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75)

59화

권 사장이 사빛에게 눈을 둔 채로 주원에게 명했다.

“주원이, 엄마 데리고 집으로 가.”

“아버지.”

“얼른! 돌아가 기다려.”

단호하게 말하는 낮은 목소리가 음산했다. 굉장히 심기가 나쁜 듯한 목소리였다.

은원이 거들었다.

“그래, 깨나시면 연락할 테니까 우선 가 있어. 할아버지 정신 사나우시니까.”

그때,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중년의 의사가 복도로 나왔다.

수영이 달려가 매달리듯 물었다.

“어머님 어떠세요. 어떻게든 어머님 깨어나셔야 해요. 어떻게든.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곧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눈물이 그렁한 채 말하니 시어머니가 몹시 걱정되어 그러는 듯 보이지만, 사실 아니었다.

사빛도 이제 알 만큼 알아 훤히 보였다.

이훤이 저렇게 돌아선 시점에 할머님마저 잘못되면 권 사장의 회장 등극을 위한 지지표 확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아직은 할머님이 그들의 편을 들어주어야 했다.

“위기는 넘기셨습니다.”

의사의 말에 안도한 이훤도 이내 양수영을 보며 그 점을 비꼬았다. 그녀가 의사를 붙들고 재차 깨어나셨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더럽다 못해 토악질이 나오려고 하네.”

“너 이 새끼!”

더는 참지 못한 권 사장이 이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완전 개싸가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주원이 불퉁하게 쏘아붙이곤 얼른 자기 엄마를 데리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권 회장이 일어나 의사를 상대했다.

“자세히 이야기해 보시오.”

그제야 권 사장도 이훤의 멱살 쥔 손을 놓았다.

할머님은 다행히 큰 문제가 없으셨다. 떨어졌던 평균 동맥압도 일정 수치 이상으로 올라와 고비는 넘겼다고 한다.

그래도 목숨까지 위험할 뻔했다. 지금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니 입원하면서 종합적인 검진도 받고 몸을 추스르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모두 들어가 환자를 만났지만 아직 산소 호흡기도 끼고 있고 기력이 없어서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무사한 것만 확인한 후 권 사장과 은원이 권 회장과 함께 연희동으로 돌아갔고, 병원에는 사빛과 이훤이 남았다.

의자에 나란히 앉은 그가 기운 없이 말했다.

“내가 너무, 경솔했어. 화가 나서.”

“알아요.”

사빛이 그의 큰 등을 쓰다듬듯 두드렸다.

“이훤 씨 아니라 누구라도 화가 날 상황이었어요. 할머님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괜찮으시다니 너무 괴로워 마세요. 이훤 씨가 씩씩해야 할머님도 힘을 내시죠.”

“하아-”

이훤이 쓰라린 마음을 추스를 동안 사빛은 그의 손을 잡은 채 한참 가만히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좀 안정이 된 듯하자 사빛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저는 여기저기 좀 다녀야 할 것 같아요. 우선 회사에 출근해서 일 좀 정리해 놓고 백화점에 들러 당장 필요한 것들 사 올게요. 언제 진현당에 가서 옷이랑 챙겨 오고요.”

“그냥 같이 있지.”

안 그래도 그녀의 안전에 대해 걱정이 많던 사람인데 이런 일까지 있어 더욱 불안해 보였다. 사빛이 웃으며 그의 앞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잘못되지 않아요.”

“어떻게 알아. 저러는데.”

“저는 알아요.”

그녀의 말에 그가 피식- 힘없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 너는 늘 다 알지.”

사빛도 옅은 미소로 응대해 주었다.

“다는 모르고 제가 잘못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서네요. 누군가 지켜 주실 것 같아요.”

“누구.”

“있어요. 그러니까 안심하고 나 좀 자유롭게 해 줘 봐요. 이훤 씨가 아무것도 못 하게 하고 아무 데도 못 가게 한다고 안전한 게 아니잖아요. 전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그 위험을 찾아내서 없애고 싶어요. 그러려면 숨지 말고 부딪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훤의 표정이 심각해지려 하자 사빛이 짐짓 씩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옛날에 어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잠시 했는데 그렇더라고요. 열심히 방어에만 치중하면 자꾸만 지더라고요.”

“…….”

“저를 좀 믿어 보세요. 영기 씨랑 늘 함께 다닐 거고요, 어디 가고 누구 만나는지 일일이 알려 줄게요.”

그 뒤로도 사빛은 아주 긴 시간, 그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윤 관장은 VIP 병동의 특실로 옮겨졌다.

이훤은 윤 관장이 입원해 있는 동안 사빛과 함께 병원에서 지내기로 했다.

집 떠나서 자면 안 된다는 제약 따위도 이젠 상관없었다.

그딴 것 아무리 지켜도 이렇듯 안 좋은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데.

무엇보다 할머니를 혼자 두거나 작은어머니에게 맡길 수 없고, 그렇다고 할머니와 사빛을 두고 그 혼자 갈 수도 없었다.

병실에 보호자를 위한 별실이 붙어 있어 지내는데 불편할 일은 없었다.

의사의 아침 회진 후 사빛은 어제 그와 이야기한 대로 길을 나섰다.

배웅 나와 그녀가 엘리베이터 타는 모습까지 지켜본 이훤은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전광판을 바라보다 그마저 끝나자 뒤돌아섰다.

병원에 남았지만 그도 그대로 할 일이 많았다.

사빛의 말이 옳다. 가만히 앉아 우습지도 않은 방어벽이나 쌓는 삶, 이제 그만해야겠다.

