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75)

61화

사빛이 그것을 이훤에게 보여 주었다.

― 아론이 찾은 거예요.

제발 충격을 받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은 아버님이 실종되셨다는 장소에서 발견된 등산화 한쪽의 다른 쪽이었다.

실종 장소에 있었던 건 본가 아버님의 서재 유리 장식장 안에 고이 들어 있다.

할머님이 그렇게 해 놓으셨다고 한다. 간혹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바라보신다고 아영이 알려 주었다.

정확히 아버님 서재에 있는 그 신발의 반대쪽이 바다 아래 큰 돌들 사이에 짓눌리듯 박혀 있었다.

이훤의 몸이 크게 긴장하며 딱딱하게 굳었다.

사빛은 조마조마했지만 한편으론 이훤을 믿었다. 그는 화도 곧잘 내지만 냉철해야 할 때는 정말 냉철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러할 때였다.

그는 한참을 숨만 고르며 말이 없었다. 숨죽이며 기다린 시간이 30분을 넘은 거 같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는 냉철해져 있었다.

또한, 매우 신중하게 움직여야 할 때였다. 해서 이훤 대신 사빛이 월랑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필요한 물건 챙기러 가는 척 월랑에 내려가 진현당에 들렀다가, 인사드리러 가는 척하며 외할아버님 댁을 방문했다.

사빛이 아론을 멈춰 세워 놓은 바로 그 자리를 실시간으로 연결해 외할아버님께 보여 드렸다.

이미 이훤과의 통화로 대강의 정황을 알고 계셨다. 어머님의 일도.

“이 정확한 장소를 제가 압니다.”

아론이 알려 주는 좌표는 사빛이 꿈에서 바다에 빠졌던 바로 그 장소이다. 인적 없는 높은 절벽의 밑.

왜 거기까지 비척거리며 걸어가서 빠졌나 했더니 아버님이 계신 곳이었다.

외할아버님은 이 지역의 탑급 유지였다. 바로 경찰서장과 통화해 해당 바다의 은밀한 수사를 부탁했다.

또한 이훤이 따로 고용한 전문 탐정은 월랑시로 들어서는 초입 부분, 수십 년간 같은 자리에서 특산 과자 가게를 운영하며 내외부의 CCTV 녹화분을 모은다는 사람을 통해 해당 연월일의 도로 녹화분을 열람했다.

강도를 당한 이후 생겼다는 이의 특이한 수집증 덕에 운전하는 작은아버님과 옆자리에서 잠든 아버님이 계신 차량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부분만 비싼 값에 사들였다.

개인정보 보호법을 위반하며 얻은 정보라 문제가 될 수 있었으나, 위험을 감수할 만큼 중요한 정보였다.

알아보니 그 차량은 대포차였다.

상황으로 보아 계획범죄로 보이며, 산에서 내려오는 아버님을 차에 태운 작은아버님이 수면제를 먹인 후 발목에 돌을 묶어 바다에 던졌을 확률이 가장 크다고 한다.

수습된 유골은 곧 국립 과학 수사대로 보내졌다.

* * *

할머님이 충격받지 않도록 사실을 전하는 건 이훤이 맡았다.

둘은 아주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고, 할머님은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창밖만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이훤이 외부 활동을 위해 나가고, 사빛은 쥐 죽은 듯이 할머님 곁에서 그 쓸쓸한 눈물을 지켰다.

그렁그렁 맺혔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 한참 이어졌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윤 관장이 사빛을 불렀다.

“아가.”

“네, 할머님.”

“너 아영이랑 친하지?”

“네.”

“눈치 잘 살폈다가 마당의 온실로 가. 거기에 회장님 밀실이 있어. 비밀번호는 아무도 모르는데 소사 영감이 예비 열쇠를 가지고 있어. 소사 영감은 뼛속까지 회장님 사람이니 조심하고, 아영이를 설득해서 한 번 열어 봐. 거기 있는 것들, 장부랑 서류랑 노트북 같은 걸 텐데 사진 찍거나 복사해서 검찰에 넘겨.”

