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체념 증후군이란 것이 있다.
정신적 외상을 입은 아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굴레 안에 자신을 가두고 웅크리는 것을 말한다.
잠만 자려 하거나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심하면 코마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꾸준한 관심과 치료가 서서히 아이들을 치료하는데 이훤은 그러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의젓하고 차분했기에 그가 힘들다는 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기도 했고, 어머님은 아들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버님은 오히려 이를 이용했고.
원래 작은 항공사를 사들인 것부터 몇 개가 잘 안 되어 회사가 휘청한 걸 이훤의 사주 탓으로 돌리던 참이었다. 그 애가 이룡살을 타고 태어나 가업이 기우는 거라고 몰아갔다.
그러던 차에 이훤이 아홉 살, 재수가 3단계로 없던 해에 부모가 둘 다 잘못되자 완전히 그의 탓으로 덮어씌웠다.
이훤은 한국에 발을 못 붙이고 외국으로 나갔다.
이후로도 아버님은 이 회장 측을 견제하느라 쭉 그 애를 억압했고, 이훤도 자신의 선택으로 계속 외국에 남았다.
워낙에 타고난 책무가 많은 아이인지라 자주 오긴 와도, 오면 괴로우니까 얼른 돌아가곤 했다.
그랬던 애가 이 체념 증후군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말이다.
아니 된다. 후회하기 전에 지금쯤 막아 줘야 한다.
내일 으뜸 건강원에 연락해야겠다.
20년 전 현 주인의 부모가 운영할 때부터 인연을 맺었던 곳이다. 이후로도 쭉 흑염소니 녹용이니 몸에 좋다는 이런저런 걸 이용하며 연을 이어 오고 있다.
위스키를 다 마신 수영이 가운을 벗고 스탠드를 끄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큰 방 안에 적막만이 가득했다.
* * *
며칠 후 진현당.
이훤이 2층 집무실 책상에서 컴퓨터로 작업 중인데 휴무를 마치고 귀환한 영기가 올라왔다.
사빛은 1층 주방에서 요즘 한창 재미 들린 수제 케이크 만들기에 열중해 있다. 정체가 불분명한 연희동 파스타 집에서 각종 디저트를 맛본 후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잘 쉬고 돌아왔습니다.”
“응.”
“그리고 저기 좀 보시죠.”
영기가 한쪽 벽에 있는 모니터들 쪽으로 다가가 리모컨을 조작했다. 그러더니 진현당의 곳곳을 비추는 CCTV 실시간 화면 중 한 곳을 찾아 크게 튼다.
영기가 뒤로 물러나고 이훤이 보니, 광채 텃밭 한편에 있는 수돗가에 방 여사가 쭈그리고 앉아 있다.
“뭐 하는 거지?”
이훤이 미간을 접곤 물었다. 퉁퉁한 뒷모습이 웅크리고 있어 무엇을 하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옆에는 커다란 스티로폼 상자가 하나 보인다.
“페트병에 든 노란 액체를 하수구에 버리고 있는데요. 그런데 제가 아까 들어오다 아저씨가 마을 어귀에서 저 상자를 전달받는 걸 봤거든요.”
마을 어귀라. 거기다 방금 받은 걸 버리고 앉아 있고.
“아저씨에게 저 상자를 전달한 사람은 허름한 차림의 중년 남자였고요. 으뜸 건강원이라는 상호가 새겨진 봉고를 타고 떠났습니다. 전화는 경기도 번호였고요.”
뭔가 수상한 느낌이 여러 군데서 난다. 이야기를 다 들은 이훤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 느낌을 안다. 어려서부터 그를 돌보던, 혹은 집안일을 해 주던 이들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을라치면 늘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끄나풀. 첩자.
알지만 자신 때문에 집안에 분란이 오는 게 싫어서 모른 척했다. 좀 커서는 할머니가 작은어머니와 잘 지내는 것 같아 심란해하실까 봐 더욱 말 안 했고.
특별히 무언가 행한다기보다 감시의 목적이 커서 대충 거리를 두고 피하면서 살다 보면 그럭저럭 문제없었다.
그러나 이제 지켜야 할 사람이 있으니 달랐다. 의심스러운 사람을 곁에 둘 순 없었다.
이훤이 모니터에 눈을 둔 채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내가 가 볼게. 수고했어.”
“네.”
텃밭 주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앙증맞은 국화들.
태철수가 아내를 위해 심어 놓은 것이다. 오며 가며 보라고.
그 한쪽 끝에 있는 수돗가에서 방영희가 네 개의 페트병에 들었던 액체를 모두 하수구에 버리고는 일어나 허리를 두드렸다.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딱딱한 목소리.
“뭐 하는 거예요?”
방영희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훤이었다. 어둡고 싸늘한 표정에 존댓말까지. 기분 나쁜 일이 있거나 거리를 두고 싶을 때 간혹 저러곤 했다.
방영희의 두 눈동자가 떨렸다.
“이사님.”
이훤의 눈길이 네 개의 빈 페트병과 이제는 비닐과 아이스 팩뿐 텅 비어 버린 큼직한 스티로폼 상자로 향했다.
“새것 같은데 왜 버려요?”
“아, 저.”
“오늘 배달 온 거라 하던데.”
“예? 아, 그게…….”
당황한 방영희는 입술을 깨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훤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휴대폰을 꺼내 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이훤이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 해가 서쪽에서…….]
이훤이 수다스러운 인사말을 차게 끊어 냈다.
