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사실이 아닙니다. 전부 모함입니다. 전 정말 소화에 좋다기에 생강차를 끓여 드린 것뿐이고, 저희도 집에서 다 함께 마셨습니다. 한데 저희는 멀쩡하지 않습니까.”
사빛도 한마디 했다.
“저희가 작은어머님을 이유 없이 모함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 말씀을 들으니 생각납니다. 작은어머님께서 이훤 씨에게 댁에서 해 드시면서 같이한 것이라고 하셨다지요. 그럼 여기에도 있겠네요.”
하면서 사용인들을 쳐다보았다. 가져와 보라는 뜻으로.
실물을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서로를 멀뚱히 쳐다볼 뿐인 사용인들은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너무나 참담한 일이기에 그래도 혹시나 정말 몰랐기를 바라는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지자 사빛이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없나 보군요.”
잠시의 침묵 후 사빛이 조용히 입을 떼고 긴 이야기를 끝맺었다.
“진현당의 사용인 방영희 씨가 이 일에 관해 뭔가 알고 있습니다. 한번 만나 보시지요.”
이제 뒤는 이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내 목숨이 걸렸다고 생각했을 때와 달리 한발 뒤로 물러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어머님 일기장 맨 앞에 붙은 가족사진. 아기 이훤 씨를 안고 찍은 세 가족의 사진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이 사진을 보기 전에는 결코 아버님 어머님 사진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 속 두 분이 너무나 낯익었다.
두 분 다 사빛이 진현당에 처음 온 날 꾸었던 꿈에서 뵌 것 같다.
우선 어머님은 마치 기시감처럼 꿈속의 저 자신과 비슷했다.
분명 저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진을 보고 난 후부터는 그게 자신이 아니고 어머님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앞부분은 긴가민가하고, 정신이 이상해진 이후부터는 정말 그랬다. 그냥 어머님이었다.
그리고 아버님은…… 물속에 계셨다.
그녀가 바닷물에 빠졌을 때 그 물 안에 계셨다. 눈을 감고 의식을 잃은 채 저 바다 깊은 아래로 사라지셨다.
정말 놀랍고도 얼얼했다. 아버님은 그녀가 꿈에서 빠졌던 바다와 상관없는 멀리 떨어진 산에서 실종되신 걸로 아는데 어째서 그녀와 같은 장소에 계신단 말인가.
두 번째 이유는 행랑 아주머니가 생강즙을 버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사빛이 행랑 아주머니와 관련된 일을 꿈과 다르게 바꾼 건 거리를 좀 둔 것뿐인데, 어째서 아주머니는 그것을 그녀에게 주지 않고 하수구에 버렸을까.
이는 필시 아주머니가 어머님께 죄책감을 느끼고 있고, 같은 일을 반복하기 싫었던 탓이리라.
딱히 사빛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게 누구였다 해도 그러했을 것 같다. 하니 이건 사빛 자신과 별개로, 따로 흐르는 일이었다.
셋째는 일전에 세간현이 그녀에게 한 말 때문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이만 돌아가려 하는데 목소리와 표정이 확 돌변한 세간현이 이상한 말을 했다.
― 쯧쯧. 젊은 여자가 무거워서 어찌 살아?
공간을 울리는 소리였다.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 힘든 이상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사빛이 놀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 예?
표정마저 달라 보이는 세간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안타까워했다.
― 불쌍해라. 삼나무 침대가 좋은데 구하기 어려우면 베개라도 써 봐. 아니면 부적을 하든가. 만들어 줘?
이러한 것들을 조합해 보니 어쩌면, 그녀가 꾼 그 꿈이 있는 그대로의 미래만을 보여 준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뒤죽박죽, 뭐가 뭔지 모르겠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런 꿈을 꾼 자체가 뭐가 뭔지 모르겠는 혼돈이었다.
그래서 혼돈을 혼돈 자체로 놓고 한 걸음 물러나서 관찰하듯이 보기로 했다. 이훤이 뭔가 알고자 하면 도와주는 방식으로.
이건 내 문제가 아니고 이훤의 문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그저 도와주라고 그런 꿈을 꾼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내가 그를 돕겠다고 왔으니.
그가 차분히 하나하나 해결하며 사태를 냉철하게 볼 수 있도록. 잘 이겨 낼 수 있도록. 그렇게 과거를 딛고 그 힘으로 미래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부탁 같은 거 아니었을까 싶었다.
말이 안 되는 듯하면서도 그럴듯한 결론이 난 것이다.
좀 두렵긴 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잘 도와줄 수 있을까.
그러나 여기까지 생각하자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져서 그런지 기저에 깔려 있던 불안함이 사라졌다. 그렇게 혼란도 점차 가라앉으며 마치 안개가 걷힌 듯 맑고 투명한 기운만이 남았다.
그래, 해 보자. 이미 이만큼 그들의 세상에 들어와 버린 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해 보는 거지 뭐.
무엇보다 그녀는 이훤을 돕고 싶었다. 해 줄 수 있는 건 뭐든지 해서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까도 한 발자국 뒤에 물러서서 그가 화를 분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너무 억누르면 오히려 더 안 좋은 방향으로 터질 것 같아서였다.
화가 나면 화내라고. 괜찮다고. 그러고 나서 침착하게 하나하나 해결해 보자고.
수영은 계속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버님, 어머님. 전 정말 몰랐습니다. 믿어 주세요. 제가 왜 형님과 새아기에게 나쁜 마음을 먹겠어요.”