1평 남짓한 작은 공간으로, 경영권 승계를 위해 벌인 그간의 불법 행위 증거들이 있을 거라고 한다. 그 외에 배임이나 재산 은닉에 관한 자료들까지.

조금이라도 위험한 건 대부분 그곳에 보관한다고 한다.

“그럼 할아버님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간 묵인한 나도 죄가 없다고 할 순 없지.”

“…….”

“묵인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니? 사실 내 고집 때문이었어. 난 우리 현성이가 언젠가 꼭 돌아올 거라 믿었거든.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으니까. 그 믿음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왔거든. 돌아왔을 때 엄마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꼭 말해 주고 싶었거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말하는 윤 관장의 모습이 몹시 적적해 보였다. 기운 또한 하나도 없으셨다.

사빛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들었다.

“그래서 차마 실종 사망 처리를 하지 못했어. 왔는데, 어렵게 돌아왔는데 자신이 사망자가 되어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쓰리겠어. 2층을 그 애가 있던 그대로 둔 것도 다 그런 내 고집 때문이었어. 나마저 그 끈을 놓으면 정말 그 아인 죽은 게 되니까, 이 세상에 없는 게 되니까 도저히 놓아지지가 않더라고. 시간이 흐를수록 헛된 희망임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끈을 놓지 못했어. 하루만, 하루만 더, 그러다 보니 어느새 20년이 되었지.”

윤 관장이 지난 자신을 회상하며 슬픈 미소를 띠었다.

“그것 때문에 회장님한테 많이 지고 들어갔다. 내 뜻대로 해 주는 대신 회사 일에 관심 가지지 말라면 그리했고, 내 몫의 의결권도 언제나 회장님 구미에 맞게 행사해 드렸고. 또 연석이네한테도 잘해 주라면…….”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멈추는 윤 관장. 지나고 나니 아들 며느리를 죽인 원수에게 잘해 준 격이었다.

한참 옅은 숨만 힘겹게 내쉬던 윤 관장이 다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이훤이도 내 그 마음을 아니까 한 번도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더라. 상속권자니까 성인이 되어서는 제 뜻으로 법원에 신청해도 될 텐데 하지 않고. 그것 때문에 내가 늘 회장님한테 지고 들어가니까 저도 그러고.”

사빛이 눈길을 떨구었다.

할머님은 어른이었고 본인의 뜻으로 그리했다고 해도, 이훤은 정말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겠구나 싶었다.

두 사람의 아픔을 사빛은 감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참 못 할 짓이었지. 그 어린 것이 이런 할미 보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내 아들이 돌아올 것 같아서. 내일이라도 문을 열고 ‘어머니, 저 왔어요’ 할 것만 같아서…….”

사빛이 떨리는 윤 관장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이젠 놓아주어야지.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까 내가 가서 만나야지. 내가 가서 만나면 되지.”

윤 관장의 두 볼 위로 눈물이 주룩 흘렀다.

“할머님…… 그런 말씀 마세요. 이훤 씨 곁에 오래오래 함께해 주셔야지요.”

대답 없이 잡은 손을 토닥토닥하던 윤 관장이 한참 후 다시 입을 뗐다.

“이젠 그 두 사람 하는 거 묵인해 줄 이유가 없구나. 회사가 주식회사면 권씨 집안의 것만이 아닌데. 수뇌부가 굳건해야 이솔 가족들, 또 하청 업체나 거래처 식구들까지 건강하게 살지. 권 사장이 그릇이 못 되는 거 나도 진작 알고 있었다. 섞은 물은 들어내야지.”

권 사장의 사업 수완은 과히 좋지 못했다. 얼마 전에는 2년 전 공격적으로 매수했던 해외의 광산이 폐광까지 했다.

“그럼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난 이제 괜찮으니까 이훤이 데리고 진현당으로 가. 제주도 동생이 오기로 했어.”

윤 관장이 또다시 사빛의 손등을 두드린 후 침대에 몸을 눕히고 힘겨운 눈을 감았다.

