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이걸로 못 해 갔던 네 혼수라도 장만할까?
할머니가 말했다. 눈빛을 보니 진심이었다. 사빛이 풋- 웃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봤다.
― 할머니.
― 응.
― 얼마 전에 이훤 씨가 우리 시골집 되샀거든. 우리 그 돈으로 집 새로 짓자.
사빛이 건축사 사무소에서 받은 조감도와 도면을 할머니에게 보여 주었다. 예상대로 할머니는 무척 놀라 하셨고, 기뻐하셨다.
― 원래 철거비랑 건축비도 이훤 씨가 다 한다고 했는데 그럼 너무 미안하잖아. 이걸로 우리 집 철거비랑 건축비 내자. 그거하고 남은 돈으로 병원비하고 생활비 하면 좋겠네.
할머니는 돈을 아껴 쓰니까 아주 오래 쓸 수 있을 터였다. 다 쓰면 그때부턴 사빛이 보태면 될 테고.
할머니도 흔쾌히 찬성하셨다.
물론 이훤은 불만이 가득해서 연신 퉁퉁거렸지만 사빛의 옹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사빛이 협탁의 서랍을 드르륵 닫는데 샤워를 마친 이훤이 머리를 털며 다가와 곁에 털썩 누웠다.
위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잠옷 바지만 입은 상태였다. 몸에 열이 많다는 이유로 자주 저러고 잔다.
그가 팔로 머리를 괸 채 가로누워 사빛의 몸도 휙 눕힌 후 품에 끌어안았다.
“자자.”
그러더니 바닥에 깔린 이불을 잡아 그녀의 몸 위에 덮는다. 덕분에 사빛은 이불 안에 고치처럼 감싸이게 되었다.
“잠옷 좀 입고 올게요.”
눈앞의 너른 가슴을 끔뻑끔뻑 바라보며 사빛이 중얼거렸다.
“그냥 자자.”
갈아입고 싶은데……. 또 말없이 눈을 끔뻑이던 사빛이 바로 앞에서 시선을 끌고 있던 동글한 것을 입에 물었다.
그녀의 행동에 이훤이 움찔 놀랐다. 내려다보니 그녀가 아기처럼 입을 오물거리며 그의 젖을 빨고 있었다.
그의 목울대에서 탄식이 한 줄 흘렀다.
“뭐 해.”
“애무요.”
그녀가 멍울을 입에 문 채 중얼거리자 그의 온몸 근육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이훤은 펼친 손바닥을 들고 한참 굳은 채 있다가 그대로 그녀의 뒤통수에 대었다.
끈적한 액이 피부를 덮고 가시 같은 이가 핏줄을 긁었다.
아랫도리에 열감이 휘몰아치자 이훤이 손가락에 힘을 주며 그녀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한 손안에 다 들어오는 뒤통수였다. 그녀는 한참 촉촉하게 한쪽 젖을 물들이더니 고개를 들어 다른 쪽도 입에 물었다.
사탕처럼 굴리다가 쪽쪽 빨다 조그마한 혀로 할짝할짝 핥아 대니 아주 가는 바늘들이 야릇한 전류를 흘리며 쑤셔 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다리 하나를 그녀의 작은 몸에 휘감았다. 품 안에 갇힌 그녀는 연신 그의 가슴을 물고 빨며 자극해 댔다.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 * *
가을이 왔다.
갈수록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며 봄과 가을이 짧아졌다.
그래도 선선한 바람이 부니 좋았고, 만물이 익어 가니 좋았다.
이훤과 사빛은 주말이라 연희동 본가에 올라와 있었는데, 일요일 오전 차 마시는 시간에 윤 관장이 말했다.
“이렇게 매번 왔다 갔다 하는 거 힘들지 않니? 여기서 출퇴근하는 게 어때?”
부드럽게 끝을 올리는 온화한 말투. 늘 한결같았다. 그녀를 계절로 표현하자면 딱 가을이었다. 곱게 물든 가을.
사빛이 옆자리에 앉은 이훤을 쳐다봤다. 그가 결정할 문제였다.
그는 어제도 나쁜 꿈을 꾼 것 같았다. 문득 거친 숨소리에 눈을 떠 보니 그가 잠든 상태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주 있었던 일이라 사빛은 조용히 그의 가슴 위에 뺨을 묻고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문질렀다.
심장 소리가 쿵쿵 울렸다. 한참 거친 숨을 내쉬던 그가 잠에서 깼는지 그녀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는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는 말 없는 시간이 흐르며 그의 숨소리는 점차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별일이 아니리라. 그는 그저 숨을 좀 빠르게 쉬다가 조용히 눈을 뜬 것뿐이었다. 큰 소리를 내지도, 자세가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빛은 어쩐지 그의 고통을 알 것 같았다. 검은 눈동자에 붉은 열기가 서려 있다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 괜찮아. 그냥 꿈이야.
그가 오히려 그녀를 위로하곤 했다.
― 깨워서 미안해.
사과까지 해 가며.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머리와 등을 쓸어 주었다. 다시 자라고.
사빛은 마음에 찡한 기운이 차올랐다.
악몽이 주는 느낌을 안다. 그것 때문에 괴로워 잠에서 깨는 기분, 너무나 잘 안다.
그걸 오랜 세월 반복해서 겪고 있는 그가 안쓰러웠다. 저보다 훨씬 크고 나이도 많은 사람이지만 가엾었다.
