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사빛은 탁자 위 찻잔에 시선을 둔 채로 덤덤하고 나직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내가 보내 줘야지, 내쫓아서라도 보내 줘야 저것이 살지 싶더래요. 자기는 해 봐서 안다고. 자기가 한 번 더 하면 한 사람 인생 살리는 거라고. 그런 마음으로 보냈대요.”
태연이 놀란 눈으로 사빛을 보았다.
“하니 우리끼리 잘 살자. 너그 엄마 훠이훠이 날아가 맘 편히 살라고 찾지도 말고 그리워하지도 말고 너랑 나랑 이렇게 살자…… 했어요.”
태연의 벌어진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다 무슨 소린지.
“그러니 할머니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불쌍하신 분이에요. 평생 아빠 때문에 진 빚 갚느라, 어린 저 건사하느라 휴일도 없이 사셨어요. 허리도 아마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잘못되신 걸 텐데…….”
마지막은 자기한테 하듯 중얼거리다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만 말을 멈추었다. 숨을 크게 들이켜며 마음을 진정시킨 사빛이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뵙자고 한 건…….”
안방 화장대 앞에 넋 놓고 앉아 있는 태연.
황 사장이 퇴근해 돌아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성질을 냈다.
“애 만났다며. 왜 나한테 말도 안 해 주고. 떠날 작정 했다고 자꾸 이렇게 막 나갈래?”
“…….”
“뭐래. 왜 만나자고 한 건데.”
그제야 태연이 화장대 의자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눈이 뻘건 태연의 모습을 본 황 사장이 시끄럽게 소리치던 입을 다물었다. 오랜만에 딸을 만나서 마음이 심란한가 보았다.
황 사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찬 후 목을 죄는 넥타이를 끌어 내리고 재킷과 바지를 벗어 건네며 다시 물었다.
“별거 없었어?”
권이훤이 이 결혼을 유지한다 했다. 그럼 어찌 보면 혼맥으로 엮이는 것이니 황 사장의 촉각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이솔 스틸 주식을 최대한 많이 사 놓으라네요.”
“뭐?”
“손해는 없을 거래요. 올해 말부터 공급난이 오고 가격이 오른다고.”
헐. 굉장한 고급 정보였다.
“……안 뛰면?”
조심스럽게 되묻는 황 사장을 태연이 빤히 쳐다보았다.
‘뭐야, 저 눈빛은.’
뻘쭘해진 황 사장이 헛기침을 큼- 하고는 과격한 어투로 주절거렸다.
“그러니까 그 집 살며 주워들은 정보로 이득 좀 보려 한다, 이 말인가?”
20여 년 만에 만난 엄마에게 한다는 말이 저런 것이라면 뻔했다. 자기는 이해관계자라 함부로 사고팔 수 없으니 우리 명의로 사서 나중에 나눠 먹자는 거 아니겠나.
만약 그렇다면 없이 산 어린 것이 생각보다 영악했다.
“아뇨. 주식을 내년 봄 주총 때까지만 가지고 있다 부탁을 한 번만 들어 달라는군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내년 봄 주주 총회면 권 회장이 권 사장에게 회장 자리를 넘겨준다는 설이 있는 그…….
황 사장의 머릿속이 급격히 복잡해졌다.
권이훤이 드디어 움직이나 보았다. 그런데 작은아버지인 권연석과 척지려는가 보았다.
권이훤은 이제 겨우 스물아홉. 설마 자기가 그 자리를 대신할 요량은 아니겠고 그럼 누굴 권 사장 대신하려고? 혹시 이가? 이해양 사장?
“허허.”
황 사장이 헛웃음을 흘리며 나머지 옷을 벗었다.
그 두 집 세력 싸움은 워낙 유명하다. 지금은 권가가 본사 건물을 쥐고 있지만 현장 실세인 이가네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같은 지역 출신이라 그들의 속사정을 좀 안다.
권이훤의 가운데 ‘이’자는 원래 오얏 이(李)였다. 즉 외가의 성이란 말씀. 훤은 권가네 족보상 돌림자이고.
