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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2/75)

52화

* * *

며칠 후, 사빛이 큼직한 과일 바구니를 들고 할머니를 방문했다.

오늘은 이훤이 이솔 스틸 이사회에 일이 있어 그녀 혼자 왔다.

물론 이럴 땐 언제나 그렇듯 영기가 함께했고, 그는 지금 복도에서 대기 중이다.

그녀의 할머니는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세월 따라 색소가 점점 옅어지는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 연한 갈색에도 하루가 다르게 건강한 빛이 샘솟았다.

사빛이 예쁘게 깎은 배 한 조각을 포크에 찍어 할머니 손에 쥐여 주었다.

할머니가 잘게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할머니는 이훤이 계속 곁에 있어 자세히 묻지 못했다고, 그녀의 결혼에 대해 상세히 말해 달라고 자꾸만 채근했다.

전화 통화할 때도 여러 차례 물었지만 ‘이훤 씨는 신부가 필요했고, 나는 갈 곳이 필요했다’라는 말로 얼버무렸었다. 그런데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자꾸 캐물으시니 난감하였다.

사빛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영 말하지 않자 할머니가 혼자 추리하다가 은근히 떠보기 시작했다.

“돈이 많은 사람인가 봐. 보니까 그래.”

“응.”

“혹시…… 체취 자리는 아니지?”

할머니가 사빛에게 예전부터 곧잘 써먹곤 했던 스무고개 수법이었다. 어렸을 때는 이 방법에 속아 할머니가 원하는 걸 모두 토로하곤 했다.

“아니야. 총각이었어. 몸도 건강하고, 학교도 좋은데 나오고, 성실하고, 착하고.”

전부 할머니가 예전부터 사빛의 신랑감으로 구상해 놓은 이상형이었다. 어차피 스무고개로 하나하나 물으실 거였기에 한꺼번에 다 말씀드렸다.

“혹시…… 이룡살이야?”

“응.”

할머니의 낯에 슬픔이 내려앉자 사빛이 큰 미소를 짓고는 덧붙였다.

“무슨 걱정하는지 아는데 정말 아무 문제 없어.”

“미안타. 내가 딸을 잘못 교육해가.”

할머니가 또 같은 말을 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빛이 이번엔 천혜향을 하나 들어 껍질을 까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그냥 두꺼비가 아니라며.”

“그건 그렇지만.”

할머니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사빛이 향긋한 천혜향 한 조각을 뜯어 할머니 입에 넣어 주며 계속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나 사실 그런 거 안 믿었는데 그 말이 맞나 봐. 우리 정말 잘 지내거든. 어른들이 궁합을 왜 따지는지 알겠어.”

“정말?”

“정말. 그리고 그 사람, 내년 여름까지만 좀 어렵고 뒤부터는 괜찮대.”

“그래?”

“응. 그때부턴 해외에 많이 나가 있게 된대. 그럼 나 할머니랑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그럼 너도 같이 가야지.”

“아니, 난 여기 있고 그 사람이 가끔 들어온대.”

“왜 같이 안 가고?”

“할머니 두고 내가 어딜 가?”

“내가 중하간?”

“그럼. 난 남편보다 할머니가 더 중한디.”

“허, 그것은 안 될 말이지.”

“왜 옛날에 기남 할아버지가 마도로스가 꿈이라고 했잖아. 기억나? 그 비슷해.”

“배 타?”

“큰 바닷속에 있는 기계들 만들고 돌보는 일을 한대.”

“그렇구나. 진즉에 말하지. 걱정했잖아.”

사빛이 피식 웃었다.

“왜, 나 쓰임만 다하고 소박맞을까 봐?”

“그 사람이 니를 많이 좋아하나 봐?”

사빛이 계속 아무렇지 않게 말하니 할머니도 마음이 좀 편해졌는지 목소리에 웃음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래 보여?”

“응. 우리 손주사위가 널 많이 좋아하는 거 같어.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손주사위…… 낯설면서도 듣기 좋은 말이었다.

“그런데 혹시 친정이 이렇다고 시댁에서 눈치 주거나 그러진 않아?”

문득 작은어머님과 주원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얼른 머리에서 털어 내고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친정이 뭐 어떻다고. 좀 가난한 것뿐인데.”

“요즘은 가난이 죄잖여.”

“흠, 그렇진 않아. 다 알고 들인 건데 뭐.”

“그래도.”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안 계시고, 할머님이 특히 잘해 주셔.”

“진짜?”

“진짜. 진짜 손녀처럼 잘 대해 주셔. 할아버님은 좀 무뚝뚝하긴 한데, 우리 집 가난하다는 말씀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흐른 줄 모르겠는데 벌써 헤어져야 할 때가 다가왔다.

“할머니, 나 이제 그만 가 봐야 해. 저녁에 전화하고, 며칠 있다 또 올게.”

“그려. 내는 신경 쓰지 말고 어여 가 봐. 권 서방한테 잘하고. 시어른들한테도.”

역시 할머니는 옛날 사람이었다. 사빛이 피식- 웃고는 군말 없이 대답했다.

“알았어.”

그날 진현당으로 돌아가는 길.

사빛은 자꾸만 할머니와의 대화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옆자리의 이훤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무슨 생각해?”