윤 관장이 말했다.
“어디에서 한 건지 말해 다오. 둘이 말이 다르니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다.”
“그건…….”
“왜 말을 못 해? 어서 말해. 좀 피곤하구나.”
지친 윤 관장이 재차 물었지만 수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빛이 대신 말했다.
“곧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건강원 사람을 찾았거든요.”
약 성분이 나오기 전, 이훤과 영기가 탐정 등 전문가들을 고용해서 찾기 시작했고, 오늘 아침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뭐?”
무릎 꿇고 있던 수영이 두 눈을 부릅뜨며 사빛을 돌아봤다. 그러더니 공격적으로 사빛을 노려보며 시부모를 제 편으로 만들려 했다.
“이거 너무 이상하잖아요? 어떻게 저렇게 착착. 남들 모르는 약 지식도 많고요. 뭔가 수상해요. 저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잖아요. 일부러 계획하고 우리 집에 들어온 애처럼…….”
“뭘 계획해?”
윤 관장이 물었다.
“예?”
수영이 멈칫했다.
사빛이 이태연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땐 신양 운송 사업과 관련해서 들어온 줄 알았다. 돈이 되는 거래처니까 어떻게든 눌러앉아 연을 쭉 이어 가려고 말이다.
그런데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결론 났다.
그다음은 이 회장 쪽이 심은 건가 싶었다. 그래서 이훤을 회사에 끌어들이며 저렇게 나대는 건가.
그러나 증거도 없이 그런 이야기를 윤 관장 앞에서 할 순 없었다. 윤 관장 앞에서 이훤과 관련된 이야기는 아주 신중해야 했다.
권 회장의 눈치를 살피니 그 역시 얼굴 근육이 굳으며 불편한 속내를 표했다.
윤 관장이 연신 의아해하며 물었다.
“은원 애미, 쭉 새아기를 의심하고 있었던 거니?”
수영이 멍해졌다. 저를 바라보며 묻는 윤 관장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이런 일도 벌인 게고?”
“아니, 아니요. 이건 제가 진짜 모르고.”
윤 관장의 표정이 굉장히 어두워졌다.
“건강원 사람을 찾았다니 그치를 만나서 물어보자. 누구 말이 맞는지.”
머리가 아픈 윤 관장은 더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젠 정말 돌아가야 할 듯하다. 혈압이 떨어져서 몸이 자꾸 아래로 처졌다. 어서 가서 몸을 눕혀야 했다.
윤 관장이 길을 나서며 사빛에게도 말했다.
“가자.”
두 사람이 현관 밖으로 나오니 영기가 보안 요원과 함께 서 있었다.
“그이 어디 있어요?”
사빛이 물으며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보니 대문이 활짝 열려 있다.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최 비서님이 따라갔고요.”
“할머님, 저 이훤 씨 좀 찾아볼게요.”
다급하게 말한 사빛이 묵례한 후 빠르게 대문으로 향했다.
그녀는 가면서 이훤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원이 꺼져 있자 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기도 윤 관장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곤 서둘러 사빛의 뒤를 따랐다.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윤 관장은 마음이 몹시 우울하고 슬펐다. 그러다 갑자기 몸까지 휘청하니 보안 요원이 얼른 다가서 부축해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겨우 그의 팔을 토닥이며 안심하라 하고는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한두 발자국 떼다가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 * *
응급실에 실려 온 윤 관장이 들어가 있는 중환자실 앞.
복도 의자에 앉은 권 회장이 뻣뻣하게 등을 세운 채 지팡이를 짚고 있고, 옆자리의 이훤은 괴로운 듯 상체를 숙이고 있다.
사빛은 좀 떨어진 곳에서 영기와 최 비서와 함께 서 있었는데, 권 사장이 자신의 비서를 대동하고 저만치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머님은?”
권 사장이 묻자 권 회장이 말했다.
“소란 피우지 마라.”
곧 은원의 부축을 받으며 수영도 다가오고, 뒤에는 주원도 따라왔다.
비스듬하게 든 얼굴로 그들을 본 이훤이 느릿하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험악한 얼굴에 겁먹은 수영이 뒷걸음질하다 엉덩방아를 쿵- 찧고 말았다.
은원과 주원이 서둘러 엄마의 몸을 붙잡는데, 주원이 쭈그려 앉은 채로 홱 고개를 올려 이훤을 노려보았다.
“왜 이래, 정말. 오빤 진짜 눈에 뵈는 게 없어? 작은어머니잖아. 오빠보다 한참 어른이라고.”
이훤은 그저 몸을 일으킨 것뿐이었다.
“어른이 어른 같아야 대접을 해 주지. 가십시오. 무슨 낯으로 여길 옵니까.”
주원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럼 오빠도 가. 오빠가 개난리 쳐서 할머니 저렇게 되신 거잖아.”
권 회장이 버럭 짜증을 냈다.
“조용히 하라고 했다. 여기 병원이다.”
이때, 권 사장의 눈과 사빛의 눈이 마주쳤다. 사빛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나 권 사장의 눈은 여전히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새 회사에서도 점점 저랬기에 크게 마음 쓰이진 않는데 오늘따라 유독 심했다.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낸다. 이훤이 회사에 매일 나와 임직원들과 친해지는 것과 오늘의 이 사달 모두 그녀의 탓이라는 듯한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