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울지 않으려 했는데 할머니가 우니까 사빛도 따라 울게 되었다.
“나 정말 괜찮아. 시집 잘 갔다고. 할머니가 이러면 이 사람 민망하잖아. 그만해.”
탓하듯 말하면서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제가 잘하겠습니다. 걱정하시지 않게 잘 살겠습니다.”
이훤이 또 언제나 곁에서 함께할 부부처럼 말했다. 지금은 이 점이 고마웠다. 의료계 종사자들이 늙은 환자들에게 하곤 한다는 백색 거짓말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할머니가 그의 손을 잡고 힘없이 토닥토닥 두드렸다.
“고마워요.”
“말씀 놓으십시오.”
사빛은 화장실로 들어가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수습했다. 그만 울고 싶었다.
그러나 한참 울고 나니 속은 좀 후련했다.
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와 상관없이 마음이 많이 피곤했었나 보다.
할머니 손잡고 쏟아 내고 나니 개운해졌다.
진현당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사빛이 이훤에게 사과했다.
“울어서 미안해요. 당신 때문이나 내 처지 때문이 아니고 할머니 오랜만에 만난 게 너무 좋아서…….”
“괜찮아. 그것보다 이거 볼래?”
그가 들고 있던 태블릿에서 방금 메일로 들어온 파일을 열어 보였다. 건축사 사무소에서 보낸 도면과 조감도였다.
그들 부부가 원한 건 단층에, 디스크 환자가 살기 편리한 구조를 가진 작은 집이었다.
이층집이나 큰 집은 노인이 생활하거나 관리하기 힘들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면과 조감도. 아담하지만 햇살처럼 예쁜 집에 사빛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탁 트인 하늘이 인상적인 마당엔 잔디가 깔끔하게 깔려 있고, 할머니가 좋아하는 예쁜 꽃나무들이 옹기종기 심겨 있었다. 그리고 한편에 쭉 늘어선 항아리들과 빨랫줄.
전부 할머니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건축사와의 미팅에서 그녀가 주절주절 늘어놓았던 옛 감상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서 살면 할머니는 참 행복하겠다.
“고마워요.”
“그 말은 좀 그만하고.”
“이훤 씨는…… 유혹하는 기술이 참…… 상당하시네요.”
정신을 못 차리겠다.
“유혹당했어? 마음을 다했을 뿐인데 결과가 꽤 흡족하네. 그럼 앞으로도 쭉 마음을 다하는 걸로.”
그가 소년 같은 미소를 띠며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쪽 맞부딪쳤다.
화들짝 놀라 운전석을 살핀 사빛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함께 웃어 버렸다.
진현당 안채로 들어서자 겨울이 다가와 반갑게 맞아 주었다.
큰 꼬리가 연신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겨울은 털빛도 점점 누레졌다. 외할아버님이 왜 꽁이를 처음 봤을 때 된장 같다고 생각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늦여름의 밤이 훈훈했다. 다람쥐가 발길질했는지 사랑채에서 넘어온 소나무 가지에서 연둣빛 솔방울 하나가 또르르 굴러떨어지자 허리를 구부리고 주워 든 사빛이 말했다.
“송실주 만들어야겠어요. 딱 이맘때 솔방울로 만들면 좋거든요. 따도 되나요?”
“솔방울 술?”
“네. 장수 술이니까 만들어서 어른들 가져다드려요. 익으면 드시라고.”
“그거 좋네.”
겨울과 인사하고 손을 꼭 잡은 채 데크에 오른 두 사람이 현관 앞에 섰다.
이훤이 잠금장치의 비밀번호를 누르면서 사빛과 붙잡을 손을 깍지로 바꾸었다.
* * *
며칠 후.
친환경 철강재 위원회 첫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물기가 흐르는 검푸른색 슈트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는 남자가 근사했다. 아침의 싱그러운 기운 때문인지 더욱 그러했다.
속으로 입맛을 다시면서 사빛이 계속 그를 쳐다봤다.
군청색 사선 무늬의 넥타이 매듭을 짓고 있었는데, TV 드라마 같은 데서 곧잘 그러듯이 대신해 주고 싶은데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방법을 몰랐다.
‘뭐, 자기 옷은 자기가 입는 게 맞지. 못 한다면 모를까 저렇게 잘하는데.’
그녀는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 일을 위해 너무 딱딱하지도 너무 튀지도 않는 출근 룩을 몇 벌 샀고, 그 하나인 체크무늬 반소매 재킷과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정 플레어스커트를 갖춰 입었다.
머리는 컬을 넣은 앞머리 한 가닥만 빼고 뒤로 묶었고.
전체적으로 깔끔한 모습이었다.
“정장이 잘 어울리네?”
이훤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누가 누굴 칭찬하는지 모르겠다. 하긴 그는 뭘 입어도 근사하긴 하다.
“그래요? 제가 이런 유의 옷이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좀 듣긴 했어요.”
교복 때부터 그랬다. 덕분에 친구들 추천으로 학교 홈페이지 모델이 되기도 했다.
장학금이 몇십만 원 나와 하긴 했지만, 그땐 남들보다 도드라진 몸이 살짝 싫고 부끄럽기도 했다.
껄렁한 오빠들이 몰려 있다가 ‘저런 몸은 비키니가 딱인데-’ 이런 기분 나쁜 말들도 곧잘 하곤 했다. 쓸데없이 휘파람도 막 불고.
저런 몸이란 어떤 몸인지 정확한 의미를 몰랐던 시절에도 수치심이 들었다.