그래도 처음보다 횟수가 주는 것 같다. 그 텀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멋도 모르고 쿨쿨 잔 건 아닌가 싶어 물으면 아니라고, 자신도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도 신기하다고.
이러다가 아예 꾸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가 이겨 냈으면 좋겠다.
그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제 그만 무거운 죄책감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자기가 고른 것도 아닌데 그 생년월일시에 태어난 게 무슨 죄란 말인가.
― 이왕 깬 김에 산에 갈래요?
시간이 새벽 5시를 넘어서 있었다. 어차피 이 시간이면 그도 다시 잠들진 않을 터였다.
연희동 산은 높지 않다.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이의 메타세쿼이아 길을 따라 타닥타닥 걷자면 소나무 숲길이 나오고, 곧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탁 트인 앞으로 서울 시내 전경을 바라보며 사빛이 물었다.
― 저랑 세간현 도사를 만나 보면 어때요.
― 왜.
― 그냥 얘기를 좀 듣고 싶어서.
― 무슨 얘기.
― 우리는 어떻게 만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살면 될지.
그가 픽- 하고 웃었다.
― 그런 거 안 믿는다며.
― 네. 그랬는데 요즘 좀 궁금해졌어요. 우리가 혹시, 만나야 할 운명이어서 만난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들고요.
유행가 가사 같은 말이었다. 말하고 나니 참으로 로맨틱하다.
― 글쎄.
흐린 미소를 지은 그는, 그녀의 제안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의 거부감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었다.
― 그럼 저 혼자 다녀올게요.
굉장히 비싸다고 들었지만 그녀도 이제 돈이 있었다.
어머니가 준 재산을 쓸 건 아니지만 그게 있으니 왠지 든든하여 월급을 팍팍 쓰는 일에 겁이 없어졌다.
그래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라 뭔지 모를 두려움이 일었다.
사빛이 엄한 입만 우물거리고 있자니 그가 또 픽 웃었다.
― 아무튼.
못 말리겠다는 표정이었다.
― 알았어. 같이 가.
그의 한마디에 걱정이 해결된 사빛도 씨익 웃어 보였다.
그와의 관계가 깊어지며 사빛은 그를 옭아매고 있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인터넷으로 검색도 좀 해 보았다.
몰랐는데 사주 명리학이란 매우 심오하고 체계적인 학문 같았다.
사계가 뒤틀린 적이 있었던가. 해와 달이 거꾸로 흐른 적은 있었던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우주와 자연이 이처럼 오차 없이 흐르듯 인간의 삶도 그러하다는 이론이었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라서.
그걸 육십갑자, 음양과 오행, 자연의 이치 등으로 이리저리 따져 결론 내리고 미래 또한 예측하는 거였다. 자세히는 너무 복잡해서 모르겠지만 보다 보니 과연 사람들이 빠져들 만했다.
그래서 사빛은 세간현을 한번 만나 보면 어떨까 싶었다. 우선 그들이 말하는 상황을 정확히 들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찾게 된 세간현의 주상 복합 아파트.
사빛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세간현의 공간은 울긋불긋하지 않았다. 무서운 상이나 칼 같은 것도 없었고.
그 가장 안쪽, 황금 보료에 앉은 세간현이 마주한 이훤을 보고 이야기했다.
“이분은 두꺼비입니다. 그래서 선생께 보내진 거고요.”
황당한 말에 이훤이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빡이는데 세간현의 말이 이어졌다.
“두꺼비는 이룡을 잠재우지요. 이룡이 두꺼비를 무서워해서 몸을 한껏 웅크리거든요. 두테비 마을 전설 들어 보셨습니까?”
“아니요.”
“용이 승천하는 장소인 황룡산을 바라보는 마을이 있습니다. 옛날, 이 마을 사람들은 이무기에게 큰 피해를 봤지요. 용이 되려는 순간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부정한 모습을 보여 승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이 난 이무기는 마을을 해코지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난데없는 옛날이야기에 이훤이 또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뭐 하자는 건지.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지나가며 이무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두꺼비란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하여 사람들이 황룡산이 바라다보이는 산 정상에 큰 두꺼비 바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이후로 이무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마을은 평화로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표정은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유심히 다 들은 이훤이 의문을 제기했다.
“이룡이 왜 두꺼비를 무서워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크기 차이가 엄청날 텐데.
“두꺼비가 독으로 이룡을 죽일 수 있으니까요.”
“어떻게요?”
아무리 독이 세다 한들.
“부러 이룡에게 잡아먹혀 배 속에서 독을 쏘는 겁니다.”
흠, 꾀를 썼네.
“그럼 두꺼비는…….”
“함께 죽지요.”
“뭐!”
심드렁한 표정으로 묻고 듣던 이훤의 표정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방금 사빛을 두꺼비라 해 놓고 이룡과 함께 죽는다고 말한 거지 않나.
인상을 바락 쓰며 몸을 일으키려는 그의 손등을 사빛이 가만히 눌렀다.
이번엔 세간현이 사빛을 쳐다봤다.
“더구나 성산 섬가 출신이고요.”
그러면서 사람 좋은 웃음을 허허거렸다.
사빛도 그녀의 성씨에 관한 유래를 알고 있다. 사빛의 성은 섬(蟾)으로, 오랜 옛날 왕이 특별히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