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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2화. (75/75)

외전 12화.

“혹시 임신이 아닌가 해서.”

“예에?”

임신이란 말에 사빛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두 번 다 그랬거든.”

“그렇지만…… 생리했는걸요.”

임신을 기다리는 건 누구보다 사빛 자신이었다. 그래서 달거리가 찾아옴이 반갑지 않던 차였다.

“음, 그래? 그럼 임신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근데 그거 착상혈일 수도 있어. 우선 약 먹기 전에 확실히 하는 게 좋으니까 지금 나랑 병원에 가 보자.”

“…….”

“무서워할 것 없어. 간단한 검사야.”

태연을 따라 강남의 한 산부인과에 오게 된 사빛은 마주한 의사에게 자신의 증상들에 대해 말하고 커튼 뒤의 침대에 몸을 눕혔다.

회사로 돌아온 사빛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일하다가 퇴근길에 약국에 들러 임신 테스트기를 샀다.

병원에서는 초음파 검사 결과 아기집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의사는 초기라 그럴 수 있으니 피 검사를 해 보자고 했고, 그 결과는 내일 문자로 알려 주기로 했다.

수치가 높으면 임신일 수 있으니 며칠 후 다시 한번 검사해 본다고 한다. 해서 기다리면 될 것인데 어쩐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사게 된 테스트기였다.

떨리는 마음 반, 기대하지 말자는 마음 반으로 상자를 개봉해 사용법을 읽어 보니 아침에 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한다.

한숨을 푹 내쉰 사빛이 그만 진정하자고 생각하며 테스트기를 화장대 서랍에 넣고 1층으로 내려갔다.

사빛은 여란과 단둘이 저녁을 먹었다. 이훤이 중요한 일정 때문에 늦는다고 해서 10인용 긴 식탁에 둘만이 마주 앉았다.

식사 후 절인 살구와 올리브가 담긴 접시를 들고 거실로 나온 여란이 찻주전자 세트를 들고나오는 사빛에게 이리로 오라고 손짓했다.

여란이 자리 잡은 곳은 비 내리는 정원이 잘 내다보이는 창가 테이블이었다.

사빛이 도기 세트를 테이블 위에 놓고 의자에 앉아 보니 여름의 무수한 나뭇잎에도 비가 축축이 젖어 흐르고 있다.

운치 있는 전경 너머로는 보안 요원과 겨울이 운동하듯이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은 산책하러 나가고, 또 한 번은 저렇게 운동시키면서 볼일을 지정된 장소에 보게 한다.

사빛은 우비를 입은 겨울의 큰 발에 빗물이 첨벙첨벙 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여란이 물었다.

“무슨 걱정 있니?”

사빛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또 멍해졌나 보았다.

“아, 아뇨.”

걱정하실까 봐 등을 곧추세운 사빛이 표정도 다잡았다.

아기를 가지기 위해 준비한 지 이제 겨우 두어 달이었다. 벌써 이렇게 조바심을 내다니. 이러는 건 언제 생길지 모를 아기에게도 좋지 않았다.

사실 천천히 가져도 된다. 그들은 젊으니까 건강만 하다면 언젠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1년 전 꿈속에서 잃은 아기가 제 아기가 아니고 이훤의 동생이었을지 모른다는 걸 깨달았는데도 이상하게 간절히 바랐다. 갈망하게 된다.

“아침에 몸살 기운이 있다고 하더니. 영 안 좋으면 쌍화탕이라도 마실래?”

“아뇨. 몸은 괜찮아졌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다행이구나.”

“저…… 할머님.”

“응?”

“제가 작년 겨울에 꿈을 하나 꿨는데요.”

사빛이 지난 꿈에 관해 여란에게 설명했다. 갑자기 너무 궁금해졌다.

“진현당 연못에 크고 화려한 봉황새가 한 마리 있었어요.”

“봉황?”

“네. 연못 주변을 노닐다가 오동나무 맨 끝에 앉아 먼 데를 보더라고요. 아주 평화롭고 조용한 광경이었어요.”

“그래?”

“그런데 얼마 전 봄 휴가 때 또 같은 장소에 있는 봉황 꿈을 꿨어요. 이번엔 연못에서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더라고요. 넓은 하늘에서 훨훨 나는 걸 보다가 잠에서 깼는데, 이것들이 다 무슨 꿈일까요?”

“오동나무에 내려앉는 봉황 꿈은 훌륭한 인재가 세상에 뜻을 펼칠 때가 왔다는 뜻이고, 봉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꿈은 세상을 이롭게 할 새로운 인재가 나타난다는 뜻이지. 그러니 두 번째 꾼 꿈은 태몽일 확률이 커.”

“예에?”

“아기, 임신했니?”

* * *

어느 가을이었다.

가느다란 고수머리가 실바람에 부드러이 흩날렸다 가라앉았다.

투명하리만치 흰 피부와 흑진주같이 새까만 눈동자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아이가 진달래 꽃잎 같은 입술을 달싹거린다.

“잠…… 리.”

볼록한 똥배를 고급 멜빵바지 안에 감춘 아이는, 갯바위 위를 한가로이 노니는 큰밀잠자리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는 뭐든지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라든지,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이라든지, 제 머리보다 큰 먹이를 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개미라든지.

뒤에 선 영희는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때 들려오는 나직한 소리.

“호야.”

반가운 목소리에 아이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바빠도 너무 바쁜 아빠는 주말인 오늘도 일하느라 함께 내려오지 못하고 이제야 왔다.

“빠!”

오빠 호가 외치는 혀 짧은 소리에 방영희의 푸근한 품에 오동통한 뺨을 묻고 있던 동생 하도 잠에서 깨어났다.

