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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2화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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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의자에 편안하게 잠들어 있던 하리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커다란 눈, 초록색 눈동자가 실내를 살폈다. 시녀 엔은 하리의 눈동자가 참 예쁘다고 생각하며 인사를 했다.

“안녕? 이름 뭐야? 성은 알겠는데.”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갈색 머리의 시녀 엔을 보고 하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리는 스물네 살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반말을 듣는 것은 앳된 얼굴로 살아오면서 충분히 익숙해질 만도 한 일이었으나, 어째 매번 언짢기만 했다. 그래도 일단 이름이 뭐냐는 질문에 대답은 나왔다.

“하리 에센. 나 스물넷인데, 넌 몇 살이니?”

그러자 엔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서른 살. 나는 엔이야. 엔 ‘언니’라고 부르렴.”

하리는 패배감을 느꼈다.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동안 겨루기가 일어난 것 같은데, 십대 후반의 얼굴로 자신이 서른 살이라 말하는 엔에게 철저한 패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엔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제야 자신이 신성 마도사의 주문을 듣고 마차 안에서 의식을 잃게 된 것을 떠올려냈다. 그녀는 흔들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을 에워 싼 주변은 온통 풀색, 상아색, 연보라색 등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색채들뿐이고, 가구들 역시 호두나무색 목재로만 만들어져 아늑한 느낌이었다. 납치된 장소 치고는 너무나 평화롭고 따뜻한 장소였다. 의아함에 하리는 찻잔에 차를 따르는 엔의 팔을 살짝 잡았다. 엔이 웃으며 하리의 얼굴을 보았다.

“응?”

“여기 어디죠?”

그러자 엔이 붉은 열매가 잔뜩 들어간 쿠키 하나를 내밀며 대꾸했다.

“황제 폐하의 궁이지.”

황제 폐하라는 말에 하리는 이 상황이 꿈인가 했다. 사르제스 제국 7대 황제 핀라이트 델 사르제스가 누구던가. 그를 둘러싼 모든 소문들을 하리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황제는 공포의 대왕, 사신, 악귀, 그 모든 무서운 존재들의 총칭이었다. 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허구한 날 전투에 참가하는 고집쟁이 전쟁광. 적국의 수장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고는 모르는 사람. 하늘위로 창을 올려두고 포로를 하나씩 던져 꼬챙이 꿰듯 사살시키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알려진 살육 변태. 그런 잔인한 성격이라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이라는 별명조차 점잖게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그런 황제가 이런 곳에 산다고? 이곳이 황궁이라고? 실감이 나지 않은 하리는 한동안 멍하니 정지된 채로 있었다.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 보며 엔이 말했다.

“하리는 앞으로 내 허락 없이 방 밖으로 나가면 안 돼.”

그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하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째서요?”

“폐하의 ‘은밀한 욕구’를 해소시켜 드려야 하거든. 그건 철통같은 비밀 보장이 필요한 일이라서 말이야.”

“네? 은밀한 욕구요?”

스물네 살, 에센 부인의 일을 도우며 따분할 정도로 곱게 살아온 자신이 제국의 핏빛 강철 검에게 해소시켜 줘야 할 은밀한 욕구란 대관절 뭐란 말인가. 하리는 엔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듣기 위해, 그녀를 졸졸 따라다녔다. 쿠션을 매만지며 부지런히 방의 이것저것을 정돈하는 엔의 표정은 그저 심드렁할 뿐이었다.

“저기, 저기…….”

엔은 주변을 한 바퀴 슥, 둘러보다가 난감해하는 하리의 등을 탁, 쳤다.

“폐하를 잘 부탁한다?”

그리고는 방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겨진 하리는 엔을 따라 나가려다, 허락 없이 나가면 안 된다는 말에 멈추었다. 그리고는 다시 흔들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핏빛 강철 검의 궁에 납치된 현실, 그 실감과 공포는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

황제 핀라이트가 그 방에 온 것은 엔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하리는 황제가 온 줄도 모르고 방의 구석, 어느 서랍장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서랍장에는 에센 부인의 가게 물건과 같은 종류의 물건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어머니가 다루던 물건을 본 하리는 눈물을 흘렸다.

‘엄마,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하리가 손으로 눈물을 훔칠 때였다. 황제가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기척을 느낀 하리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굳고 말았다. 큰 키의 젊은 남자가 웃고 있었다.

“에센이라, 상상도 못 했네.”

황제의 목소리와 말투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볍고, 시원하고, 맑았다. 검정색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대충 질끈 묶은 머리 모양은 흐트러진 인상을 주고 있었다. 복장 또한 평범했다. 새하얀 셔츠는 어떤 장식도 없는 수수한 디자인이었고, 검정색 바지는 낡은데다가 잔 구김이 가득 있었다. 목이며 소매며 단추가 하나 둘 느슨히 풀어져있었고, 허리를 감싸는 띠조차 없었다. 하리는 제국 수도 아이얄의 광장에 크게 걸려있던 황제 핀라이트의 초상화를 떠올려보았다. 그림 속 또렷한 눈, 코, 입, 그 잘생긴 얼굴에는 어떤 흉터도 없었지만 지금 눈앞의 남자는 눈과 이마에 걸쳐 길게 칼자국이 나있었다. 눈매는 초상화보다 훨씬 사나웠고, 푸른색 눈동자 또한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수수한 차림새에 가려져있지만 눈동자만으로도 살육자의 기운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리는 그가 황제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던 하리의 표정에 겁이 스몄다.