사빛은 너무 생각에 골몰하느라 그가 자기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아, 그때 말씀하신 엄마라는 분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가 버릇처럼 그녀의 볼을 손가락 등으로 쓰다듬었다.

“그렇구나.”

“어떤 사람인가요?”

아주 오래 궁금하지 않다가 이제 좀 궁금해졌다.

궁금하지 않았던 이유는 할머니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사빛이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못 견뎌 했다.

잊어야 할 인연이라고 했다. 그래야 둘 다 행복하다고.

생각도 나지 않는 어렸을 때부터 그러고 살았기에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게 되었다.

물론 남들 대부분 있는 것 같은 엄마가 없음이, 살아 있는 데도 곁에 없음이 전혀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할머니가 힘들어하니까 내색하지 않게 된 것뿐.

사빛은 부모가 없었지만 할머니로 충분했다. 충분히 사랑받고 자랐다.

지금 궁금해진 건, 오늘 할머니가 말한 ‘친정’이란 단어 때문이다.

들어 보니 고모네와 비슷한 부류이면서 사는 건 이훤의 세계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관계를 이용해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녀가 나를 통해 얻는 게 있다면 나도 그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예전 같으면 이런 생각 못 하고 살았을 거다. 내 기준으로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나누어 놓고 좋은 사람들하고만 친하게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용할 건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지금 사빛은 아군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했다.

물론 이런저런 생각할 필요 없이 우선은 만나 봐야 하겠지만.

“글쎄.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고 신양 운송 사장의 둘째 부인이라더군. 유명한 배우래.”

“혹시…… 이태연 씨인가요?”

“맞아. 아네.”

또 볼을 엄지로 살살 긁듯이 매만지는 이훤에게 사빛이 웃어 보였다.

평생을 닮았다 들어온 사람이었다.

고향에서 마을 분들이 간혹 이야기하기도 했다. 여기 잠깐 내려왔던 그 며느리 아니냐고.

할머니는 그때마다 길길이 뛰며 아니라고 했다. 그 부정이 너무 단호하니 사빛도 그냥 닮은 사람이겠거니 했다.

TV에 나오는 저런 유명한 사람이 내 엄마라니, 너무 과한 상상이 아닌가. TV 속 사람에게 괜스레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맞나 보았다.

거기다 신양 운송이라면 사빛도 잘 안다. 도로에서건, 터미널에서건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유명한 버스 회사였다. 오며 가며 보기로 공항버스도 있는 것 같았다.

사빛이 물었다.

“제가 이훤 씨 신부가 됨으로써 그분이 얻은 건 뭐였죠?”

“신양이 해양 운송업을 하는데 같은 지역 출신이라 오랫동안 이솔과 가온의 거래처였어. 가온 방직은 할머니 친가 쪽 회사야. 가온 방직과 거래가 끊기려 하니 막아 보려고 그랬던 것 같아. 중국과 인도네시아에 공장이 있어서 해상 물류가 많거든. 요새 수출도 호조고.”

“결국 막았고요?”

“응.”

“그렇군요.”

역시 세상은 공평치가 않다.

결국, 규모가 다를 뿐 고모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예상도 했고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

사빛은 이제 와서 20년 만의 모녀 상봉 운운하며 질질 짤 마음이 없었다. 탓할 마음도 없었다. 지금 그런 감정에 매달려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저쪽도 그녀에게 정이 있는 사람이면 그렇게 오래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테고.

지금 이 결혼 건만 봐도 그렇다. 자기 욕심에 그녀를 이용한 거였다.

분노할 마음도 없다. 세상이 그렇다면 그에 맞춰 살아 주면 되는 거였다. 사빛도 이젠 제법 단단해졌다.

해서 만나기로 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면 함께할 사람인지 아닌지 보일 것이다.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만나 보고 싶어요. 만나게 해 줄 수 있나요?”

“응, 물어볼게. 그쪽이 아쉬운 입장이라 만나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만나고 싶은지 아닌지 말이야.”

“네, 그게 좋겠네요.”

“뭐가 이렇게 쿨해?”

그녀의 담담한 모습에 이훤이 피식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사빛도 따라 웃었다. 엄마로서 만난다기보다 사업 파트너로서 만나는 느낌이었다.

“보고 싶다기보다 그냥 궁금할 뿐이에요.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 * *

며칠 후 시내 한 호텔의 작은 비즈니스 룸.

이태연을 마주한 사빛이 물었다.

“혹시 할머니를 미워하시나요.”

“왜 그런 걸 묻지?”

“마을 분들에게 들었어요. 할머니가 쫓아낸 거랑 다름없다고.”

“그래. 미웠지. 그땐…… 많이 미웠다. 안 그래도 너희 아빠가 갑자기 죽는다고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그게 다 나 때문이라고만 하니.”

“그래야지만 갈 것 같더래요.”

“뭐?”

“어리고 착해 빠진 것이 아무것도 모르고. 병자 뒤치다꺼리하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고. 애 딸린 청상과부로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고 하겠다 하는 게 참 철없어 보였대요. 막 스물 되어서는 이제 막 군대 제대한 학생이랑 살겠다고 왔을 때부터 알아봤대요.”

“허…….”

태연이 허탈한 소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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