요즘은 부모 양쪽 성씨를 넣어 이름을 짓는 경우가 흔한 것 같지만 당시만 해도 길길이 날뛰었던 권 회장이다.
아들 며느리를 닦달해 다른 한자로 출생 신고하여 이 회장이 엄청나게 화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피가 안 보일 뿐이지 칼 들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전쟁터나 다름없는 집이었다.
“그래서 걔, 아니 딸이 원하는 게 정확히 뭔데. 뭘 들어주면 되는 건데.”
“거기까지는 아직 몰라요.”
기운 없이 대답한 태연이 그가 벗은 옷들을 들고 안방에서 나갔다.
사각팬티 한 장 차림으로 침대 끝에 걸터앉은 황 사장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이건 비단 그들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신양 운송의 미래도 한 다리 걸쳐 있는 것이다.
만약 권이훤이 권 사장과 척지기로 한 게 맞는다면 어느 라인에 서야 신양의 앞날에 좋을 것이냐 말이다. 흐름대로 권 사장이냐. 지금 제게 손을 내밀고 있는 권이훤이냐.
머리가 바빠진 황 사장은 우선 세간현과 만나기 위한 예약을 잡았다. 큰일에는 그의 조언을 듣고 행한 지 꽤 되었다.
이솔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향후 선철 가격의 흐름 정도는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굉장히 두루뭉술하게 말하지만 하도 겪다 보니 알아서 가려듣는 법을 체득한 그였다.
그렇게 세간현을 만난 후.
황 사장은 그간 속 썩여 온 아픈 손가락인 서울 시내버스 사업을 경쟁 업체에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현금에 그 매각 대금을 더하여 이솔 스틸 주식 매집에 들어갔다.
* * *
샤워 가운을 입은 사빛이 침대에 앉아 협탁 서랍을 열었다.
거기엔 태연에게 받은 큰 봉투가 들어 있다.
태연은 사빛에게 그것을 전해 주러 나온 것이었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이라고 한다.
― 얼마 되진 않아. 그래도 사는 데 보탬은 될 거야. 난 이제 곧 은퇴하고 서울을 떠날 거야. 내가 정신이 좀 피곤해. 그만 한적한 곳에 들어가 조용히 쉬려고 해.
― 자식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 아이 주시지 왜 저한테…….
― 그 애는 태어날 때 자기 아버지 부부 밑으로 가족 관계를 만들어 놓았어. 아들이 그 애 하나라 황 사장이 알아서 잘 챙길 거야. 성격도 제 아빠 닮아서 모르긴 몰라도 잘 살 거야.
― 저도 괜찮습니다. 노후를 위해 쓰세요.
― 난 시골에 작은 집 하나만 있으면 돼. 연금 나오게 저축해 둔 것이 있거든. 적은 돈이지만 혼자 사는 데 충분해. 너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었어. 어린 나이에 덜컥 아기부터 생기고 보니 그게 너무 무서워서…… 몇 번이나 독한 맘까지 먹었다가 결국 낳고는 책임도 못 지고 떠난 것이……. 이게 보상이 되진 않겠지만 내 속죄라고 생각하고 받아 줘.
― 혹시 아버지 그림 모두 사겠다고 한 분이 어머니신가요. 굉장히 높은 금액을 부르셨다던데.
― 맞아. 난 그이한테도 아주 큰 부채감이 있지. 나 때문에 그림 접었던 거, 그리고 아플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했던 거. 가지고 가서 평생 바라보며 기리면서 살려 했어. 그것도 어찌 보면 욕심이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젠 미련 두지 않아. 신경 쓰지 마.
― …….
― 그냥…… 내가 가지고 있다가 죽을 때 너 주려고 했어. 지금 네가 어려서 혹시 갤러리 장삿속에 충동적으로 팔고 후회하고 그럴까 봐. 근데 보니까 네가 잘하고 있는 것 같아.
