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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은 사르제스 제국 7대 황제 핀라이트 델 사르제스의 군대가 일으킨 전쟁으로 통일을 앞두고 있었다. 평화의 시기가 가까워오자 스물세 살의 젊은 황제는 문득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여유를 부릴 틈 따위는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베일에 싸인 유년 시절은 치열하고 잔인한 사건들로 가득 차 그를 굴리고 흔들며 대륙의 지배자로 만들기 위한 포석을 깔아두었다. 그 시간을 지나 황태자로 책봉되었던 열일곱 살에는 가이덴(천국)교의 대주교 딸과 혼인을 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대륙 정복전이 시작되었고 그의 세 아들들은 차례차례로 세상에 나왔다. 그때마다 그는 대륙을 피로 휘젓고 정복하며 제국의 깃발을 꽂느라 바빠서 아들들의 탄생을 제대로 축하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삶이었다.
현재 그는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이라던가, ‘사신’ 따위의 여느 폭군들에게 붙는 유치한 별명과 함께, 전쟁광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 방식은 주로 파괴 스크롤이 사용되는 마법전으로 굳이 황제가 전면에 나설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이 직접 적진에 뛰어들기를 고집했다. 대신들의 반대란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화친을 거부하는 나라의 수장들은 자신의 성검으로 찔러 죽였다. 화친을 받아들인 이들 역시 그의 성검과 창에 찔려 죽음을 맞이했고, 그 죽음은 대륙의 평화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 포장되었다. 그런 식으로 핀라이트는 대륙의 모든 이들에게 공포를 심어 사르제스 제국에 충성케 했다. 권력은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패기를 넘어선 광기에 휩싸여있다고 무서워했고, 어리고 무모한 황제라고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으며, 전쟁 없이는 하루도 못사는 살육 중독자라고 손가락 질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단 한순간도 그 피비린내 나는 시간을 즐긴 적이 없었다. 단지 아버지의 유지라 어쩔 수 없이 그리 해왔다고 스스로를 변호할 뿐이었다. 선황 지네스테코가 그렇게나 바라던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지금, 그는 난생 처음으로 자기 자신만의 휴식 시간을 가지고자 했다. 정말 하고 싶었던 그 무언가, 어떤 욕구, 숨어서 혼자서만 해왔던 일들을 하며 스스로를 치유하고 싶은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한 마법사를 시켜 자신의 욕실 속에 은밀한 가공간을 만들었다. 이제부터 그는 그 가공간 속에서 자신의 숨겨진 취미를 즐겨보기로 했다. 편안히, 느긋하게, 어린 시절처럼, 그 누구도 모르게.
***
그가 열두 살, 아직 황태자가 되기 전이었다. 갑작스러운 선황의 지시로 그는 어느 평민 학교에 입학해 허름한 기숙사의 골방에서 지내야했다. 그곳에서 광부 토슈의 넷째아들이라는 거짓 신분으로 수업을 받았다. 초반엔 그 일들을 아주 신나게 즐겼다. 황자로서 받아왔던 수업들과는 전혀 다른 수업들, 궁에서 겪을 수 없었던 여러 색다른 경험들에, 아예 처음부터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평민들은 지저분하고, 품위가 없었으며, 상스러운 말투를 썼지만, 그만큼 활기와 순진함, 편안함이 있어 유쾌하고 즐거웠다.
그러나 그런 생활들 보다 더욱 그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황자였던 그가 절대 궁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은밀한 취미, 특별한 '어느 것'이었다. 이제 선황이 정복하라 하였던 땅들은 대륙 변방을 제외하고 전부 가진 상태였다. 그는 그 취미를 슬슬 다시 시작 해봐도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놓고 즐기기엔 민망한 면이 있었다.
***
사르제스 제국 수도 아이얄의 서쪽 지구에 위치한 어느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에센 부인이 죽은 지 오늘로써 엿새째다. 그녀가 생전에 원하던 가이덴(천국)교식 장례식이 오늘 치러질 것이다.
그녀의 딸 하리 에센은 일어나자마자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다. 하늘색은 가이덴을 상징하는 색깔이었다. 하리는 세수를 하고, 붉은 단발머리를 곱게 빗고, 팔목에 하늘색 면 끈으로 만든 팔찌를 둘렀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수수한 하늘색 면 끈 팔찌는 그녀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에센 부인은 항상 딸에게 하늘색 팔찌가 가이덴 신자의 표식이라 가르쳤고,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몸에 지니고 있으라고 말했다.
현관문이 천천히 열렸다. 하리는 마당 화단에 있는 시드는 꽃들을 바라보았다. 올 봄, 어머니와 함께 화단에 그 얼마나 많은 씨앗을 뿌리고 돌보아 왔던가. 하리는 물 조리개에 물을 담아 화단에 뿌리며 꽃들이 시들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때 대문 밖으로 마차 한 대가 섰다. 마차에서 하늘색 사제복을 입은 가이덴교 사제가 나와 하리에게 인사를 했다.
“가이데스의 축복이 있기를.”
“가이데스의 축복이 있기를.”
하리는 사제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한 뒤, 마차에 올랐다. 얼마 후, 마차는 가이덴 신성묘지에 도착했다. 에센 부인의 무덤 둘레에는 이미 하늘색 꽃이 한가득 뿌려져있었다. 사제는 하리를 세모 모양의 비석 앞에 서도록 한 뒤, 두꺼운 기도문을 펼쳤다. 책이 몇 장쯤 넘어가자, 에센 부인을 추모하는 서문이 서음(책 자체에서 나오는 마법음)으로 흘러나왔다. 엔데리아 에센, 그녀의 영혼은 낙원의 빛을 따라 천국으로 갈지니……. 긴 추도문을 들으며 하리는 묘지를 바라보았다. 신성 마도사는 주문을 외웠고, 곧 하늘색 꽃이 팟-하고 빛의 가루가 되어 묘지 아래로 스며들었다. 몇 십초의 시간이 흐른 뒤, 땅 속으로 들어갔던 빛들은 다시 밖으로 튀어나와 하얗고 커다란 빛의 구슬을 이루어 하늘로, 구름 밖으로 사라져갔다.
“가이덴으로 가시길.”
기도를 하는 사람은 상주인 하리뿐이었다. 어떤 가게를 운영하며 ‘제자’를 많이 두었던 에센 부인이었지만, 막상 장례식에 찾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리는 이 쓸쓸함이 전부 타인들에 대한 어머니의 가이덴 개종 강요가 불러온 것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 고독한 장례식에 조문객이 단 한명도 없는 그 진짜 이유를,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장례식이 끝난 하늘을 바라본다. 지금쯤 어머니는 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실까. 그렇게나 원하시던 가이덴 식 장례식에 만족하실까.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엄마, 안녕. 잘 가실 거라 믿어요.”
사제는 하리를 마차로 인도했고, 그렇게 하리는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갈 줄 알았다.
[핑리스.]
함께 탄 신성마도사가 갑자기 외운 주문에 그녀는 마차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으며, 마차는 그녀의 집이 아닌 황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