조금은 긴 머리카락과 리본 머리띠만 아니라면 호와 아주 똑같이 생긴 아이였다.

권씨 성을 가진 아빠와 섬씨 성을 가진 엄마 사이에 태어난 진현당의 쌍둥이 아기씨들, 권섬호와 권섬하였다.

좀 더 가까이 있던 하가 두 손을 내밀자 이훤이 한쪽 팔에 안아 들었고, 뒤뚱거리며 호가 도착하자 한 무릎을 굽히고 앉아 또 다른 팔에 안아 들었다.

방영희가 기다렸다가 인사했다.

“오셨어요.”

이훤이 대답했다.

“네, 그 사람은요?”

영희 부부를 대하는 것에 예전과 달리 일정한 거리가 생겼지만 적의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런 예의 바른 태도가 그들 관계에서나,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도 나을 것으로 판단했기에 이훤 스스로 행하는 것이다.

“저 바위 너머에 계세요. 모셔 올까요?”

“제가 가죠.”

이훤이 아이들을 안은 채 사빛이 마을 아주머니들과 굴을 따고 있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머지 일은 영희에게 맡기고, 네 가족은 한가로이 바닷길을 걸었다.

정확히는 세 사람이 걷는 길을 이훤이 한 발 뒤에서 느리게 뒤따르는 것이다.

길게 굽은 해안선을 따라 걷자니 철썩거리며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소리가 하루의 노고까지 쓸어 가 주는 듯하다.

온종일 머리를 복잡하게 했던 일들이 사라지고 오로지 자연과 저들만이 그에게 남았다.

“잠…… 리, 잠리.”

오늘은 잠자리에 푹 빠진 호가 두 손을 내밀고 잠자리를 쫓으며 연신 말했다.

“잠자리가 좋아?”

이훤의 물음에 아이가 포실한 얼굴을 주억거렸다.

잠에서 완전히 깨자마자 거추장스러운 머리띠부터 벗어 던진 하는, 앞을 향해 종종 걸어가다 문득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하야, 안 돼.”

바로 뒤에 있던 엄마의 낮은 경고에 아이가 고개를 꺾으며 돌아보았다. 조약돌 같은 오른손에 모래가 한 움큼 쥐여 있다.

사빛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한번 안 된다는 신호를 주자 하가 아쉬운 듯 손에 있던 모래를 땅에 떨궜다.

이훤은 피식 웃음이 났다.

요즘 들어 왜 자꾸 흙을 먹으려고 드는지 모르겠다.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뻘게다!”

호가 큰 잠자리를 따라 어디론가 가려 하자 사빛이 아이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끌기 위해 외쳤다.

물기 있는 모래에 손톱만 한 뻘게가 빨빨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보니 저기도 있고, 저쪽에 또 있다.

아직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금세 뻘게 구경에 빠져들었다.

부부는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지켜봤다.

저 멀리 물새들이 떼지어 날아올랐다.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는 철새 무리로 매년 이곳에서 쉬어 간다.

또다시 느릿느릿 걷는 이훤의 시선은 앞서 걷는 세 사람에게 머물러 있다.

규칙적인 파도 소리. 끼룩거리며 우는 갈매기들의 날갯짓 소리.

들꽃 같은 얼굴로 엄마 주위를 팔랑거리는 아이들. 사랑스러운 나비를 쫓는 눈으로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엄마.

그리고 그들의 예쁜 웃음소리.

바람에 찰랑이는 사빛의 부드러운 머릿결. 세 사람의 뽀얀 살결.

한참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훤이 시선을 바다로 돌렸다.

커다란 수면 위로 떨어진 햇살에 바다는 무수한 별을 품고 있는 듯 반짝거렸다.

하늘엔 윤곽이 뚜렷한 수직 구름이 낭떠러지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하얀 포말이 쉼 없이 밀려왔다.

“오늘 하루 잘 지냈나요?”

그녀의 고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볼록한 이마와 가지런한 눈썹, 길게 말린 속눈썹과 오뚝한 콧날이 지는 해를 받아 크고 작은 음영을 그렸다.

허리에 팔을 감으며 도톰한 입술에 입술 도장을 쿡 찍었다. 가만히 선 채 눈을 반쯤 내리깔고 그의 입맞춤을 받는 그녀. 그윽하게 내려 보다가 다시 한번 입 안 가득 품었다.

보들보들하고 따뜻한 숨을 폐부 깊은 곳까지 쭈욱 빨아들인 후 아쉬움의 입술을 떼어 냈다.

입 도장까지는 말없이 받아 주다가 기습 키스를 당하자 원망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

그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이 말을 아직 안 했더라고.”

“뭔데요?”

“사랑해.”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어느 날, 누가 내다 버린 것 같은 낡은 캐리어 하나 끌고 진현당을 찾아온 그녀에게 불쑥- 부부니까 키스하자고 했던 그 날처럼 뜬금없었다.

“…….”

“사랑해, 사빛아. 내가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너를 생각하면 미칠 듯이 심장이 뛰고, 아려.”

그런 그를 빤히 보던 사빛이 웅얼거리듯 대꾸했다.

“……그건 나도 그래요.”

목소리가 작았는지 그가 진한 눈썹을 들어 올리며 얼굴을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그러고선 되묻는다.

“응?”

“그건 나도 그렇다고요.”

사실 그녀는 그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순간들에도 그랬다.

“언제나 그랬어요.”

그녀의 말에 그가 입매를 길게 늘이며 새벽 태양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촉촉한 물기에 젖어 반지르르한 윤이 나는 아름다운 빛이었다.

『그대 없이는』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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