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 * *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군청색 원피스가 귀여웠다.
하얀 잔꽃들이 수도 없이 찍혀 있다.
목과 등이 브이 자로 파여 있고, 치마 단이 넓어 걸을 때마다 찰랑거렸다. 마치 밤의 들꽃들이 달빛 아래 물결치는 듯했다.
그와 함께 가기로 했던 펍에 입고 간다며 준비한 옷이었다. 오래된 벽돌 건물의 외부 테이블과 어울린다나.
그 외에도 그들은 이번 여행을 위해 많은 걸 계획했었다.
그게 아쉬웠던지 그녀가 홀로 여행을 떠나왔다.
미안하고 안타까웠던 참인데, 그녀와의 통화 후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약속된 저녁 식사를 재빠르게 마치고 자리를 빠져나와 차를 달렸다.
딱 세 시간 걸렸다.
오는 도중 통화로 영화 한 편 보거나 사우나라도 다녀온 후 맥주 바는 딱 10시에 가라고 신신당부해 놓았다. 눈치채면 못 오게 할 것이 뻔하니 은근하게.
도착하니 9시 50분이었다. 적당한 시간이었다.
로비 의자에 앉아 있자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군청색 원피스의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곧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가까운 저만치 유리문을 열고 옆 건물로 향했다.
바라보다가 멀찌감치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뒤따랐다.
그는 원래 느리게 걷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녀의 뒤에서만큼은 할 수 있었다.
그녀가 도착한 맥주 바는 규모가 상당했다.
직원과 몇 마디 나눈 그녀는 야외 테이블 하나에 자리 잡고 앉아 메뉴판을 유심히 보았다.
큰일에는 결단력이 상당한 편이나 사소한 일은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그녀였다.
이번에도 역시 주문할 것들을 쉬이 고르지 못하고 미간을 접은 채 골몰하고 있었다.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천천히 그녀의 앞에 가 섰다.
그녀는 주문받으러 온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인지 메뉴판을 빠르게 훑으며 당황해했다. 그러다 곧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고개를 든다.
“어?”
그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 했다. 그가 옆자리에 앉으며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나 없이 이런 데 올 생각을 하다니.”
작은 어깨에 팔까지 둘러 제 쪽으로 잡아당기니, 이훤은 이제야 온종일 덜그럭거리던 마음이 좀 괜찮아졌다.
지난 1년간 하루도 떨어져 자 본 적이 없는 그들이었다.
그는 그녀가 곁에 있어야지만 안심이 됐다.
처음에 이상한 꿈을 꾼 뒤로 종일 그랬지만 점차 나아져 조금씩 떨어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 일도 곧잘 해내던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혼자 자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단순한 허전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데 그녀가 집도 아닌 더 먼 곳, 호텔에서 혼자 잘 거라고 하니 굉장히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그는 어쩌면 영기가 말했던 ‘의처증’이 맞는지도 모른다.
딱 그렇지는 않아도, 그런 기질이 있다는 걸 그녀라는 사람을 통해 알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뭐 하나에 꽂히면 유난스럽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알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녀가 그런 저를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싶을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항상 멋진 사내로 보이고 싶은 그였다. 그래서 겉으로 많이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사안이 중대해 어쩔 수 없이 서해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강원도 산골이었다.
온종일 나사가 몇 개 빠진 것처럼 정신이 흐물거리고 먼지라도 된 것처럼 공허했다. 그녀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달려왔기에 그는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라도 올 수 있는 곳이어서 다행이었다.
곁에 앉자 안정이 좀 되었다. 그녀만의 알싸한 살 내음이 코로 밀려들었다. 그러자 또 물색없이 한곳에 피가 몰리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마 그녀는, 그만이 맡을 수 있는 특별한 페로몬을 연신 뿜어내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냄새를 풍기며 눈을 동그랗게 키우는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사빛이 여전히 멍한 채 멈춰 있자, 그녀 손에 있던 메뉴판을 빼내 쓱 한번 훑은 이훤이 호출 버튼을 눌렀다.
“소시지 먹을 거지?”
그녀가 골똘히 보고 있던 페이지엔 이런저런 소시지 요리만 가득했다.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떠나기로 했던 여행이 아쉽긴 했던 모양이다.
직원이 오자 말했다.
“여기 있는 거 다 주시고요. 생맥주 500짜리 두 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주문지에 내용을 적은 후 직원이 가고, 그녀는 또 다른 이유로 당황해했다.
“그걸 다 먹는다고요?”
“다섯 종류던데 뭘. 이거 저것 맛봐. 나머지는 내가 먹을게. 맥주는 생맥주 한 잔만 해.”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다. 그마저도 다 안 마실 게 뻔했다.
“아, 네, 뭐. 어떻게 왔어요?”
“차 타고 왔지.”
“아니…….”
왜 왔느냐는 물음인가 보았다. 계속 피할 수는 없어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너 보러 왔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거기 일은 어떻게 하고요.”
