 부드러웠고, 이십대 중반의 젊은 몸은 군더더기 없이 날렵했다. 허우대와 외모가 최상급에 속하는데 침대에서도 그러한 쾌락의 마법사라 하룻밤만 즐기고 보내기에는 조금 아까운 남자였다. 그래서 디아세라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반반한데 그동안 왜 아이얄에서 좀 논다 하는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걸까, 정체가 뭘까, 어디서 또 이런 남자를 구할 수 있을까……. 풍만한 가슴을 찾으며 안겨 오는 남자의 부드러운 몸부림에 그녀는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끼며 크게 숨을 쉬었다.
“후우, 월척이군.”
그녀의 말을 들은 남자는 큭큭, 웃으며 그녀의 탄력 있는 둔부를 느슨히 어루만졌다.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몇 살이야? 제법 마력도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마법 가르쳐줄까?”
평소 그녀는 타인들에게 자신이 마활 출신인 것을 숨기는 데 급급했다. 특히나 하룻밤 즐기려 만난 상대들에게는 더욱 더 그랬다. 마법 좀 쓴다 하는 사실이 밝혀지면 하나같이 고만고만한 마력을 과시하며 그녀에게 자리나 하나 내어달라는 둥, 귀찮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그녀가 남자에게 마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한 것은 그녀 나름 최고의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서는, 대답은 않고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미소가 넘치던 디아세라의 표정이 변했다.
“뭐야, 가는 거야?”
“흠, 뭐 그렇죠. 이제 가는 것 말고 뭐 남은 일이라도 있나요?”
생글거리며 대답하는 남자의 태도는 간밤 여자를 존귀한 보물 대하듯 안은 자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디아세라는 갑자기 그가 간사스럽고, 얄미워 보였다. 자존심이 상하면서 짓궂고 질척이는 농담이 나왔다.
“너, 그물 걸려본 적 있어?”
마력을 사용하는 그녀였기에 특정 대상의 위치를 항상 파악할 수 있는 마법쯤은 일도 아니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걸어 봐요. 안 걸릴 거겠지만.”
“그게 무슨 말이지?”
남자는 셔츠의 손목 단추 하나하나를 차분하게 잠그며 대답했다.
“당신보다 내 마력이 높다는 말이에요.”
남자는 마활 출신인 디아세라보다 자신의 마력이 더 높다고 말하고 있었다. 디아세라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 한참을 깔깔 웃었다. 남자가 정말 마력의 소유자라면, 디아세라는 그것을 진즉 감지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무마력자였다. 적어도 디아세라가 느끼기엔 그러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너 내가 누군지 모르나 본데, 마활이라고 들어는 봤니?”
“아주 지겹도록 들어봤어.”
“그치? 그걸 모르는 제국민들은 없잖아. 응. 사실 이 누나가 거기 출신이거든?”
“근데?”
“내가 거기 출신이라니까?”
“응…… 어쩌라고?”
남자의 갑작스러운 하대에 디아세라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디아세라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하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대귀족, 혹은 부유층 손님을 상대로만 놀던 고급 창기로, 그 출중한 외모 덕에 손님들이 오냐오냐 버릇을 잘못 들인 터인지도 모른다는 예상. 만점을 줘도 부족할 것 같은 침대 매너와는 반대로 마무리가 아주 안 좋으니, 버릇을 단단히 길들여야겠다는 작정과 함께 디아세라는 남자의 몸을 마력으로 속박하려했다. 그때였다. 그녀는 갑자기 머리가 지잉, 하고 울리는 느낌과 함께 천장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남자는 그녀의 몸에서 이불이 흘러내리자 두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며 장난을 쳐댔다.
“와우, 가슴 보인다!”
디아세라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대체 누가 마활이었던 자신, 마력이 강한 자신을, 이렇게 허공으로 올려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남자를 의혹 가득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남자는 눈을 가린 손가락이 무색하게 그 손가락 사이로 디아세라의 몸을 빤히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사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어딜 그딴 후진 마력으로 날 속박하려 해?”