황제는 흔들의자로 다가가 편히 앉으며 하리를 쳐다보았다. 여유가 넘쳐나는 그의 표정에는 소시민의 기분을 살피는 섬세함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또 한 번 황제의 입에서 가벼운 말이 나왔다.

“왜 우는데?”

“소, 소녀, 소인, 미천한 제가 황제 폐하께 인사 아뢰…….”

궁정예법을 통 알 수가 없는 하리가 허리 숙이고, 고개 숙이고, 어영부영 굽실대는 태도로 인사를 하려하자, 황제는 손을 내밀어 됐다는 시늉을 했다.

“아, 핀이라 불러. 네 친구 대하듯 해.”

“예, 예?”

“반말해라.”

“예?”

“반말하라고, 반말. 대답?”

잔뜩 겁을 먹은 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응!…… 응!”

푸아, 하고 핀이 웃었다. 하리는 황제가 웃자 그의 날카로운 눈이 더욱 가늘어져 무서웠다. 그녀는 갑자기 엔이 하던 말을 떠올렸다. 은밀한 욕구 해소, 은밀한 욕구 해소, 상대는 황제, 그렇다면……? 그때 황제가 쿠키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뭐해? 어서 하지 않고.”

하리는 잔뜩 긴장하며 추측했다. 역시, ‘그거’구나. ‘그거’. 은밀한 ‘그거’.

침을 꿀꺽 삼킨 그녀가 원피스의 단추를 하나, 둘 씩 풀기 시작했다. 황제의 가느다란 눈매가 커졌다. 하리는 그 표정을 빨리 옷을 벗으라는 신호로 알아듣고 더욱 두려워했다.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단추 푸는 손에 속도를 더해갔다. 처음이지만 아무튼 잘 되겠지, ‘성실’하게 임하면 죽이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그때 성큼성큼 황제가 하리 쪽으로 걸어갔고, 하리는 더욱 겁을 먹고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황제가 하리의 손을 잡았다.

“너 에센 맞아?”

“예?”

“반말.”

“예?”

“반말!”

“응, 응! 나, 에센 맞는데요, 아니, 맞는데. 하리 에센.”

“근데 뭐가 이리 생각보다 젊어?”

젊으면 오히려 좋은 것 아닌가요. 아니, 황제 폐하께서는 혹시 중년이 취향이신……? 별의별 의문을 다 담은 눈으로 하리가 황제를 보았고, 황제는 하리의 단추를 다시 잠가버렸다. 그리고는 하리를 지나쳐갔다. 그의 하얀 셔츠가 그녀의 원피스에 가볍게 닿았고, 그녀는 또 한 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아, 대체 뭘 하려는 거야!’

황제가 그녀를 스쳐 지나쳐 간 곳은, 그녀가 구경하고 있던 서랍장이었다. 황제는 서랍장의 물건 즉, 에센 부인이 다루던 물건들과 같은 물건을 한 움큼 손에 쥐고 테이블로 걸어갔다. 물건들을 테이블에 펼친 그가 다시 흔들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뭐 에센이 맞으니 할 줄은 알겠지. 어서 해.”

하리는 테이블 위, 황제가 내려둔 물건들을 한참 보았다. 그리고 에센이라는 자신의 성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의 가족은 어머니와 자신 단 둘 뿐이었다. 자신을 보고 생각보다 젊다고 말하는 황제, 어쩌면 황제는 ‘하리 에센’을 ‘에센 부인’으로 착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하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하께서는 지금 내게…… 어머니가 하신 일을 시키는 건가?’

그제야 하리는 황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순간, 옷을 벗으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안 해? 나 바빠. 뜸들일 시간 없어. 너도 잘 알 텐데.”

“하, 할게요.”

“반말.”

“할게!”

하리는 테이블로 걸어가, 핀과 마주보고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 에센 부인이 사용하던 물건 중 가장 작은 것을 하나 빼들었다. 핀도 그것과 같은 물건을 똑같이 들었다. 그 물건은 아주, 아주 작고, 가느다란 물건이었다. 하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은 어머니가 아니지만, 어머니가 했던 일을 거의 다 할 줄 알았으니 겁먹을 것 없었다. 황제가 손에 든 자그마한 물건을 살펴보며 물어보았다.

“근데 원래 이렇게 작아? 내가 쓰던 것 보다 더 작은데.”

“자, 작아요.”

“아, 진짜. 반말!”

“자, 자, 자, 작아. 원래 쓰던 것은, 어, 어떤 건데?”

“아주 큰 거였지. 그래서 좀 듬성듬성 하게 되었지만. 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이젠 좀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서.”

“그렇구나. 일단, 나인패치가 뭔지를 가르쳐 줄게.”

“좋아.”

“저…… 근데.”

“응?”

하리는 자신이 황제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현실이 무서운 꿈처럼 느껴졌다. 이왕 꿈 인 것, 제대로 사연이나 알고 싶었다. 그래서 거침없이 질문해보았다.

“핀은 혹시, 이런……… 바느질이 취미였어?”

그러자 사르제스 제국 7대 황제 핀라이트 델 사르제스는 2.3cm 의 작은 바늘을 든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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