“뭘 보내셨길래요.”
실은 떠보는 거였다. 그는 양수영과 통화하는 채로 방영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방영희와 달리 수영은 쉽게 당황하지 않았다.
[으응. 환절기라 몸을 보호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생강 좀 짰어. 정말 좋은, 해풍 맞고 자란 생강이야. 우리 것 하는 김에 좀 더 해서 보낸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진 마. 전에 보니까 새사람 몸이 좀 차더라고. 몸이 차면 아기도 잘 안 들어서거든. 너는 열이 많으니까 먹지 말고.]
“근데 어째서 상호가 없어?”
이훤이 스티로폼 상자를 발로 툭 차며 혼잣말처럼 비아냥거렸다. 빈 상자가 덜그럭거리며 힘없이 나뒹굴었다.
평정을 유지하던 수영이 그제야 당황했다.
[어?]
“이거 성분 의뢰 좀 해 봐.”
이훤이 뒤에 와 서 있던 영기에게 지시했다. 말은 영기에게 했지만 수영더러 들으라는 소리였다.
“예.”
영기가 수돗가로 다가가서 액이 좀 남은 듯한 페트병을 한 개 챙겨 들었다.
전화기를 타고 부들부들 떠는 듯한 수영의 앙칼진 목소리가 넘어왔다.
[이훤이 너!]
“말씀하십시오.”
[너…… 너무 버릇없는 거 아니니? 아무리 어른 없이 외따로 살았다지만…….]
말하는 목소리가 노기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파들거렸다.
“저 이러는 거야 하루 이틀 겪은 것도 아니시고. 한 번만 봐 드릴 테니 앞으로 제 주위에 사람 심지 마십시오. 다 큰지 한참이고 군대에, 장가까지 갔는데 작은어머니 관심, 이제 좀 귀찮고 거추장스럽습니다. 방영희 씨 부부는 오늘부로 진현당 떠납니다. 그럼.”
제 할 말을 마친 이훤이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앞에 선 방영희가 어깨까지 파르르 떨며 망연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련님.”
옛 호칭을 입에 올리는 50대의 늙은 눈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작은어머니가 보낸 생강이란 건 알겠고, 버리는 이유는 뭐예요?”
“…….”
방영희는 여전히 말을 못 하고 아랫입술을 짓쳐 문 채 고개를 떨구었다. 말을 안 할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무감하게 쳐다보던 이훤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가 알아보죠. 짐은 나중에 따로 보낼 테니 오늘 중으로 떠나십시오. 인사도 필요 없습니다. 그나마 여기에다 버리고 있었기에 이 정도에서 끝냅니다.”
차가운 말을 남기고 돌아선 남자가 성큼성큼 텃밭에서 멀어졌다.
협문 밖으로 사라지는 싸늘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방영희. 그제야 주름진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 *
소파 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이훤이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붉게 부서지는 석양이,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 그를 더욱 가라앉아 보이게 했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자몽 차와 케이크 한 접시를 소파 테이블 위에 올린 사빛이 조용한 발걸음으로 다가섰다.
이훤이 그런 그녀를 다리 사이에 넣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무슨 생각 해요.”
“아무 생각도 안 해.”
“아주머니 아저씨 가셔서 서운해서 그래요?”
“아니.”
서운하지 않았다. 끊어 낼 건 끊어 내야 했다. 이제 진현당은 곧 그의 개인 재산이 될 것이니 작은어머니의 첩자를 묵인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태 씨 아저씨 부부만은 아니길 바랐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해 온 사람들이었다.
특히 아저씨는 저 아랫마을에서 태어나, 아버지 어렸을 때부터도 이 집에 함께했다. 아무리 쉽사리 정을 주지 않는 이훤이라고 하나 특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역시, 부질없었다.
“그냥. 왜 그랬을까, 그러지 말지. 그런 생각은 들어.”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아요.”
“무슨?”
“모르지만……. 부인하지 않았다면서요. 보통은 발뺌 먼저 하거나, 봐 달라고 하거나, 그러지 않나요?”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아니까 그런 거겠지. 사람 너무 믿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마. 당하고 살기 딱 좋아.”
“……네.”
“나 빼고.”
“네.”
허리가 안긴 채 그를 바라보며 대답한 사빛이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강아지 밥 준다며 마당으로 나갔다. 원래 태 씨 아저씨가 하던 일인데 이젠 없으니.
그녀는 떼쓰는 법이 없다.
사람을 구하긴 할 건데 당분간은 우리끼리 지내보자 했다.
새 사람이 또다시 작은어머니에게 매수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매우 신중하게 구하고 싶었다. 사실 아예 없었으면 더 좋겠고.
해서 일이 많아질 게 자명한데도 그저 저렇게 ‘네’하고는 웃는다.
그는 사빛이 떼나 앙탈 부리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려 했다. 전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뚝뚝하거나 우울한 스타일은 아닌데 말이다.
사빛은 밝은데 조용하다.
단아하면서 해사한 것이 저 대문 앞 노각나무 꽃 같다.
햇살 아래 희게 웃으며 상기되는 두 뺨을 볼 때면 너무 맑고 고와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떼야 할 때도 자꾸만 떠오르며 그 잔영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가 먹으라고 놓고 간 생크림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폭신한 시트와 고소한 크림이, 위에 올린 자몽의 과육과 함께 입 안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졌다.
잔득하게 번지는 과즙과 함께 우물거리며 창밖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쁘다. 오늘도 여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