어렸을 때는 제가 얌전히 있어야 좋은 줄 알았다. 그가 아무것도 안 해야 평화로운 줄 알았다.

그들이 그렇다 했고, 실제 그래 보였다.

그러나 어머니를 해했고 사빛을 해하려 한 걸 알았는데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하물며 이룡을 등에 업은 자야.

그들은 잘못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렸다.

도망도 안 칠 테다. 이런 할머니를 두고 사빛만 데리고 떠날 생각을 했다니.

사빛이 왜 늙고 병든 자기 할머니를 위해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팔려 오고, 이후로도 아무 데도 못 간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떠나더라도 할머니 돌아가신 후에 가야겠다.

이훤이 간이 의자에 앉아 할머니의 노쇠한 손을 쥐었다.

주름진 손을 잡자 또다시 자책이 많이 되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조절하지 못한 자신의 화 때문에 이렇게 되신 것이니.

욱하는 성미를 많이 고친 것 같은데도 이런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말하는데 할머니의 손이 움찔했다. 그가 그 손등을 나머지 손으로 덮어 드리니, 미약하게나마 할머니도 손에 힘을 주셨다.

* * *

사빛은 이훤에게 말한 대로 바빴다.

우선 본가로 가 씻고 여벌로 가져다 놓은 옷으로 갈아입은 후 출근했다.

며칠 못 나올 듯해 모든 업무를 전화로 처리할 수 있게끔 정리해 두고 본사 건물을 나섰다.

주차장에서 지상으로 빠져나가며 멀어지는 사옥을 잠시 바라봤다. 처음에 왔을 때 웅장하고 활기차 보였던 모습이 다소 적막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저곳도 하나의 작은 세상이었다. 인간사 돌아가는 이치가 저 안에서도 뱅글뱅글 돌았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어디에나 그랬다.

그녀도 어렵고 복잡한 상황에 부닥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냥 뱅글뱅글 돌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방법은 없었다. 멈추지 않을 거면 열심히 도는 수밖에.

사빛은 지금 방영희 씨를 만나러 간다.

영기가 운전하는 검은색 고급 세단이 서울 북부 외곽으로 향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딸의 집에 있었다. 단층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동네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창으로 말소리가 넘어왔다. 싸우는 것 같았다. 아니, 가만 들으니 한쪽이 일방적으로 울부짖는 듯한 소리였다.

젊은 여자가 소리쳤다.

“갑자기 나타나선 자꾸 이러면 어떻게 해. 엄마 아빠 여기 와 있는 것도 이 서방한테 눈치 보여 죽겠는데 이 서방 회사까지 그만두라니. 우리 뭐 먹고 살라고. 우리 둘째, 이제 막 태어났잖아.”

그러고 보니 아기가 울고 있다. 그래서 더욱 시끄럽게 느껴졌나 보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틈을 타고 아주머니의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거긴 그만둬야 해. 경력 쌓였으니까 다른 직장을 찾으면 되잖아.”

딸인 듯한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요즘 취업하는 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저 나이에? 관리직이?”

그래도 젖을 물렸는지 아기 우는 소리는 잦아들었다.

“그럼 어떡해.”

“뭘 어떡해. 우리 그냥 놔둬.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엄마 아빠 그만뒀으면 됐잖아.”

뭐 그런 이야기였다. 사위가 이솔과 관계된 직장에 다니나 보았다.

사빛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창문 너머에서 트로트 멜로디의 벨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머니는 한참 받지 않았다.

“뭐 해. 전화 왔잖아.”

딸이 또 신경질을 내는 때, 슈퍼라도 다녀오는지 검은 봉지를 손에 든 태 씨 아저씨가 골목 너머에서 다가오다 사빛을 보고는 멈춰 섰다.

사빛이 전화를 종료하고 가만히 마주 봤다.

아저씨는 늘 그렇듯이, 정중하게 고개 숙여 예의를 표했다.

* * *

세 사람이 동네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커피숍 주인은 주문받은 음료만 만들어 주곤 옆 미용실에 있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손님이 그들밖에 없어 가게는 조용했다. 커피숍인데 어째서인지 음악도 없었다. 사빛이 먼저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제야 방영희도 인사를 건넸다.

“예. 사모님도 잘 지내셨죠.”

“네.”

“이사님은……?”

조심스럽게 묻고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다.

“병원에 있어요.”

사빛의 말에 내 기운 없던 방영희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병원이라니 놀란 듯하다.

“예에? 아니, 왜요?”

“할머님께서 쓰러지셨거든요. 다행히 의식은 찾으셨는데 한동안 입원하기로 했어요. 좀 안 좋으세요.”

방영희의 눈에 이번엔 뿌연 눈물이 차올랐다.

“혹시 그 생강즙 때문에…….”

“네.”

방영희가 고개를 푹 숙였다. 둥근 어깨가 오늘따라 참 가냘파 보인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그 즙, 왜 저 안 주고 하수구에 버리셨어요.”

“드시면 안 되잖아요.”

“먹으면 안 되는 건 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요. 방금 생강즙이라고 하셨잖아요.”

“…….”

“작은어머님이 이번에 주시면서 알려 주던가요?”

“아뇨.”

“그럼 오래전에 어머님께도 드렸었나요?”

방영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언제나 씩씩한 아주머니였기에 사빛은 그녀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땐 그런 건 줄 몰랐어요. 늘 드시는 거니 챙겨 드리라고 해서……. 드리면 좋아하시기도 했고요.”

“중독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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