* * *

돌아가는 낌새가 심상치 않음에 위기감을 느낀 권 회장.

내년 봄 주총까지 기다리지 아니하고 임시 이사회를 개최하여 퇴임을 선언하고 권연석 사장을 회장직에 선임해 버렸다.

이에 이 회장 측은 이솔 그룹의 지주 회사인 이솔 스틸의 임시 주주 총회를 신청했다.

이솔 제강 등 일부 이사회가 불참한 상태에서 저들끼리 벌인 일이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안건은 이솔 스틸 권연석 대표 이사 해임과 이솔 제강 이해양 대표 이사의 그룹 부회장 선임.

그리고 이솔 스틸 권이훤 이사를 현재 공석인 이솔 스틸의 전무 이사로 선임하는 안이었다.

이는 권이훤이 친가를 버리고 외가를 택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본격적으로 그룹 경영에 발을 들이겠다는 뜻이었다.

* * *

임시 주총일이 되었다.

이솔의 대주주들이 하나둘 도착하고, 소액 주주 중에서도 참석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이제 제법 많은 이솔 주식을 보유한 황성재 사장도 있었다.

이훤이 할머니 윤여란 여사의 의결권을 위임받아 참석했고, 그의 친할아버지 권 회장과 외할아버지 이 회장도 상석에서 마주하고 앉았다.

개회 선언 이후, 권연석 사장의 해임안이 나오자 주주들의 찬반 의견이 팽팽했다.

찬성과 반대를 외치는 소란이 일자 사회자가 발언권을 받고 말하라 했고 이훤이 손을 들었다.

단상으로 나간 이훤은 좌중을 한 번 쓱 훑은 후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주주 여러분.”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리며 회의실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값비싼 재질의 옷 안에 야수 같은 몸을 감추고 진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냉정한 눈빛과 차가운 입매, 그리고 울림 있는 목소리까지.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자였다.

“저희가 임시 주주 총회의 소집을 청구한 이유는 회사와 최대 주주의 경영 불투명성과 비상식적인 행태가 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경영진 교체를 통한 지배 구조 개편이 없이는 주주들의 신성한 권익을 보호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권연석 대표 이사 겸 이사회 의장의 해임안을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틈 없는 이훤의 말이 이어졌다.

“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경영 이념으로 도입한 시점입니다. 그간 숱한 실책으로 증명된 경영인으로서의 자질도 그렇거니와 반인륜적이며 비도덕적이기까지 한 사람이 이솔의 대표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 사료되어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자료를 준비해 왔으니 화면을 보시죠.”

이훤의 부탁으로 대형 스크린에 영상이 띄워졌다.

바닷속이었다. 화면은 온통 뿌연 물이었다. 쉬이익- 쇠에에- 이상한 소리가 큰 강당을 가득 메웠다.

잠시 후, 이훤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저는 해양 탐사 로봇을 만듭니다. 그 로봇이 얼마 전 월랑 바다 깊은 곳에서 찾아낸 참담함입니다. 보시죠.”

그때, 뒷문이 열리며 경찰 서너 명이 들어왔다.

“뭡니까.”

이훤이 단상에 등장한 이후 내내 예민한 날이 서 있던 권연석 사장이 신경질적으로 외치고 사람들도 웅성거리는데, 이훤이 영사기를 맡은 사람에게 계속하라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경찰 난입 덕에 멈췄던 영상물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곧 사람들은 이끼 낀 바위틈에서 등산화 한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본 권연석 사장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훤이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신발은 이솔 그룹 창업자이신 권택민 회장님의 장남이자 저의 부친께서 20년 전 실종되실 당시 집에서 신고 나갔던 신발의 한쪽입니다. 나머지 한쪽은 알려진 바와 같이 고산에서 발견되었지요.”

그때, 영상이 줌 인 되며 회의실 안에 탄식과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제법 큰 돌덩이와 자갈흙 사이에 흩어진 유골이 바닥에 반쯤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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