“자고 내일 아침 일찍 가면 돼. 대책 회의 마쳤고, 내일부터는 현장 잘 수습되는지 보고, 뉴스가 꽤 크게 나서 이미지 쇄신이 좀 필요할 것 같아.”
그의 말에 그녀가 이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쉬고 내일 일할 것이지 무엇 하러 왔느냐는 얼굴이었다.
입술을 벌리고 할 말을 찾아 벙싯대기에 콧등을 툭 치고는 허리를 바짝 당겨 안았다.
* * *
“몇 층?”
“9층이요.”
안 그래도 저녁 식사가 부실했던 그는 맥주와 안주로 배를 채우고 그녀와 함께 숙소가 있는 건물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가 층 버튼과 닫힘 버튼을 군더더기 없는 빠른 동작으로 톡톡 누르자 좁은 공간에 둘만이 있게 되었다.
와락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지만 CCTV가 있을 테니 애써 눌러 참고 어깨만 꽉 끌어안았다.
잠시 후 작은 손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 드는 카드 키를 빼앗아 재빠르게 문을 열며 그녀를 문안으로 밀어 넣었다.
입술을 맞붙인 채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제 안에 움켜 넣고 잔뜩 우물거리다가 혀로 파고들었다.
여린 살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어정쩡하게 그의 팔을 잡고 있는 손을 자신의 목에 두르게 했다.
한참 집요하게 파고드니 그녀도 포기했는지 눈을 감고 천천히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싸한 기운이 정수리에 번졌다.
사부작거리는 혀를 낚아채 제 안으로 빨아들이니 그의 뒷머리에 닿았던 가녀린 손가락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렇게 딱 달라붙은 채로 그들은 따뜻한 호흡을 섞으며 긴 입맞춤을 나눴다.
잔득해진 타액이 거미줄 같은 실을 만들어 내고, 질척이는 소리가 무르익고, 하나로 엉킨 살덩이가 점점 더 뜨겁게 달구어졌다.
진한 키스를 이어 가며 하체를 좀 더 밀착시키자 그녀가 볼을 붉게 물들이며 여린 신음을 흘렸다.
그 소리에 그의 심장이 격하게 타올랐다.
“사실…….”
이훤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가 도톰하게 부어오른 입술을 희게 깨물며 그와 함께 밀려들어 갔다.
“당신이랑 자러 왔어. 오늘부터 노력하기로 했잖아.”
피임하지 않기로 한 첫날이었다.
그들은 아직 젊지만 어쩐지 그녀는 아이를 일찍 갖기를 원했고, 그들은 그 일을 오늘로 미뤘었다.
미신이고 아니고,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조금의 찜찜함도 없는 상태에서 가지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작든 크든 부모의 불안이 태아에게 영향을 미칠 테니까. 엄마의 불안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는 평생 겪어 와 괜찮지만 그로 인해 그녀와 아이가 불안한 건 싫었다.
그런데 그의 말투나 표정이 사뭇 전투적이었다.
침대에 발꿈치가 걸린 그녀는 매트리스에 털썩 엉덩이를 주저앉힌 채로 시트에 등을 눕히게 되었다.
그가 다리 사이에 그녀를 가두고 몸을 45도로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손으론 그녀의 두 손목을 붙잡아 머리 위 시트에 고정하고, 나머지 손으론 그녀의 다리 한쪽을 들어 제 허리에 감게 했다.
자세가 민망한지 올려다보는 얼굴에 새빨간 홍조가 일었다. 그것이 물감처럼 사르르 녹아 그녀의 아래로 번져 나갔다.
힘이 빠지려는 다리를 단단히 붙잡고서 연홍빛으로 곱게 물든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한참 목을 물고 빨다 턱을 따라 올라가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자연스레 옆으로 이동해 귓불과 귓구멍을 헤집고 둥근 귓바퀴까지 한 움큼 삼켰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벌어지는 작은 입술 사이로 또다시 그의 것을 밀어 넣고 촉촉한 습기와 함께 몰캉한 살을 흠씬 빨아들였다.
조그마한 혀가 그의 혀에 잔득하게 달라붙었다.
혓바닥의 돌기 하나하나까지 확인하며 몸을 살짝 튼 그가 그녀의 꽃무늬 원피스를 브래지어와 함께 위로 말아 올렸다.
짙은 색에 대비되는 두 개의 흰 살덩이가 밤빛에 흐드러진 모습을 드러냈다.
가만 바라보다가 그중 하나를 입 안에 넣고 빨았다.
그러자 그녀가 허리를 뒤틀며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물기로 잔뜩 반들거리게 만들어 놓고 다른 쪽도 물고는 나머지는 주물렀다.
점점 단단해지는 멍울이 손바닥 안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찰진 살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기분 좋게 감겨들었다.
멍울을 위로 당기듯 올려 혀로 할짝거리자, 가슴 끝이 성감대인 여체가 파르르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