해서 중고등학교 내내 일부러 펑퍼짐한 옷을 입고 꽉 끼는 속옷을 입었다. 저 창고 방에 있는 캐리어 안의 것들도 대부분 그때의 옷이다.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렇게 태어난 걸 뭐. 장점으로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그럼 가 볼까?”
그가 한쪽 팔을 접어 내밀었다. 픽 웃고는 팔짱을 꼈다.
서울 시내에 있는 한 컨벤션 센터에서 열렸던 모임의 발족식이 끝났다.
사빛의 예상대로 이훤이 초대 회장이 되었다. 임기는 1년인데 한 번 연임이 가능하다.
그가 뽑힌 이유는 이솔이 참여 업체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철강 업체인데다, 그 탑들을 대표하여 참여한 임직원 중에서 직위가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꿈에서 은원 아주버님도 아마 같은 이유로 회장이 되었으리라.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한 언론사와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그들은 이솔 그룹 사옥에 있는 이훤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집무실은 높지만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전망이 아주 좋았다.
발아래로 짜릿하게 펼쳐지는 서울 시내 전경을 바라보다가 사빛이 그를 불렀다. 그는 책상에 앉아 오늘 일에 관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훤 씨.”
“응?”
사빛은 여전히 얼굴을 통유리에 바짝 들이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소 공포증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렸고, 발도 얼굴보다 한 걸음쯤 뒤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 서울 오기 전에는 엘리베이터도 잘 못 탔다. 특히 투명한 엘리베이터는 무서워서 눈을 꼭 감고 견뎌야만 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49층에 있다. 물론 이보다 높은 건물이 많은 건 알지만 사빛은 이만큼도 처음 겪는 높이였다. 두렵지만 짜릿한 느낌이었다.
“우리 여기서 일하면 안 되나요?”
이훤이 서류에서 눈을 들며 또 “응?”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사빛이 그런 그를 돌아보곤 웃었다.
“여기 너무 좋아요. 우리 회사 일, 여기 와서 해요.”
그들이 만들기로 한 로보틱스 회사를 말함이었다.
어차피 아직은 단 둘뿐인 회사였다. 원래는 진현당에서 하려던 일이지만, 이렇게 번듯한 사무실을 비워 놓는 것이 아쉬웠다. 그의 집무실 밖에는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비서 데스크와 작은 탕비실까지 갖춰져 있다.
이솔 사옥은 서울의 남쪽 경계이니 한 시간 반이면 출근할 수 있었다. 둘 다 아침잠이 없는 편이니 일찍 출근했다가 그만큼 일찍 퇴근하면 될 터였다.
사빛이 이 내용까지 조곤조곤 설명하니 가만 듣고 있던 이훤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수긍했다.
“그래, 뭐. 일할 때 각 잡고 일하고 나머지는 쉬면 되겠네. 여기 책상 하나 더 들여서 너 쓰고, 밖에 있는 데스크는 영기 쓰라고 하면 되겠다. 그리고 영기 휴무일에는 쉬자.”
주말에도 일하는 영기는 주중에 하루 쉰다. 그러니 어차피 위원회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은 와야 하는 곳, 세 번 더 오는 것뿐이었다. 사빛이 여기가 좋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괜찮아요?”
“그럼.”
“고마워요.”
사빛이 방실- 미소 지었다. 그 낯이 얼마나 고운지 이훤도 싱긋 웃고 말았다.
잠시 후에는 이곳 집무실에서 인터뷰하기로 한 또 다른 언론사가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전에 사빛은 영기와 함께 총무부 소모품 관리실에 가서 대접할 차와 과자 유를 챙겨 오며 회사 분위기를 살폈다.
그녀는 제대로 된 회사에 다녀 본 적이 없기에 모든 게 신기했다.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일하는 모습들을 보니 자기가 너무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일반 직원들이 있는 공간과 달리 이훤의 집무실이 있는 꼭대기 층은 분위기가 남달랐다. 음산할 정도로 고요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한 사람을 수행하며 우르르 지나갔다. 사라지면 또 쥐 죽은 듯 조용해지고.
가끔 비서인 듯한 이들이 하나둘 보이긴 했으나 딱딱한 표정으로 발소리도 없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기웃거리며 보니 한쪽은 임원실이고 한쪽은 여러 회의실인 것 같았다. 강당도 보였고.
그때 엘리베이터의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선두에 선 사람은 다름 아닌 작은아버님이었다. 이솔 그룹의 제1 사업이자 여타 사업들의 지주 회사인 이솔 스틸의 대표 이사 겸 이사회 의장.
사빛은 영기와 함께 벽면으로 몸을 물리고 고개를 약간 내린 채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작은아버님은 쓱 지나치며 언뜻 그녀를 보곤 음? 하는 눈으로 한동안 바라보다 사라지셨다.
그렇다고 걸음을 멈추거나 말을 거신 건 아니었다.
자기 집무실로 들어선 권 사장.
권 회장을 제외하곤 이솔 임직원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기에 쓰는 방 역시 크고 화려했다.
따라 들어와 재킷을 받아 스타일러에 넣는 인포 비서에게 물었다.
“권이훤 이사가 나왔나?”
“네. 오늘 친환경 철강재 위원회 발족식이 강남 G 컨벤션 센터에서 있었습니다. 15시경 이사님 집무실에서 중인 일보와 인터뷰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인터뷰?”
“네. 권 이사님이 위원회 대표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군.”
잠깐 굳은 얼굴로 생각하던 권 사장은 곧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결재 서류를 하나씩 펼쳐 훑기 시작했다.