― 할머님은 저에게 나쁘게 하실 분이 아니에요.
― ……나는 그쪽에서 물 사주 며느리가 필요한 줄 알았다. 1년짜리 부적이 아니라. 알았다면 소개해 주지 않았을 거야. 나중에 알았을 땐 너무 늦은 뒤였어. 미안하다.
― 할머님은 저희가 평생 함께하길 원하세요. 1년을 종용한 건 위자료를 탐낸 고모네일 거예요. 할머님은 절실하니까 그거라도 받아들이셨을 테고요. 그 과정에서 오해가 있으셨나 봐요.
― 그래?
그렇다면 안심이라는 듯 그녀가 어렴풋이 웃었다. 그 모습을 가만 보다가 사빛이 물었다.
― 저를 이훤 씨와 연결해 주신 이유가 뭔가요.
그녀의 눈빛과 하는 행동으로 보아 오해했던 이유는 아닌 듯했다. 그녀는 나온 이후 신양 운송에 관한 이야기를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차를 몇 모금 마신 후, 그녀가 아주 오랜 인연에 대해 조용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에게 쫓기듯 서울로 와 갈 곳이 없었다고 한다.
길에 앉아 있을 수는 없어 그저 걷다 보니 한강 다리.
그 중간쯤에서 강물을 보자니 사는 게 정말 힘들고 싫더란다.
― 내가 그때부터도 우울증이 심했던 것 같아. 너를 낳기 전, 그리고 낳은 후, 몇 달을 계속 울기만 했거든.
해서 그만 끈을 놓고자 하는데,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쥐는 고사리 같은 손이 있었다고 한다.
보니 백화점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고급스러운 입성의 작은 소년이었다.
새까만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꼭 쥔 손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 그 눈빛이 어찌나 맑던지, 눈이 시큼하고 가슴이 저릿저릿하더라고.
곧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운전석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데 그 또한 너무 예쁜 왕비님 같아 보였다고 한다.
세상에 이렇게 고운 사람들도 있구나 생각했는데, 몇 년 후 신문에서 부고를 보았다. 그때 그 왕비님이었다.
장례식장에 찾아가 들어가진 못하고 먼 곳에서 지켜보았다.
한 뼘 이상 자란 소년은 슬픔이 가득한 채로도 차분했다.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이 짠하면서도 또 아름다웠다.
그리고 20년 후, 세간현에게 갔다가 우연히 그가 이룡살이고 물 사주의 신부를 구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해서 맺어 주고 싶었다. 그 남자 곁에서 서로를 보듬고 채워 주며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 넌 두꺼비니까.
이야기를 마친 태연의 모습이 우울하고 쓸쓸해 보였다. 몹시 지쳐 보였다.
그 지친 중년의 여자에게 이 봉투 속에 든 것들은 짐인 것 같았다. 사빛이 받아 주어야 그녀가 홀가분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받았다.
얼마 아니라던 그녀의 전 재산은 사빛의 입장에서는 실로 놀라울 만한 것이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황성재 사장이 연신 할머니를 찾아온다고 한다.
자기 부하가 실수한 거라고, 죄송하다고 위로금까지 놓고 갔다는데 그 금액이 꽤 컸다.
할머니가 어찌할까 하고 사빛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네 이야기를 자꾸 하는 것이 뭔가 꺼림칙하다고.
그 말을 듣고 사빛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간 들은 이야기와 상황을 엮어 보니 부하가 했다는 일은 황성재 사장이 시킨 것 같다. 나를 이 집에 들여보내려고.
이때껏 가만있다가 갑자기 찾아와 저러는 것도 전혀 순수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필시 저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겼으리라.
거기에 이훤이 끼어 있지 않을까 짐작되었다. 고모와 고모부의 일처럼.
사빛이 말했다.
― 할머니가 결정해. 용서해 줄지, 조사해서 감옥에 넣어 버릴지.
마음 약한 할머니는 능구렁이 황 사장에게 금세 넘어갔고, 대신 평생 가져 보지 못한 돈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