마활 시절 조직 내 5위계의 마력을 가졌던 디아세라는 1위계 마활에게서 느낀 것 보다 더욱 큰 마력이 남자의 몸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온 몸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뭐지, 이 남자! 여태 마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반반하게 생긴 하위 귀족 한량이나 창부 쯤 인 줄 알았는데 대체 정체가 뭐야?’
남자는 외투를 걸쳐 입었다. 그리고는 충격에 가득 찬 디아세라의 표정, 그녀의 당황스러운 의혹을 빠른 시간에 풀어주겠다는 듯 말했다.
“어쨌거나 당신 재미있었어. 그리고 요즘 은퇴해서 잘 모르나본데, 내가 누군지 궁금해 하는 표정이 꽤 예쁘니 뭐 가르쳐 주도록 하지. 나, 히엘이야.”
히엘? 히엘……. 설마, 히에라지엘? 디아세라가 그 이름을 듣고 예를 갖추기도 전에 남자는 그곳에서 사라져버렸다. 마력을 사용한 순간이동이었다.
히에라지엘 델 사르제스. 그는 제국 황제 핀라이트의 하나뿐인 형이자, 약 십 년간 마력 수련을 위해 대륙 곳곳을 누비고 다니느라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은 자로, 현재 사르제스의 마활 탑(위계1)의 신분이며, 그 미모에 관한 소문 덕분에 ‘제국의 공주’ 혹은 그 방탕한 사생활 때문에 ‘제국의 탕아’ 라 불리고 있었다. 디아세라는 자신이 어젯밤 히엘을 ‘선택’ 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디아세라가 히엘에게 선택당한 것이었다. 황궁 사정에는 관심이 없어 줄곧 외면하고 있던 은퇴 마활인 디아세라는 뒤늦게야 황형을 알아차린 것에 놀라며, 탄성을 터뜨렸다.
“이게 웬 대박이야! 나, 다시 마활 들어가고 싶어졌어!”
***
가이덴교를 국교로 삼은 사르제스 제국과 가장 대립하던 나라는 셀바히트 교국이었다. 이종교간의 신경전이야 흔히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었지만, 셀바히트 교국은 사르제스 제국에게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사르제스 제국군이 셀바히트 교국왕과 그를 추앙하는 포로들을 한 창에 꿰어 죽이고, 그 외의 모든 사제와 신도들을 화형에 처해도, 그들의 맹신도들은 사르제스 영토 곳곳에서 크고 작은 보복성 사건을 일으키는 끈질김을 보였다.
핀라이트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과시하며 당당히 들이닥치는 나라를 환영할지언정, 셀바히트와 같이 가느다랗게 신경을 긁는 나라를 가장 혐오했다. 다소 과격한 방법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차라리 대륙에서 셀바히트라는 이름을 다 지워내는 것이 편할 듯 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셀바히트 출신인들을 마법 수용소에 보내 영혼까지 소멸시키는 대학살을 감행했다. 이에 과거 셀바히트 상업길드를 이끌던 대상인 출신인 제 3 재상이 분노의 역모를 꾀하여 제국 황궁에 수십 명의 마도사들을 침투시켰다. 하지만 너무나 무모한 시도였다. 그들은 모두 사르제스의 마활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단 한 명, 핀라이트의 첫 아들이자 황태자를 죽인 자를 제외하고서.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핀은 제 3 재상과 관련한 모든 사람들을 사형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미 이 잡듯 뒤져 불태웠던 셀바히트 교당을 추가 수색 제거, 셀바히트 성전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국적에 관계없이 모두 처형하였다. 그의 뜻대로 정말로 대륙과 역사에서는 셀바히트라는 이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병력, 인력이 낭비되었고 황제의 최측근들은 불만을 표시했으며 태후마저 첫 아들을 잃은 슬픔은 헤아리나 더 이상의 복수는 그만하라고 황제에게 역정을 내었다.
그렇게 약 보름이 지난 시간. 핀라이트는 겨우 평정을 되찾고 하리 에센이 있는 가공간을 다시 찾았다. 피를 머금은 폭풍 같은 복수의 시간 뒤, 그에게는 안식이 필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